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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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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위대함으로…

등록 2007-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훌륭한 기획의 위대한 품성은 평범한 이들이 갈망하는 일상의 진보적 대안에서…사회환원 사업은 칭송하지 않네, 아름다운 기획은 일과 삶에 지금, 살아 있으니</font>

▣ 김학원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

삶의 시계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다.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처음엔 마구 써도 표시가 나지 않다가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든다. 종국엔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후다닥 사라져버린다.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의 생은 제한적이며 생의 시계는 갈수록 놀랄 만큼 빠르다. 기획의 서사는 생의 그것과 같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기획은 변화무쌍하다. 119 소방대원이 되기로 했다가 어느 날 트럭기사와 버스기사 사이에서 고민한다. 기획의 원천은 꿈이다. 만일 ‘기획의 어린 시절’ ‘기획의 사춘기 시절’을 잊는다면, 당신은 아무리 프로 기획자라 하더라도 기획의 원천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대는 기획의 어린 시절이고, 20대는 기획의 사춘기와 같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체험들이 쌓인다. 30, 40대가 되면 기획이 깊고 넓어진다. 50, 60대로 접어들면 기획은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 무덤에서 요람까지 기획은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의지적 활동이다. 한시적인 삶을 어떻게 하면 좀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모든 기획의 원천이다.

‘기획의 어린 시절’ ‘기획의 사춘기’…

잘 쓴 글은 멋지지만, 내면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러나 훌륭한 글은 가슴을 뛰게 한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온다. 멋진 기획, 감각적인 기획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기획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훌륭한 기획은 공통적으로 위대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위대한 기획은 취지와 배경, 의도가 훌륭하다.

본문의 글쓰기를 고통스러워하는 저자에게 가끔씩 머리말을 먼저 써보라고 권한다. 머리말이 분명하면 본문이 탄력을 받는다. 기획의 취지와 배경이 얄팍하면 스테디셀러는 나오지 않는다. 학창 시절 ‘강독을 위한 일문법’이라는 소책자가 있었다. 짧은 기간에 일서를 해독할 수 있는 일문법의 핵심들을 놀라울 만한 구성으로 압축해놓은 책자였는데, 일서를 통해 사회과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의 오랜 경험이 쌓인 결과물이었다. 지금 다시 보아도 최고의 실용서 기획으로 손꼽을 만하다.

기획의 위대한 품성은 평범한 이들이 갈망하는 일상의 진보적 대안에서 나온다. ‘인생의 책’으로 자주 꼽히는 는 하나같이 위대한 품성을 품고 있는 책들이다. 내가 펴낸 책들 중 가장 위대한 품성을 지닌 책을 꼽으라면 단연 와 이다. 에는 새 역사 교육에 대한 교사들의 갈망이 담겨 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와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가 3년 동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허물고 시대의 주제를 놓고 토론한 은 두 세계의 오랜 장벽에 물꼬를 열며 입에서 입으로 두 학자의 위대한 품성이 오르내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탁월한 기획력을 갖출 수 있는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아울러 가장 난감한 질문이다. 30대 초반에 기획·출판·편집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은 거의 모두 읽었다. 도움은 받았지만, ‘기획의 기술, 편집의 기술’은 탁월한 기획력 쌓기와 거리가 멀었다. 기획은 ‘좋은 품성 쌓기’에서 비롯하며 훌륭한 기획은 현장에서 발견·발굴된다는 것을 일 속에서 체험했다. 15년 동안 500여 종의 책을 펴내면서 체득한 기획의 노하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많이 읽고, 많이 만나고, 많이 생각하라.’ 이보다 훌륭한 답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나만의 기획 창고를 만들어라. 일반적으로 45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 중 3개만이 채택돼 그중 하나가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이 과정을 거친 100개의 상품 중에서 2개가 시장에서 특별한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30대 초반 책에서 읽었던 이 문장 하나가 나의 기획력을 근본적으로 자극했다. 행동으로 옮겼다.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신간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거르지 않았다. 6개월 만에 1천 종의 아이디어를 채웠다. 10여 년 전에 출간한 시리즈는 1천 종의 기획 비밀 창고에서 나왔다. 물론 책으로 결실을 맺은 것은 20종을 넘지 못했다.

