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자원수탈 목적으로 만든 비포장도로가 원래의 길로 잘못 알려져…짐 지고도 힘 덜 들여 걷는 길… 갈천리 주민들은 되살리기 운동 벌여
▣ 구룡령=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에서도 가장 산림이 울창한 지역인 설악산과 오대산의 허리에 위치한 대표적인 옛길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를 연결하는 구룡령은 영동과 영서 사람들이 설악산·점봉산·오대산 등 백두대간 장벽으로 나뉘어 산지와 해안 지역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 두 지역을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영동 북부 양양·속초 등지에 살았던 이들은 한계령·미시령·진부령보다는 주로 구룡령을 통해 홍천이나 평창으로 다녔다. 고속도로를 내면서 옛길을 곳곳에서 토막내는 바람에 원형이 많이 사라진 한계령·미시령·대관령 등에 비해 구룡령 옛길은 백두대간의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옛길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는 길로 꼽힌다.
산지와 해안을 잇던 거의 유일한 통로
구룡령 옛길은 우리 사회가 옛길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구룡령의 지명과 위치가 현재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지리에 밝고 산을 잘 안다는 사람들조차 구룡령의 옛길은 모른다. 대부분이 구룡령 하면 지금 차가 다니는 56번 국도가 넘나드는 고개를 원래의 구룡령길이라 생각한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구룡령 고개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가 지난 1994년 포장된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의 구룡령의 위치가 아닌, 차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사람들은 구룡령의 위치를 잘못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 차가 다니는 지점으로 정리됐다. 백두대간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정부나 민간단체, 학자들조차 구룡령길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남아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영서와 영동을 차로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험한 지형을 실감한다. 그래서 이런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길을 걸어보면 구룡령 옛길에서 노새와 조랑말 등이 큰 등짐을 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옛길은 힘겨운 고개를 가장 힘이 덜 드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비탈길이어도 최대한 경사를 누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옛사람들의 지혜가 세월과 함께 쌓인 덕분이다. 어떤 빼어난 등산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연 속에 파고드는 절묘한 흐름이 길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숲과의 조화가 자연스럽고 깊다는 점은 걸어보면 단박에 느껴진다. 똑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가 길에 묻어 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큰 산의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주변의 숲을 감상하기 어려운 비탈과 고빗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산쟁이들 가운데서도 발품이 노련하고 옹골진 이가 아니면 대부분 숲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하고 정상으로 오르기에 바쁘다. 하지만 구룡령 옛길은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요즘 일부 등산꾼들처럼 싸우는 듯이 산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갈 길이니 최대한 여유 있고 천천히 걸음이 이어지도록 길을 냈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되었다. 선조의 경험과학이 녹록지 않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솔반쟁이, 묘반쟁이, 횟돌반쟁이…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민중들의 꿈과 희망, 아픔과 좌절도 녹아 있다. 특히 일제시대 때 숯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함께 철기문화가 열리면서 양양 일원으로 공급한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의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상징은 금강소나무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진 뒤 국내에는 금강소나무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무리를 이룬 200~300년 된 금강소나무들의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어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의 표본인 곳이라 해 ‘솔반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이라는 뜻의 ‘횟돌반쟁이’ 등의 지명도 남아 있다.
구룡령의 영동 쪽 방향 하늘 아래 첫 마을인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 사는 엄익환(70)씨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구룡령 옛길을 살리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갈천리는 백두대간에서도 대표적인 첩첩산중으로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한 곳으로 ‘갈천약수’로 더 알려져 있다. 오대산을 중심으로 설악산 일대까지 50년 가까이 산삼을 캐러 다녀 백두대간 심마니로 잔뼈가 굵은 엄씨가 구룡령의 옛길을 되살리려 하는 것은 산림이 곧 생활 터전이었던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오대산·설악산 지역의 내력과 문화, 역사를 줄줄 꿰고 있는 그의 삶과 구체적으로 닿아 있다. 그는 들머리와 날머리 등을 비롯해 구룡령 구석구석 옛길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곳마다 담겨진 사연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있다. 심마니로서 구룡령 일대의 백두대간을 어릴 때부터 수없이 다녔던 기억을 되살려 옛 지명과 유래를 밝혀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엄씨는 “내가 이 길의 내력과 이야기를 후대에 전해주지 않으면 영동 북부와 영서 내륙이 만나고 빚어낸 사연은 그냥 사라질 것이 아닌가”라며 “그것이 내 남은 생의 꿈이자 보람”이라고 말했다. 엄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본격적인 심마니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 발품으로 산을 다니며 받은 산삼으로 4남매 자식들을 길러내고 분가시킨 뒤 지금은 아내와 함께 크게 넉넉하지 않아도 곤궁하지는 않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엄씨를 비롯한 갈천리 주민 모두는 구룡령 옛길을 지켜온 산증인들이다. 엄씨와 마을 주민들의 옛길 복원 노력은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 10월12일 구룡령 정상에서는 ‘구룡령 옛길 걷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양양군청과 강원도청, 동부지방산림청 관계자들과 등반객 등 300여 명은 이날 양양과 홍천을 넘나드는 옛길을 따라 5km 정도를 걸었다. 특히 구룡령 옛길의 들머리가 시작되는 곳으로 삼기 적절한 56번 국도가의 갈천분교는 그 소담한 풍경이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여서 참석자들이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몇 해 전에 폐교가 되어 지금은 수련원으로 쓰이고 있다.
10월에는 ‘옛길 걷기대회’ 열려
구룡령 옛길은 엄씨가 떠나고 갈천리 주민들의 기억이 사라지면 영원히 역사에 묻힐 가능성이 큰 길이다. 백두대간의 문화적 원형과 생태적 유산이 녹아 있는 이 옛길이 주민들의 뜻처럼 제대로 관리되고 이용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 어떤 포장도로보다 의미 있고 풍부한 길을 하나 더 가지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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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옛길은 영남대로와 호남대로 등이다. 이 길들은 삼국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땅의 주요 축선이었다. 영남대로는 서울 남대문을 나서면서 시작돼 문경새재를 넘어 부산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조선시대의 관리, 장사꾼 등 한양으로 올라가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도보 교통로였다. 이런 옛길 가운데서도 가장 이질적인 문화가 교류했던 곳이 바로 태백산에서 금강산 너머 원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고갯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영동 지역의 소금과 미역 등 해산물과 영서 지역의 곡식, 임산물 등의 교류가 이뤄졌다. 일제 강점기까지 생활의 많은 부분을 자연산물에 의지하던 시절 바닷가의 산물이 주를 이루던 영동과 산림의 산물이 주를 이루던 영서가 오갔던 이동통로가 바로 백두대간의 고개였다. 특히 이 고개는 영동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길이 대관령 옛길이다. 대관령 옛길은 고속도로가 뚫렸지만 그래도 옛길의 역사가 일부 남아 있는 편이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나머지 주요 옛길은 포장도로와 함께 그 문화와 역사도 거의 다 사라졌다. 삼척의 댓재, 백봉령, 삽당령, 닭목재, 진고개,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 등 대부분의 고갯길은 옛길의 흔적이 바랜 지 오래다. 이제는 사연과 이야기마저 가물가물하다.
지리산에서 비무장지대 삼재령까지 약 700km에 달하는 백두대간 가운데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를 타고 넘을 수 있는 백두대간 고갯길만 헤아려도 70여 곳이다. 최근에는 속리산 자락의 밤재와 점봉산의 조침령에 포장도로가 개설됐다. 이화령에는 4차선 국도가 있는데도 그 옆에 다시 고속도로가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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