<font color="darkblue"> 대화를 막았던 걸림돌이 제거되고 달릴 준비를 하는 6자 회담…정부가 핵문제 우선 해결론만 고수하면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font>
▣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dootakim@hanmail.net
‘북한은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가?’ 얼마 전 베이징에서 중국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반반쯤 의견이 갈렸다. 핵실험을 한 국가 중 핵을 포기한 사례가 없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북한 핵은 협상 수단이라는 반박도 있었다. 나이 지긋한 경험 많은 분이 말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 위해, 핵을 가지려는 것”이라고. 핵을 가져야 미국이 북한을 상대해줄 것이고, 협상 과정에서 체제 안전과 경제 발전의 대안을 제시한다면, 결국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국은 체면을, 북한은 실리를
그 말처럼, 북한의 핵실험은 협상 국면의 계기가 됐다. 지난해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 양자접촉부터 ‘진짜 협상’이 시작됐다. 마침내 지난 1월18일 끝난 베를린 회담으로 긴 교착이 끝나고, 6자 회담은 달릴 준비가 됐다.
베를린 회담이 끝나고, 북-미 양국 협상대표들은 ‘만족’을 표시했다. 북한의 만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았다는 뜻이다. 돈세탁 의혹 때문에 묶여 있던 북한 계좌 중에서 정상 계좌를 우선 풀어주고, 의혹 계좌와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서는 후속 논의를 하는 것으로 정리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6자 회담의 ‘입구’를 막았던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다.
그럼 미국의 만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은 북한이 핵실험을 했기 때문에, 협상 초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했다. 북한이 영변의 5MW 원자로를 중단하고, 사찰을 수용하며, 나아가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의 내역을 신고하고, 핵실험 장소를 폐쇄하라는 이른바 4개의 조기이행 조처(Early Harvest)다. 물론 북한이 이를 받는다면 경제 지원과 관계 정상화를 검토하겠다는 뜻도 전달했다.
북한은 지난해 미국이 이 제안을 했을 때, “요구는 구체적인데, 보장성 조처는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베를린 회담에서 어떤 타협이 이루어졌을까? 북한은 4가지 요구 중 영변 핵시설 중단과 사찰 수용을 받을 수 있다고 했을 것이다. 동시에 미국의 보장성 조처에 대해서는 훗날 찾을 수 있는 ‘어음’이 아니라, 당장 쓸 수 있는 ‘현찰’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핵시설 중단은 행동이다. 미국도 서면 안전보장 같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준하는 상응 조처가 필요하다. 그것은 아마도 중유 제공과 같은 실질적인 경제 지원 방안일 것이다.
핵시설 동결과 중유 제공,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다. 바로 1994년 제네바 합의의 핵심 내용이다.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 제네바 합의를 복원하는 것은 스스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렵다. 미국은 동결에서 폐기로 가는 동시 이행을 요구했을 것이고, 아마도 핵시설과 핵 프로그램 신고 조처에서 완화된 수준이 합의됐을 것이다. 미국은 체면을 세웠고, 북한은 실리를 얻었다. 6자 회담은 ‘입구’에 들어섰고, 초기 이행조처의 일부가 합의됐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확실히 변했다. ‘악의 축’ 같은 도덕적 접근을 포기했다.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현실주의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는 여전히 대북 불신이 높다. 금융제재를 비롯한 각종 제재를 완화하는 과정에서 법적인 절차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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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고개, 경수로 문제
좀더 중요하게 넘어야 할 고개는 경수로 문제다. 북한은 핵 동결과 핵 폐기로 협상 국면을 구분하고, 경수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 폐기 국면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9·19 공동성명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다른 참가국들이 존중하고, 적절한 시점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신포의 경수로 사업은 종결됐고,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경수로도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는 기술적 가능성을 이유로 사업을 중단시켰다. 한국이 경수로 중단의 대안으로 200만kW 대북 송전 구상을 밝혔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겨우 9·19 공동성명이 채택될 수 있었다. 문제는 북한이 대북 송전보다는 경수로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너지 종속을 우려하는 것이다. 미국은 경수로를 ‘핵을 포기한 북한이 가질 수 있는 미래의 권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북한은 당장의 ‘대체에너지’로 요구하고 있다. 경수로를 지을 권리, 경수로의 제공 시기, 200만kW 송전사업의 현실적 전환, 지혜로운 타협이 필요하다.
고비를 넘었지만, 6자 회담의 장래는 마냥 장밋빛이 아니다. 협상의 동력을 유지할 신뢰의 다리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선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4자 회담을 조기에 가동할 필요가 있다. 이제 6자 회담에서 분야별 이행을 위한 실무 위원회 구성에 합의한다면, 4자 회담도 시작될 수 있다. 4자 회담에서는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언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긴장완화 조처와 한반도 평화협정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6자 회담에 동력을 부여할 것이다.
6자 회담은 당분간 달릴 수 있다. 이제 남북관계 복원을 준비할 때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핵 문제 우선 해결론을 유지하고 있다. 잘못된 전략이다. 6자 회담은 수없이 많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장기적인 협상이다. 핵 문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면, 한국이 할 일은 없다. 이제는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병행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통령의 신년 연설을 들어보면, 정상회담과 같은 큰 틀에서의 접근은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추진해도 쉽지 않은 정상회담을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식으로 생각한다면, 물 건너간 것이다.
받을 것이 별로 없는 남북 장관급 회담
큰 틀에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 상황에서 실무적 접근의 한계 때문이다. 6자 회담 직후 북한은 남북 장관급 회담을 제안할 것이다. ‘올해는 경제다’라고 외치는 북한의 입장에서 쌀과 비료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고, 남쪽이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않은 ‘경공업 원자재’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별로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남북 장관급 회담 채널에서 핵 문제를 논의하기는 어렵고, 군사적 신뢰구축 조처도 북쪽 협상대표들의 권한을 고려한다면 해당사항이 없다. 주기만 하는 회담은 국내적으로 정쟁을 부추길 것이며, 6자 회담에 영향을 끼치기도 어렵다.
6자 회담에 봄이 와도, 그것이 남북관계의 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번 봄은 북핵 폐기를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한국이 6자 회담이라는 운동장에서 선수로 뛰기 위해선 남북관계를 큰 틀에서 풀어야 한다. 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 그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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