화려한 드리블보다 정확한 패스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은가. 100개의 아이디어를 메모하라.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이들과 아내의 요구를 경청해야 한다. 3년 전에 두 아이가 TV를 보다가 말했다. “아빠랑 낚시 가면 정말 좋겠어요.” 지난해 말 아내가 워크숍을 떠난 주말에 두 아이와 낚시를 다녀왔다. 나 역시 난생처음이었는데 그날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 최고”라는 행복한 찬사를 받았다. 빛나는 창의성은 좋은 품성과 훌륭한 습관에서 비롯한다. 기획의 현장에서 얻은 것을 나만의 비밀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행동으로 옮기면 기대하지 않은 감동을 주고받을 수 있다. 마케팅에서 말하는 기획의 승패에 대한 평가 기준은 ‘기대한 만큼의 감동’은 70점, ‘기대 이상의 감동’은 100점이다. 좋은 기획, 위대한 기획은 모종의 비밀스런 음모와 배후가 있어도 좋다. 일과 사랑, 나와 세상에 대한 비밀스런 기획 창고를 만들어 부지런히 저장해두는 습관을 몸에 익혀라.

기획은 아이디어가 아니다. 진보적 열망과 열정, 갈증들을 실천적으로 풀어가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품성이 열정을 낳고 열정이 남다른 공력을 거쳐 결실을 맺는 것은 농사일과 다름없다. 1907년에 태어나 2005년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농사를 짓고 밥상을 차린 내 할머니는 생에서 만난 최고의 기획자였다. 난 아직도 가끔 편의점에 들러 바나나 우유를 사먹는다. 어린 시절 우유만 먹으면 배탈이 났던 내게 바나나 우유는 촌놈을 위한 훌륭한 배려의 결실이다. 이 기획은 누군가의 엄청난 노력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21세기는 평범한 이들의 특별한 기획이 살아나는 시대다. 화려한 드리블보다 정확한 패스 하나에 더 깊이 열광하는 시대다. 의 안성기가 그랬다. 기획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이의 멋진 관계 맺기이자 소통이다. 핀란드인과 한국인은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지만, 먼저 인사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노키야와 삼성의 휴대전화를 낳는 토양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소통의 문화, 소통의 철학은 서로 승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관계 맺기는 구시대의 기획이다. 훌륭한 기획자는 정확하고 멋진 패스워크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이를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연출이란 일의 영역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과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아쉬움이 여기에 있다. 훌륭한 건축과 영화에서 왜 설계자와 감독만이 주연이 되어야 하는가.

기획은 설계도이지만, 설계도 모두가 건축물이 되지는 않는다. 연초 워크숍에서 역량 있는 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술서 시리즈의 표지 포맷을 기획한 디자이너의 멋진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학자들의 깊은 지식 세계를 남다른 시각의 인물 사진으로 담아내는 안이었다. 박수를 받았지만 실행 단계에서 무산됐다. 인물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국내 학자들의 공통된 기질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실은 기획자들에게 전복의 상상력을 선사해준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실패는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실패가 준 전복의 상상력

이 기획으로 나와 이웃, 세상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건강한 진보의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가. 인류애를 향한 물음은 먼 훗날, 내가 좀더 윤택해지면 해보리라. 난 빌 게이츠의 재단 사업과 사회환원 활동을 그리 칭송하고 싶지 않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부자들의 논리는 안쓰럽다. 아름다운 기획은 더운 여름날 연거푸 아이스크림을 찾는 아이에게 배탈 나니 오늘은 그만 먹으라며 돌려보낸, 내 어린 시절 동네 아주머니의 아름다운 가게처럼 일상의 일과 삶에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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