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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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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제국을 건설하려나

등록 2006-11-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최악의 보안 상황에 외국인은 떠나지만 중국인은 속속 들어오는 파푸아뉴기니…미국이 앞마당쯤으로 여겨온 남태평양 섬들과의 동맹은 대만을 견제하는 효과도

▣ 포트모르즈비(파푸아뉴기니)=베르틸 린트네르 전 기자

‘앙의 중국식당’이 뭔가 잘못됐거나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그 식당이 내놓는 구운 오리고기는 맛이 기가 막히다. 여행정보 책자 도 앙의 식당에 가면 특선 스프를 맛보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문제는 식당의 겉모습이다. 식당 앞마당은 높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고, 담벼락엔 철조망과 감시 카메라까지 설치돼 있다. 식당 들머리는 2명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고, 차를 몰고 온 손님들을 일일이 확인한 뒤에야 문을 열어준다. 경비원의 감시를 거쳐 문 안쪽으로 들어와 주차를 하고 나면, 또 다른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강철문을 다시 지나야 한다. 손님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경비원들은 문을 아예 걸어잠근다.

그러고 나서야 앙의 식당에서 중국 음식을 ‘평화롭게’ 즐길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파푸아뉴기니의 수도 포트모르즈비는 영국 시사주간지 가 조사한 세계 130개 수도와 주요 도시 가운데 최악의 도시로 꼽혔다. 내가 머문 호텔에만 정문 바깥에 3명의 무장 경비원과 독일산 셰퍼드 2마리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드높은 담장과 감시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고, 밤이면 눈부신 조명까지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대낮에도 도보로 외출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기도 했다. 호텔이 있는 곳은 포트모르즈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는데도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들이 이미 포트모르즈비를 떠났거나, 한창 이주를 서두르고 있는 게 이해될 만하다.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립했을 때만 해도, 파푸아뉴기니에는 5만여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은 물론 영국인과 독일인들도 상당수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중국 본토에서 새 이민자들이 몰려와 사업가와 계약자, 수출입 업자 자리를 그들 대신 잡기 시작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활동하는 중국인들 상당수는 영구 거주를 선택하고 있다. 정부 공식 통계를 보면, 현재 파푸아뉴기니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은 모두 1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불법 입국자들이지만, 현지에서 파푸아뉴기니 여권(즉 시민권)을 입수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앙에서 지방정부에 이르기까지 부패가 만연해 있는 탓이다.

부패와 연고주의, 권력남용 등을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가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중국의 원조가 요긴하다. 파푸아뉴기니 외교부 고위 당국자인 타시 에리는 “파푸아뉴기니 같은 개발도상국에게 경제·군사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지위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중국이 내는 목소리는 개발도상국 진영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극동지역, 버마 북부와 라오스 북서부 등 동남아 일부와 함께 파푸아뉴기니를 포함한 남태평양 지역은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빨라지고 있는 3대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들 지역에서 중국인의 사업·투자·이민 등이 급격히 늘면서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인구학적 변화까지 몰고 오고 있다.

남태평양은 특히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꼽을 수 있다. 우선 대만 문제와 관련이 있다. 대만은 그동안 중국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태평양 섬나라들이 대만을 외교적으로 인정하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막대한 경제원조를 통해 대만은 이들 나라와 공식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셜제도와 솔로몬제도, 투발루, 키리바시, 나우루, 팔라우 등 군소국가들이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만이 해온 바로 그 전술대로

그러던 차에 중국 본토 역시 비슷한 전술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바누아투와 사모아에서 정부 청사 건축자금을 제공했고, 피지의 수바섬에서 열린 2004 남태평양 게임에 필요한 경기장 건설을 지원했다. 그리고 천연자원이 풍부한데도 서구 쪽에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온 파푸아뉴기니에 막대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파푸아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태평양 연안국가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다.

태평양 연안국가의 중요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중국은 미국이 오랫동안 자기들 앞마당쯤으로 여겨온 태평양으로 영향을 뻗쳐나가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국과 미국이 영향력 확산과 전략적 이권을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면서 태평양이 새로운 냉전의 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벤자민 라일리 오스트레일리아 국립캔버라대 교수는 “중국이 태평양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더 이상 오세아니아를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미국의 호수’쯤으로 여기는 게 당연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라일리 교수는 중국이 파푸아뉴기니 외에도 피지와 통가, 바누아투 등 일부 태평양 섬나라에 군사지원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통가의 경우가 이 지역에서 중국의 장기적 전략 목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통가는 그동안 태평양 지역에서 대만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었다. 하지만 1998년 통가 정부는 갑작스레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중국을 공식 승인했다. 당시 통가의 국왕이던 타우파 아하우 투푸 4세(지난 9월 사망)는 중국을 국빈 방문해 막대한 경제원조 약속을 받아냈다. 또 최근 몇 년새 중국 인민해방군 고위 인사 2명이 통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700여㎢의 면적에 10만여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통가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다.

하와이에서 만난 모한 말리크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센터 연구원은 “갈수록 늘어나는 중국인 관광객과 이민자 행렬은 오세아니아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중국의 경제·전략적 이해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새 수천 명의 중국인들이 태평양 지역에 정착해 식료품 가게와 식당, 각종 소규모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전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중국계 새 이민자의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라일리 교수와 말리크 연구원은 “태평양 지역 국가의 인구 규모가 워낙 작다 보니 이 정도의 이민자만으로도 이들 국가의 전통적 종족과 경제적 균형에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과의 충돌은 초읽기

라일리 교수는 대양해군을 지향하는 중국으로선 태평양 너머까지 영향력 확대를 꾀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대로, 중국은 일찍이 일본 등이 역사적으로 태평양 섬나라들을 활용해 어떻게 태평양 제국을 건설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중국이 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넓혀나간다면 장기적으로 미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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