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임기 중단’ 발언 뒤 한나라당이 자세 바꾼 이유는 뭘까…‘사퇴’는 진정성을 가지고 한 말, 걷잡을 수 없는 태풍 몰아칠 수도
▣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 shy99@hani.co.kr
“처음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다. 지역과 계보에서 자유로운 마이너리티(소수집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노 대통령은 정말 탁월한 정치인이다. 말 몇 마디로 온 나라를 뒤집고 있다. 참모들이 정책적으로 뒷받침만 좀 잘해주었더라면 괜찮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뻥 안치는 사람
노 대통령이 지난 11월28일 국무회의에서 ‘임기 중단’과 ‘탈당’ 발언을 했다. 그 다음날, 서울의 한 대학 강의실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인 ‘어젠다 세팅’(의제 설정) 능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몇몇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은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은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옳은 얘기다. 그렇지만 정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평범한 국민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시내 술집의 토론 의제는 “그만두는 게 옳으냐 아니냐” “그런데 정말 그만두는 것이냐” “그만두면 다음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세 가지가 주조를 이루었다.
노 대통령의 발언 직후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여론조사에서는 ‘임기 전 사퇴 반대’가 74%, ‘한나라당, 여·야·정 정치협상 회의에 참석해야’가 73%로 나왔다(700명 대상, 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 ±3.7%).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11%에서 14%로 3%포인트가 올랐고, 한나라당 지지도는 40.0%에서 34.3%로 하락했다.
임기 중단 발언 다음날인 11월29일 오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원내대표 회담을 열어 합의문을 내놓았다. ‘국방개혁법과 비정규직 보호 3법 등 이번 본회의에서 합의 처리키로 한 법안들을 12월1일까지 처리한 이후에 그 밖의 현안 문제에 대해 협의한다.’
그리고 11월30일 국회에서는 근래 들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이날 새벽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는 국방개혁법을 합의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대로 이번 국회에서 처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던 법안이었다.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놓고 표결을 했다. 한나라당은 반대했지만 몸으로 막지는 않았다. 오후 2시 본회의에서는 민주노동당의 항의 속에 임채정 국회의장이 비정규직 보호 3법을 직권으로 상정해 의결했다. 한나라당은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에 동의했다.
일견 노 대통령의 ‘협박’ 정치가 통한 모양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해 임기 단축이나 사퇴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무기는 ‘진정성’이다. 고수들끼리 포커를 칠 때 가장 두려운 상대는 ‘뻥’을 안 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니, 정확히는 ‘안 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에 왜 갑자기 협조적으로 태도를 바꾸었는지 물어보았다.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막기 위해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단상까지 점거했는데, 노 대통령이 임명동의안을 철회한 마당에 더 이상 ‘발목’을 잡으면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더 적나라한 설명도 있었다. 당내 사정에 밝은 인사는 “노 대통령이 불쌍하다는 여론이 있다. 게다가 노 대통령을 자꾸 공격해서 진짜로 하야나 탈당을 빨리 해버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한나라당은 판을 흔들기 싫어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사퇴하면 한나라당 분열?
이런 일도 있었다. 한나라당의 유기준 대변인은 11월28일 노 대통령의 발언이 보도된 지 30분도 안 돼 국회 브리핑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조금 전 대통령이 임기를 못 마치는 첫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이 임기를 잘 마치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해, 사퇴 반대 의사를 밝혔다. 유 대변인은 이틀 뒤 30일에도 비슷한 내용의 논평을 내놓았다. 지난 9월 노 대통령이 타이의 군부 쿠데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유기준 대변인이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의 김형오 원내대표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을 ‘대통령님’이라고 지칭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한나라당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서다.
왜 그럴까? 한나라당은 왜 ‘꼬리’를 내리는 것일까? 노 대통령이 사퇴를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헌법 68조 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궐선거가 아니라 임기 5년의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7월11일 전당대회에서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를 선출했다.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당무에 관여하지 않은 채, 당 밖에서 ‘대선 행보’를 하고 있다. 한나라당 ‘혁신위원회’가 만든 구조다. 이런 상태는 내년 6월로 예상되는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까지 계속된다.
이런 틀을 짠 데는 이유가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두 차례 대선 패배의 원인을 ‘권력의 집중’에서 찾았다. 이회창 총재가 ‘차기 대통령’으로 부각되면서, 상대방의 집중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는 것이다. 혁신위원장을 맡았던 홍준표 의원은 “여야의 극한 대립과 정쟁에서 대선주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일이 있다. 여당과의 싸움은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할 테니, 박근혜·이명박·손학규는 경선에 참여해 ‘결과에 승복’하라는 얘기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사퇴하면 한나라당의 이런 정치 일정이 무너진다. 당내 경선이 ‘증발’되고, 박근혜, 이명박은 대선 정국의 한가운데로 끌려나오게 된다. 유력 대선주자들의 ‘각개약진’이 이뤄지고, 두 사람도 각각 출마하게 될 수 있다. 한나라당 처지에서 분열은 패배의 전주곡이다.
대통령직 사퇴의 불확실성이 몰고 오는 정치적 충격은 열린우리당에도 마찬가지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없는 상황이어서 좀 덜 놀라고 있을 뿐이다. ‘이판사판’이라고 보고 차라리 조기 대선이 낫다는 의원들도 꽤 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정말로 사퇴할 가능성이 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 다음날 목포에 내려갔다.
“노무현 당신 임기가 얼마 안 남지 않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목포 발언의 진실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이 발언을 근거로 노 대통령이 임기 단축 카드를 철회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진실은 다르다. 이 발언은 노 대통령이 서남해안 개발계획을 비롯한 호남 개발을 정부 차원에서 확실히 추진하겠다는 다짐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습니다”에 이어서, 곧바로 “호남의 정치적 발언권이 그전하고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는 말은 결국 “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어도 호남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에 호남 개발은 추진될 것”이라는 뜻이다. 임기 단축 가능성을 접은 것은 아니다.
윤태영 대변인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은 노 대통령의 ‘하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다고 일축했다. 그런가?
아니다. 청와대로서는 대통령직 사퇴가 실제로 ‘결행’되기 직전까지는 가능성을 부인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정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30일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틀 전 발언과는 정반대의 메시지다. 이 때문에 대통령직 사퇴 가능성은 줄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렇지만 바로 그 ‘의외성’ 때문에 대통령직 사퇴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중진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한나라당이 물러섰지만, 언제까지 협조할지 알 수 없다.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 노무현이다. 그는 책략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을 믿든 말든, 그것은 듣는 사람의 자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 대통령이 ‘빈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바야흐로 정국은 ‘노무현발 태풍’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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