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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시대, 짝퉁 ‘시사저널’의 탄생

등록 2007-01-16 00:00 수정 2020-05-03 04:24

899호서 회사가 위촉한 편집위원들이 기사를 쓰고 편집한 초유의 사태 벌어져…그간 쌓아온 신뢰와 정체성을 무너뜨릴 수도… 언론의 무관심에 더욱 힘들어

▣글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백승기 기자는 “슬프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부 기자다. 1996년부터 1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사진만 찍어왔다. 하지만 899호(1월8일 발행)엔 그의 이름이 없다. 그의 사진도 없다. 하기야 사진팀장이던 그의 이름이 빠진 지 벌써 여섯 달째다. 지난해 8월23일 그는 편집국 접근 금지와 함께 3개월 자택 대기발령을 받았다. 금창태 사장은 “사장의 업무 지시를 어기고 해사 행위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편집국 기자들은 “보복성 징계”라고 반박한다.

삼성 전략홍보팀 상무 출신이 팀 이끌어

지난해 6월19일 금 사장이 이철현 기자가 쓴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전략기획실장) 관련 기사를 인쇄소에서 빼버린 데 항의하며, 그는 동료 기자들과 함께 사장의 업무 지시를 거부했다. 아직까지 “왜 징계받았는지 모르겠다”는 백 기자가 슬프다고 말한 것은 자신을 동정해서가 아니다. 그의 젊음을 불어넣었던 잡지가 ‘망가져’ 나왔기 때문이다. ‘2012년 부활 노리는 노무현의 속셈’이란 제목을 단 899호는 1989년 창간 이후 친숙하게 읽어왔던 이 아니다.

물론 899호에도 이란 제호는 붙었다. 그러나 창간 때부터 2003년까지 몸담은 서명숙 전 편집장은 “짝퉁 ”이라고 불렀다. 기자들이 만든 잡지가 아니었다. 잡지가 나오는 한 빠짐없이 실린 ‘만든 이 소개란’(마스터 헤드)엔 기자들의 이름이 없었다. 아니, 아예 만든 이들 소개가 보이지 않았다. 기자들은 899호 마감일인 1월5일 금요일 파업에 들어가, 제작에 참여할 수 없었다. 회사는 △이미 내려진 기자 징계의 철회 △편집권의 제도적 보장 등 기자들의 핵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잡지는 회사 쪽에서 지난해 12월5~21일 세 차례에 걸쳐 위촉한 16명의 비상근 편집위원들이 만들었다. 이들이 ‘대체 인력’이었다. 한국기자협회는 1월9일 성명을 내어 “비정상적 대체 인력 투입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대체 투입된 편집위원들의 면면과 잡지의 내용물(78쪽 기사 참조)은 899호가 왜 짝퉁 불량품이라고 불리는지 잘 보여준다.

900호도 대체 인력이 만들었다. 1월11일 오후 2시30분. 서울문화사 별관 4층에 들어서자마자 안내판도 없는 10평 남짓한 임시 사무실이 길을 막았다. 사무실 안엔 기사를 마감하느라 20여 명의 대체 인력이 분주했다. 서울문화사는 실질 소유주인 심상기씨가 회장으로 있는 곳이다. 김재혁(65) 편집위원을 찾았다. 전날 발행된 노보가 “금창태 사장의 지휘 아래 사이비 편집국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김재혁)는 기자 출신으로 삼성 회장 비서실 전략홍보팀 상무이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 관련 기사를 일방적으로 삭제함으로써 촉발된 사태가 6개월 파행 끝에 파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사이비 편집국의 사령탑 노릇을 하는 인물이 바로 삼성그룹의 회장 비서실 상무 출신이라는 것만큼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집약해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연필로 뭔가를 썼다가 지우며 원고에 몰입한 듯한 그는 “에서 찾아왔다”는 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 밖으로 기자를 내쫓았다. 심상기 회장과 금창태 사장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의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금 사장은 한 차례 이뤄진 짧은 전화 통화에서 “외부 언론에 할 얘기가 없다. 일절 접촉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야만의 시대에도 없었던 일

짝퉁의 발행을 불러온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형식상 파업이다. 1월5일부터 시작됐다. 또 내용상으론 899호부터 편집국 기자들이 배제된 채 경영진의 손으로 색다른 내용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다. 언론사가 파업 중이라 하더라도 거의 전적으로 외부의 대체 인력을 투입해 신문이나 잡지, 방송을 만드는 것은 그것이 불법인 부당노동행위인지 여부를 떠나 선례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서명숙 전 편집장은 에 기고한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란 글에서 “(언론사가) 스스로 짝퉁 매체를 발간하는 일은 한국 언론사에 ‘야만의 시대’로 기록될 유신정권하에서도, 사이비 언론사에서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짝퉁이 18년 동안 쌓아온 의 신뢰와 정체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안다. 인터넷 자유게시판에 독자 안현주씨는 “이번호(899호)를 으로 만들어서 보내주셨더군요. 이젠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 이별합니다. 이 이별이 한시적이었으면 좋겠군요”라고 썼다. 10여 년 정기구독자인 박근호씨는 “요즘 을 받아보면서 이건 변질도 이런 변질이 없군요.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갑니다. 더 이상 보내지 마십시오”라는 글을 올렸다. 예민한 독자들은 벌써 떠나고 있다. 판매 쪽 서울 지사장이 1월8일 899호가 발행되자마자 서울 충정로에 위치한 사무실로 달려와 편집국 기자들과 경영진을 만나 근심을 토로하고 간 것도 이 때문이다.

