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회담 2단계 회의’로 규정된 채 재개된 6자회담 관전 포인트… 목표치 낮추고 실질적 진전 추구하는 미국, ‘북한의 결단’이 열쇠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객관적으로 볼 때 상황은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과거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군사 대결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만이 지금까지의 유일한 사실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12월18일 재개된다. 장기 표류에 들어간 지 13개월 만의 일이다. 그사이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9번째 핵 보유국’ 지위를 자처하고 나섰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가야 할 길은 더욱 멀고, 상황도 훨씬 복잡해진 것이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12월8일 코리아연구원이 내놓은 에서 “이제 비핵화 시대는 루비콘강을 건넜으며, 한반도는 공포의 균형 그리고 이에 따른 안보 딜레마가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고비용의 평화에 만족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2006년이 가기 전에 회담이 재개된 것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
회담 주최국인 중국 외교부는 12월11일 회담 재개 일정을 밝히며, 이번 회담을 ‘제5차 회담 2단계 회의’로 규정했다. 지난해 11월 열렸던 5차 회담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6자회담 한국 쪽 차석대표인 이용준 외교통상부 북핵외교기획단장은 언론 브리핑에서 “4차 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의 이행과 관련해 상당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5차 회담 안에서 단계만 나눠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단장은 또 “회담 정식 개회에 앞서 상당수 대표단이 미리 현지에 도착해 다양한 양자 회담을 벌일 예정”이라며 “이번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의 ‘일부라도’ 실질적 진전을 이뤄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목표치를 높게 잡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지난 12월12일 “나의 목표와 일정표는 북한이 부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09년 1월 이전에 핵 프로그램을 되돌릴 수 없도록 폐지하는 조처를 완료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게다. 하지만 미국 쪽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튿날 회담 참가를 위해 출국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매우 어려운 협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돈 오버도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를 두고 같은 날 과 한 인터뷰에서 “(미국 쪽이) 회담의 목표치를 낮춘 것”이라고 진단했다.
회담을 앞두고 희망 섞인 낙관론과 회의적인 비관론이 언제나처럼 뒤섞이고 있다. 미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 이후 대북 협상론이 힘을 얻고 있는 워싱턴 정가 분위기는 낙관론의 주요 근거다.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핵 폐기 △북-미 관계 정상화 △경제·에너지 지원 △한반도 평화체제 등 동북아 안보협력 등 4개 분야에서 실무그룹을 구성하기로 한 것도 회담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여기에 회담 재개의 최대 걸림돌이던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비롯한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다룰 실무그룹을 북-미 간 별도로 만들기로 한 것도 나쁘지 않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필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에 변화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기대를 해볼 만하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이 “예전과 다른 상황 전개”를 근거로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과거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미사일이나 관계 정상화 문제 등과 구별되는, 좁은 의미의 핵 문제에 국한하는 태도를 취해왔다”고 설명했다. 반면 북한은 ‘조선반도의 핵 문제’란 표현을 선호했다. 핵을 포기하기 위해선 △안전보장 △북-미 관계 정상화 △에너지·경제 지원 등 세 가지 근본적 문제 해결이 전제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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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센터장은 “이번 회담의 성패는 북-미 양국이 서로의 ‘진정성’을 얼마나 확인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빅딜’을 위한 정치적 의지가 얼마나 있느냐는 협상을 해봐야 알 수 있지만, 북-미가 서로 믿을 수 있으려면 동시 행동이 전제가 돼야 한다. 이른바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방식이 필요한 이유다. 이번 회담에선 ‘행동 대 행동’까지는 어렵더라도, ‘말 대 말’ 수준의 합의를 위한 협상은 가능할 수 있다는 게 백 센터장의 전망이다. 그는 “북한이 핵 포기를 하겠느냐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지만, 북한의 대미정책 목표는 일관되게 평화협정과 관계 정상화였다”며 “이런 대미정책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선 21세기에 북한 체제가 연장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한 상황에서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협상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북-미 간 ‘초기 신뢰 구축’ 과정이 중요하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미국 처지에선 북한이 ‘핵물질 생산공장’으로 기능하고 있는 영변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는 조처를 취하길 원하고 있다. 원자로 가동 중단은 이를 확인할 국제원자력기구(IAEA) 모니터 요원의 복귀가 뒤따라야 의미가 있다. 이어 모든 핵 프로그램 관련 시설을 원자력기구에 신고하고, 궁극적으로 핵 실험장을 포함한 관련 시설의 폐쇄까지 나아가야 한다.
반면 북한 처지에선 금융제재 해제와 미국이 참여하는 형태의 대북 중유공급 재개를 미국 쪽의 ‘성의’를 확인하는 잣대로 삼을 수 있다. 선후의 문제는 아니지만 ‘북한 체제에 대한 서면 안전보장’도 초기 신뢰구축을 위한 중요한 조처다. 이는 북-미 관계 정상화와 에너지·경제 지원 등과 맞물리면서 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이룰 수 있다. 이번 회담은 북-미 간 어느 수준까지를 ‘초기 신뢰구축 단계’로 보느냐에 대한 합의 여부가 핵심일 터다.
“그래도 안 하느니보다 낫다”
비관론까지는 아니어도, 이번 회담을 통해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기획실장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가 있는 건 틀림없지만, 그 변화의 폭이 근본적으로 북핵 문제를 푸는 데까지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는 “결국 북한 내부에 변화가 있어야 실질적 진전을 이룰 수 있으며, 북한 지도부가 핵을 포기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도록 얼마나 뒷받침할 수 있느냐에 회담의 성패가 달렸다”고 말했다. 미국이 단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하는 선에서 그칠 게 아니라, 북한 지도부가 굳이 ‘선군정치’를 내세우지 않아도 좋을 만한 국제정치적 조건이 성숙돼야 한다는 게다.
북-미 양국 모두 회담에 앞서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보이는 것은 분명 좋은 조짐이다. 이는 핵실험 이후 사태가 악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회담이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현재로선 회담의 한계 또한 분명해 보인다. 한 군사안보 전문가는 “안 하느니보다는 나은 회담”이라는 말로 지나친 기대를 경계했다. 북한이 이미 ‘핵 보유국’이 된 마당에 6자회담이란 실무협상 틀만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단계는 지났을지 모르다. 결국 북한 최고위층의 ‘정치적 결단’만이 해법일 수 있다. 다만 이번 회담이 그 길로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시금석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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