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국민경선제· 거국중립 내각·개헌론…어지러운 군상극 관전 포인트…알맹이를 누가 말하나, 노 대통령은 어디로 가나, 고건은 지지도를 회복할까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11월2일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의 주제는 정계 개편이었다. 통합신당 추진기구를 만들지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국회의원이 100명 넘게 모였다. 19명이 발언했다. 자리를 뜬 의원이 많지 않았다. 결론은 따로 기구를 만들지 않고 현 지도부인 비상대책위원회 주도로 심도 있고 체계 있게 통합신당론과 재창당론 등을 논의하자는,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제안대로 정리했다. 쉽게 말해 천천히 가자는 얘기다. 의원들은 김 전 의장의 ‘지둘려’ 노선이 빛을 발한 의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1년 가까이 당론이 없다
다음날엔 정기국회에서 논의할 각종 현안에 관한 정책 의원총회가 열렸다. 46명이 참석했다. 끝날 즈음엔 채 20명도 남지 않았다. 의원들의 관심과 열정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국회와 여야 정당에서 ‘당론’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비판과 견제를 존립 근거로 삼고 있는 한나라당은 그렇다 치고, 정부와 공동책임을 지고 당정 협의를 하는 열린우리당의 경우는 심각하다. 당장 북한 핵실험 이후 논란이 돼온 미국 주도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폭,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부동산 가격 폭등 문제 등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당론이 없다. 국회에 계류 중인 국방개혁법, 사법개혁 법안, 비정규직 법안 등 쟁점 안건들에 대한 전략도 없다. 그런 지 1년 가까이 됐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해 범여권의 정계개편론에 대해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한 것은 이 때문인데 의원들은 잘 모른다.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정책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가 분명해야 차이가 생기고 지지 여부를 결정할 텐데 집권여당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국민들은 잘 모른다. 의원들의 관심과 열정은 하나의 꼭짓점을 향해 있을 뿐이다. 내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다. 대선 4개월 뒤 열리는 2008년 총선도 대선 결과에 연동된다.
현재의 여권발 정계 개편 논의는, 통합신당론 같은 열린우리당의 미래에 관한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완전국민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 같은 대선 후보 선출 방식에 관한 논란, 11월9일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터져나온 거국중립 내각 논란, 개헌론 등 거의 모든 ‘메뉴’를 한꺼번에 테이블 위로 쏟아내고 있다. 신당론, 분당론, 리모델링, 재건축 등이 논란이 됐던 2002년 대선과 비교하면 닮은꼴이면서도 구체적인 양상은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럼에도 정작 중요한 문제, 현재의 복잡한 움직임이 집권을 목표로 한 것이고 왜 집권하려 하는지 설명이 빠져 있다. 알맹이가 없다. 알맹이는 말로 채워지지 않는다. 꼬박꼬박 돈을 붓지 않고는 적금을 탈 수 없는 것처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대선을 앞두고 경쟁 구도가 확정되기 전까지 누가, 어떻게 알맹이를 충실히 채워나가는지 지켜보는 게 여권발 정계개편론의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대통령 사퇴’는 야당의 공세 도구였는데…
두 번째 관전 포인트는 노무현 대통령의 거취 문제다. 범여권이 그리고 있는 정계 개편의 큰 그림은 대체로 비슷하다. 차기 대선도 1997년, 2002년과 같이 지역 대결을 기본축으로 정책과 노선에 따른 차이가 엉켜 있는 구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고건 전 총리와 새로운 정치 세력의 연합 혹은 연대가 거론된다. 평화개혁 세력, 평화번영 세력, 중도개혁 세력 등 여러 ‘상표’가 붙어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정치세력은 논외로 치면, 민주당과 고건 전 총리 쪽은 노 대통령의 탈당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상당수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11월4일 노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만남이 하나의 상징으로 작용하고, 김원기 전 의장, 문희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중진들의 노력 때문에 파열음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문 전 의장 등 중진들은 “통합신당을 주장하면서 누구를 배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노 대통령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거취를 결정할 것”이라고 다독이고 있다.
