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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하나는 죽는 ‘미국 간첩 게임’

등록 2006-11-24 00:00 수정 2020-05-03 04:24

경인TV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과정에서 튀어나온 백성학 회장 간첩 의혹…고발자인 신현덕씨 뒤에 CBS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모호해진 진실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둘 중 하나는 죽는 게임이다.”

백성학(64·전 경인TV 공동대표) 영안모자 회장과, 그가 미국에 국가 정보를 넘겨준 사실상 ‘미국 간첩’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신현덕(54) 전 경인TV 공동대표가 벌이는 진실싸움의 구도는 분명하다.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실은 백씨가 미국 간첩이거나 또는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업자 선정 때부터 떠돈 소문

간첩 의혹 제기는 갑자기 터져나온 것이 아니다. 경인TV 경영권을 둘러싼 양쪽의 갈등에 짧지만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2004년 12월31일 iTV가 방송중단 조처를 당한 뒤 경인 지역의 새 민방 사업자를 선정하는 첫 관문에서 영안모자와 CBS는 경쟁자였다. 영안모자는 지난 1월 1차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꼴찌인 5등을 했고, CBS는 1위를 했지만 모두 기준 점수를 넘지 못해 사업자를 재공모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진원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성학 회장의 미 중앙정보국(CIA) 간첩설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2차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적이었던 두 회사는 같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난 4월 한솥밥(경인TV)을 먹게 된다.

이들이 구성한 컨소시엄이 선정되는 데 제출된 사업계획서는 CBS가 마련할 만큼 CBS의 역할은 컸다. CBS는 이런 역할을 바탕으로 컨소시엄 구성 단계에서부터 지분율 30%의 1대주주인 영안모자 쪽에 “대표이사와 편성 책임자를 CBS 쪽에서 2기(6년) 동안 담당한다”(2006년 3월17일), “새 방송 보도 시스템 보도 부문을 CBS에서 10년 공급 보장”(2006년 3월16일)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영안모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쪽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이정식 CBS 사장은 자신의 고교 후배이자 CBS에서 국제뉴스 해설 방송을 맡아왔던 신현덕씨를 영안모자 대표로 앉히게 된다. 이후 경인TV에 있던 변철환이란 인사가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영안모자가 30% 초과 지분을 보유하려 했다”며 이면계약 의혹을 뒷받침하는 문건을 건넨다. 하지만 문건은 진위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서 그것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 10월31일 백씨와 신씨를 국정감사장의 증인으로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날 바로 신씨가 백 회장의 미국 간첩설이 담긴 ‘S-1’ 문건과 ‘D-47’ 문건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신씨의 영문 이니셜을 따 ‘S’로 표시했다는 문건은 8번까지 존재하고, 그 내용은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유 추정 등에 대한 국내외 정세들이 간략히 서술돼 있으며, S-1 영문본도 함께 제시됐다. D-47 문건의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한-미 정상회담 때 미국이 한국 대통령에게 취할 예우와 태도 등을 건의하고, 한국의 국가신인도를 저평가할 필요성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신씨는 ‘S’ 시리즈 문건이 백 회장의 지시로 자신이 지난 7월부터 만들었고 ‘D’ 시리즈 문건은 백 회장한테 건네받았다고 주장했다. 신씨는 국감장에서 “백 회장이 하는 일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백씨는 이를 “음모”라고 부인했다.

한반도 모순을 보여준 단어 ‘미국 간첩’

하지만 신씨가 폭로하기 전에 CBS와 긴밀히 상의하고 국감 전날 CBS 기자들이 열린우리당 문광위 의원들을 찾아가 문서를 보여줬다는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신씨의 순수성도 의심받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경영권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CBS가 신씨 뒤에 있다는 말들이 나왔다. 국감 뒤 CBS는 백씨를 둘러싼 간첩 의혹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적극적으로 내보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둘러싼 공방은 백씨가 11월20일 신씨와 CBS를 검찰에 고소하면서 수사기관으로 옮겨갔다. 곧 진실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찍이 남한에서 통용되지 않았던 ‘미국 간첩’이란 말이 등장한 것이다. 해방 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숙청된 적은 있었지만 북한에서의 일이다. 분단된 남한에서 간첩은 북한 간첩밖에 없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동맹 이상이었기에, 미국을 위한 우리나라의 정보 제공은 간첩 행위로 인식되지 않아왔던 한반도의 모순을 이번 사건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그 진실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경인민방의 새 사업자 선정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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