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인혁당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시노트 신부…“이번 판결은 법원이 잘못 인정한 것… 어떻게 박정희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wjryu@hani.co.kr
○○호프집, ○○치킨집, ○○돼지갈비, ○○○단추구멍, ○○전자공구, ○○신문사지국…. 서울지하철 7호선 군자역에 내려 걸어서 3분 만에 닿은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 골목에는 세속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간판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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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빨간색 벽돌의 고풍스런 ‘성소’는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고 다닥다닥붙은 맞은편 세속의 건물들과 정답게 어울리는 듯했다. 메리놀외방전교회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 활짝 열려진 대문으로 들어서자, 복작대는 골목 분위기는 금세 잊혀진다. 한겨울인 1월25일임에도 초봄처럼 포근한 날씨와 잘 어울리는 청정한 기운은 무신론자까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가정집의 현관문 같은 철제 출입구가 보였다. 응접실에서 잠깐 기다리자 곧 푸른 눈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옷차림의 노신사는 “한겨레?”라고 묻더니 “시노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응접실을 나서 방으로 안내하는 제임스 시노트(78·한국 이름: 진필세 야고보) 신부는 계단을 오를 때 좀 힘든 표정을 짓더니 유창한 한국어로 “늙어서 다리가…”라며 웃었다. 숫자 ‘3’과 ‘James P. Sinnott’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방은 서너 평쯤 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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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요원이 고백해 조작 사실 알아
나란히 의자에 앉으며 먼저 ‘재심 판결을 지켜본 소회’를 물었다. (시노트 신부는 ‘2차 인혁당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주인공이다. 2차 인혁당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의 재심 선고 공판과 그 뒤에 이어진 유족들의 기자회견장에서 시노트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유다.)
‘인혁당’이란 말에 곧 눈시울이 불거진 시노트 신부는 “(재심 선고 법정에) 사실 갈까 말까 했다”고 말했다. “벌써 다 결정돼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함세웅 신부가 전화해서 ‘차 보낼 테니 같이 가자’고 해서…. 잘 갔죠, 뭐.” 1960년부터 한국에서 생활한 시노트 신부의 한국어 구사는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중간중간 문장이 끊기고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만 빼곤 한국인으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법(원)이 그때 잘못했다고 발표한 거다. 아주 잘됐지. 나라가 프로그레스(진보)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우리 잘못했다, 하면서 리프레싱·리뉴얼(발전)하는 거니까.”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시노트 신부는 예수회 고등학교, 워싱턴 D.C 조지타운대를 졸업했다. 메리놀신학대에 입학해 사제 서품을 받은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시점은 공교롭게도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1960년 8월)였다. 아시아 지역 가톨릭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에서 한국어를 익힌 뒤 천주교 인천교구의 여러 본당에서 사목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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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 사법 사상 최악의 판결로 꼽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된 실마리는, 영종도 본당 사제와 인천교구 총대리로 있던 1974년 4월 어느 날 메리놀회 신학생이었던 사람을 만난 일이다. “세 번 정도 만나 알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미 대사관에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대사관에서 일하지만 CIA(요원이)다’ ‘이런 말 중대하다’고 해요.” 시노트 신부가 정색을 하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자, 그는 뜻밖의 말을 전했다. “그 사람은 메리놀회 신부 하나가 박정희 ‘주머니’ 안에 있다고 했어요. 박정희를 도와준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They will orchestrate….” 박정희 정권이 오케스트라처럼 잘 꾸민 모종의 사건을 터뜨릴 공작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시노트 신부는 2004년 10월에 펴낸 이란 책의 후기에서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이름을 밝혀놓았다. 닐 도허티(Neil Doherty). 시노트 신부는 그가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만큼 알고 할 말 안하면 안 된다”
1~2주일 뒤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인혁당)과 연계를 맺어왔고, 공산 혁명을 기도한’ 혐의로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이 불거졌다. 그때만 해도 시노트 신부는 발표 내용을 믿었다고 한다. 신문, 라디오, TV에서 똑같이 한목소리로 전했기 때문이다. 닐 도허티의 암시가 2차 인혁당 사건의 예고였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고 시노트 신부는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개신교(감리교)의 조지 오글 목사한테서 ‘그 사건’은 조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사건에 얽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가족들을 통해 박형규 목사에게 전해지고, 이는 다시 오글 목사를 통해 친분 있는 자신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오글 목사의 말을 듣고 ‘난 책임 있다’ ‘이만큼 알고 할 말 안 하면 안 된다’ 생각했어요.”
시노트 신부는 뜻을 같이한 외국인 신부들과 행동에 나섰다. 특파원인 돈 오버도퍼 기자 등 외국 언론인들을 통해 불의를 세상에 알리는 데 우선 주력했다. 집회나 강연회도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알리는 주요 통로였다. 시노트 신부의 외침에 함세웅 신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사제들이 호응하면서 외연이 넓어졌고, 급기야 미국 국회의원 중에서 관심을 보이며 한국을 찾는 경우도 생겨났다.
“우린 항상 희망이 있었어요. 미국 국회의원까지 와서 김종필(당시 국무총리) 만나고 온 뒤 ‘염려 마라’ ‘사형 안 할 거다’고 했으니….” 그렇지만 희망 어린 예상은 빗나갔다. 이듬해인 1975년 4월8일 2차 인혁당 사건 관계 인사 8명에게 대법원은 사형 판결을 내렸고, 이튿날 전격 사형이 집행되는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시노트 신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테러블, 테러블!”이라고 탄식했다. 사형 집행 뒤 시노트 신부의 진실 알리기 운동은 더욱 거세졌고, 이는 그해 4월 말 미국으로 쫓겨나는 빌미로 작용했다. 겉모양은 ‘체류기간 연장 불허’였지만, 사실상 강제 추방이었다. 오글 목사는 그 전년 12월에 이미 강제 추방당한 뒤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뒤 시노트 신부는 곧바로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건 ‘추방’ 27년 만인 2002년 민주화기념사업회의 초청에 따른 것이었다. “석주일(3주일) 동안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친구 신부들이 여기 있으라고 해서 안 갔어요. 한국말이 더 편안하기도 하고….” 그는 “특히 조지 부시(미 대통령) 때문에 여기(한국)가 더 편안하다”고 말했다. “미국 보세요. 조심 안 하면, 서포트(지원) 안 하면 민주(주의) 없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 반대하는데, 어떻게 부시 패(일당)가 이라크 전쟁을 벌일 수 있었나? 사람들 가만히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한국 사람도 조심 안 하면 모든 걸 잃는다. 젊은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박정희를 그리워한다고?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의 최고책임자인)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일각의 정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국민을 귀먹고 눈 없는 동물처럼 업신여겼다.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활 원하면 (그리워)하라. 박형규 목사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왜 그런 고생을 했겠느냐. 박근혜(전 한나라당 대표) 물론 얼굴은 엄마(육영수)처럼 좋은데, 속이 아버지 같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살인자다, 솔직히 말 안 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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