11월9일 한명숙 국무총리를 상대로 한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부겸·최규식 의원 등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거국중립 내각’을 주문했다. 그에 앞서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안보·경제 위기 내각을, 강재섭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중립적 관리형 내각을 제안했다. 한나라당이 대선의 공정 관리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이 정계 개편 논의에 개입하지 말고 국정에 전념하라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청와대는 예상했다는 듯이 국회 정상 운영과 여야 합의를 전제로 진지하게 협의할 수 있다고 수용 의사를 밝혔다.
원래 거국중립 내각 주장은, ‘대통령 즉각 사퇴’와 함께 야당의 상투적인 정치 공세 도구였다. 여당이 앞장서 주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립내각 구성의 현실성을 낮게 보면서도 여당 의원들이 이를 주장한 것은, 통합신당이 발족하는 시점 전후에 노 대통령이 중립내각 구성을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탈당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공개적으로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원내대표, “손 전 지사도 여기가 맞다”
세 번째 관전 포인트는 고건 전 총리의 영향력, 지지율 회복 여부다. 고 전 총리는 11월2일 기자간담회에서 “중도실용 개혁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국민통합신당의 주춧돌 역할을 하겠다”며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부터 본격적인 창당 추진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10일 발표된 몇몇 여론기관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반등의 기미는 없다. 정체 혹은 소폭 하락이다. 대세론을 이어가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거리를 둔 3위다. 지지율이 10%대다.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대선 후보로 거론된 이후 가장 분명한 어조로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음에도 호응이 약하다. 고 전 총리는 당이 없다. 미래와 희망포럼이라는 정치조직이 있긴 하나 현역 정치인은 없다. ‘고건 사람’으로 꼽히는 다른 정당 소속 의원들은 최대한 늘려 잡아도 다섯 손가락 안이다. 정치적 생명을 걸 정도도 아니다. 그나마 고 전 총리의 힘은 대중들의 높은 지지도에서 나오는데, 현재의 지지도는 신당 국면을 주도할 정도는 아니다.
민주당은 지지세력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핵심세력이면서도 상황을 주도할 힘은 없다. ‘족보’를 가지고 있다지만 의석 12석의 군소정당이다. 호남에선 힘을 써도 전국 기준 정당지지도는 한 자릿수다. 게다가 유력한 후보가 없어 대선 국면만 놓고 보면 종속변수다. 그래서 방식이 격하다. 김효석 원내대표는 11월9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이념과 생각에 따른 재편을 주장하면서 한나라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고진화 의원을 지목해 “고 의원, 그 자리가 불편하지 않으냐” “손 전 지사도 여기가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홈페이지에도 글을 올렸다. “열린우리당에는 정세균, 이강래, 송영길, 김부겸, 임종석 의원과 같은 중도세력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에도 원희룡, 임태희 의원 등 함께할 수 있는 분들이 꽤 있다.” 공개적으로 실명을 거론하면서 같은 당을 하자는 방식은 극히 이례적이다.
김 원내대표에 앞서 원내대표를 지낸 이낙연 의원도 정계 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주당 분당을 주도했거나 노무현 정부에서 현저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자기 정리와 반성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열린우리당은 정계 개편을 주도하려는 욕심을 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번 정계 개편은 열린우리당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분당을 주도했거나 노무현 정부에서 현저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빠지면 초선만 남는다.
플러스 알파를 찾아라
크고 작은 난제를 풀고 통합신당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권 탈환에 목말라 있는 한나라당과 의미 있는 승부를 겨뤄볼 만한 필요조건이지, 승리를 담보하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알파’ 없이는 힘들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 선거는, 외환위기와 DJP 연합, 당시 여권의 분열, 병역 비리 쟁점화 등 어느 한 가지라도 빠졌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2002년도 마찬가지다. 국민참여 경선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후보 선출 방식, 극적인 후보 단일화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참여정부도 없었다. 그렇게 용을 써서 각각 39만 표(1.3%포인트), 57만 표(2.3%포인트)로 차로 이겼다. 그래서 투표는 유권자가 하는데도 이렇게 말하곤 한다. 대통령은 하늘이 내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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