독자들이 사랑한 것은 18년 동안 쌓아온 ‘정통 시사주간지’로서 이다. 은 6월 민주화 항쟁의 시대적 흐름을 타고 89년에 태어났다. 제대로 된 시사주간지가 없던 때였다. 등이 있었으나 신문의 보조 역할에 그쳤다. 은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동생 최원영씨가 돈을 대고,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해직된 박권상(전 한국방송 사장)씨가 잡지의 콘셉트와 심장인 편집국의 틀을 짰다. 편집국장과 논설주간까지 지냈던 그는 초대 편집인 겸 주필을 맡았다. 창간 멤버인 문정우 기자는 “박권상씨가 최원영씨한테 내걸었던 한 가지 조건은 편집과 경영의 철저한 분리였다. 회사가 부도가 난 98년까지 그 약속은 잘 지켜졌다”고 기억했다. 74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75년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조선투위) 출신, 80년 신군부의 언론 탄압에 맞선 해직 기자, 때를 타지 않은 젊은 기자들도 로 모여들었다.

행복한 9년 뒤 서울문화사로

본격적인 시사주간지의 등장을 알린 은 나름대로 한국 언론사와 잡지사에 기록될 만하다. 정기적 여론조사 방식 정착, 편집 디자인 강화, 기사에 기자 이름 달기, 가급적 한자가 아닌 우리말 쓰기, 딱딱한 기사체 벗어나기, 주간지의 정기독자 시스템 등을 앞서 도입하거나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언론계 관행이던 촌지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회사의 지원도 풍족했다. 당시 최고로 대우받던 한국방송, 문화방송, 기자들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았다. 회사는 “최고의 대우를 해줄 테니 최고의 언론과 최고로 깨끗한 언론인이 되라”고 북돋웠다. 기자들은 지금의 두 배인 30명이 넘었다. 기자를 지원하는 조사인력이 따로 있을 만큼 잡지를 만드는 전체 인력은 100명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많을 땐 40억원 이상의 흑자와 한동안 13만 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자랑했다. 잡지의 색깔을 묻자 문정우 기자는 “넥타이 정서를 오랫동안 지면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김승수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중도 성향의 중산층이 주 독자층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사주의 부도로 빚어진 제1차 사태로 많은 것이 변했다. 98년 3월부터 99년 10월까지 꼭 20개월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잡지의 제호를 지켜냈다. 이후 서울문화사에 인수됐다. 의 한 기자는 “심상기 회장이 발행인 겸 편집인, 대표이사를 지낼 땐 괜찮았지만, 3년 전 금창태 사장이 오면서 편집권 침해 논란을 불러온 제2차 사태는 예고돼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힌다’는 은 지금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파업에 들어갔지만 회사 쪽은 노조의 편집장 임명 동의제와 편집권의 제도적 보장 요구에 묵묵부답이다. 두 번의 사태에서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 있다. 위기의 양태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1인 사주에 의한 언론이 갖는 한계다. 다시 터진 위기의 국면에서 사주의 선의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같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동아투위는 기자 일동에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편집권 수호를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해왔다”며 제18회 안종필 자유언론상을 줬다. 고 안종필 선생은 79년 2월17일 ‘10·24 민간일지 사건’ 3차 공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자유 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썩고 미치고 만다.”

사태는 이제 자유 언론의 보장은 정치 권력으로부터가 아닌 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문제로 이동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언론학 교과서가 아닌 현실에서다. 김승수 교수는 “광고주이자 외부의 기업 때문에 언론사의 사주가 편집권을 통제하고 편집국과 마찰을 빚는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며 “사주와 편집국과의 기본적 갈등이 있어서인지, 그래서 편집국을 물갈이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광고주인 삼성과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경영진이 삼성 기사 때문에 편집국장을 해고하고 기자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 그 다리도 무너졌다

기자들은 사태를 알리기 위해 에 릴레이 기고를 하고 있다. 회사는 두 번째 기고자로 나서 ‘시사저널 (899호) 커버스토리, 이것이 기사면 파리도 새다’는 제목의 글을 쓴 고재열 기자를 “회사와 최고경영진을 비방하고 명예와 신용을 훼손하는 해사 행위를 저지르고 경영 질서를 문란케 했다”며 인사위원회에 회부했다. 기자들의 힘겨운 투쟁은 동종 업계에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더욱 힘들다. 오죽하면 언론인 김선주(전 논설위원)씨가 “시사저널 사태에 발언하자”(1월10일치 )는 칼럼을 썼겠는가? 그는 글에서 “(1974년 동아·조선 사태 뒤) 기자 길들이기가 시작되고 기자들은 고급 월급쟁이에 만족하면서 자사 이기주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국 언론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고 나는 본다. 지금 그 다리를 통째로 잘라낸 ()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침묵하는 언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대신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언론, 언론인임이 부끄럽다”고 썼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문제를 짚어줄 언론이 거의 없는 현실이다. 언론사가 기업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구조 탓이다.

정치팀의 고재열 기자는 899호의 표지 기사로 이번 대선에서 처음 선거권을 행사할 19살에 대한 얘기를 준비했다. “그들이 20살이 되기 전에 기사가 나가야 할 텐데….” 그의 기사를 보고 싶다. 다시 ‘시사저널’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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