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 20돌 핵심 관련자 좌담… “반미 이슈가 대중에게 확산된 계기”… 3박4일의 포위와 1288명 구속, 88올림픽 앞둔 정권의 욕심이 자충수되다
▣ 사회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정리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좌담회 참가자] 김신(당시 애학투련 의장.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83학번)
김석(10·28 건대항쟁 20주년 기념사업회 수석위원장. 건국대 철학과 85학번)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80년 광주’는 ‘광주민주화운동’ 또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적 권리를 획득한 지 오래지만, 80년대에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은 여전히 하나의 ‘사태’로 기억된다. 1986년 10월28일부터 서울 건국대 캠퍼스에서 3박4일 동안 벌어졌던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점거농성 사건 역시 역사 속에서는 ‘건대 사태’일 뿐이다.
단일 사건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288명의 구속자 수로 알 수 있듯 격렬했던 사건의 파장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87년 6월항쟁의 예고판인 이 사건은 87년과 88년에 대중화한 반미운동과 통일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한겨레21>은 사건 발생 20주년을 맞아 이 사건을 ‘건대 항쟁’으로 기억하는 핵심 관련자들과 함께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은 10월20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이뤄졌다. 편집자
△ 사회: 꼭 20년 전 오늘로 돌아가보자. 오늘이 10월20일이니까 당시로 치면 일주일 전인데 준비에 바쁘지 않았나.
△ 김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디 모여서 회의하고 있었을 거다. 애초 장소는 건국대가 아니라 연세대였다. 건대가 상대적으로 감시가 적었다. 당시 친위 쿠데타설도 있어서 긴박감이 더했다.
△ 김석: 2학년이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그런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저런 준비에 바빴다. 다른 집회 때보다 건대 학생들의 참여가 훨씬 많았다. 결국 건대 재학생 구속자만 100명이 넘었다.
“이건 ‘야스다’다”
△ 사회: 애초부터 3박4일 동안의 장기 농성 계획을 짜고 들어간 것인가.
△ 김신: 아니다. 농성 계획은 전혀 없었다. 몹시 추웠다. 반나절짜리 집회였다. 그런데 경찰이 학교를 아예 봉쇄해버렸다. 학생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대량구속이 예고된 셈이다. 우연적인 요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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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이 그랬다.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내용이 일부 포함됐다. 북한이나 미국에 관한 내용이었다. 10월27일 밤에 건대 건물로 들어가 준비된 유인물을 봤다. 우리끼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건 ‘야스다’다”고 했다(야스다 사건은 1969년 1월18일 당시 일본 학생운동조직인 전공투 소속 학생들이 도쿄대 야스다강당을 점거농성하던 중 8500명의 경찰 기동대에 의해 전원 연행된 사건을 가리킴).
△ 김석: 전투조로 편성돼 당시 민중병원 건물 쪽을 지켰는데 생각보다 경찰이 너무 많았다. 이상했다. 건대 학생들로서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다. 하룻밤이 지나도 경찰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휴교령이 떨어졌다. 다들 어쩔 줄 몰라했다.
△ 사회: 이름이 상당히 긴데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이라는 조직이 생긴 배경은 무엇인가.
△ 김신: 학생운동 안에서는 87년 정권교체기를 어떻게 맞이할지를 두고 85년부터 토론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파가 너무 많았다. 서울대에만 13개였다. 두 가지 변수, 즉 전두환 정권에 대한 태도, 그리고 미국에 대한 태도로 정파가 나뉘었다. 86년 초에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가 나왔는데 들리는 얘기가 하도 흉흉해 서울대 집회에 가봤다.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자민투 학생 70~80명이 구호를 외쳤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몰아내자 미국놈들, 까부수자 괴뢰정권’이었다. 와, 진짜 세네. (웃음) 인식차가 크다고 느꼈다. 바로 그때 (김)세진이하고 (이)재호가 분신했다. 이건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민민투에서도 반미투쟁에 들어갔다. 차이가 사라졌다. 합치자고 했고 학교별로 토론이 벌어졌다. 애학투련은 그런 쟁점에 대해 합의를 본 뒤 발족한 단체는 아니다. 일단은 공동투쟁기구로 출발했다. 발족되자마자 대규모로 구속돼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96년 연대사태와 전혀 다른 반향
△ 사회: 대규모 구속자는 학생운동 내부 사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정권의 필요에 따른 것 아닌가.
△ 한홍구: 86년 여름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88년 올림픽이 결정된 때였다. 운동 진영은 어떻게 학살 정권이 잔치를 벌이는데 세계에서 다 올 수 있느냐며 분노했다. 정권과 운동 진영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높았다. 야당의 투쟁력도 높아졌다. 관제 야당에서 벗어나 두 김씨(김대중·김영삼)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 이후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올림픽과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눈엣가시를 없앨 기회가 필요했다. 대중동원력이 가장 큰 학생운동을 쳐야 했다. 금강산댐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이런 정세가 1학년 단순 가담자를 포함한 130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의 구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 사회: ‘미제 축출’이라는 구호가 대중집회에서 나온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이었던 것 같다. 부분적으로 논의되던 ‘반미’라는 이슈가 대중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 한홍구: 85년에 한국 사회에 이른바 ‘CNP논쟁’(시민민주혁명(CDR)과 민족민주혁명(NDR),민중민주혁명(PDR) 이론 간 논쟁)이 활성화됐지만,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의 이론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북한 쪽의 문건을 그대로 베끼는 수준이 많았지만, NL 쪽의 강력한 메시지는 ‘반미’와 ‘한국은 식민지’라는 주장이었고 대중적인 호소력도 얻어가고 있었다.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죽음은 기폭제가 됐다. 70년대만 해도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에서 ‘80년 광주’는 미국이라는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다. 반미의 화두가 충격적이고 거친 방식으로 던져진 것은 사실이다.
△ 김석: 85년 미 문화원 점거농성 때만 해도 겉으로는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건대에서는 ‘양키 군사교육 거부, 미군 철수’ 같은 생경한 구호가 등장했다. 그 뒤 운동권 진영 안에서 고민해야 할 화두가 됐다.
△ 한홍구: 미 문화원 점거농성은 액면가로 보면 항의한 게 아니라 물어보러 간 거다. (웃음) 그랬기 때문에 나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건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정권 쪽에서 학생운동을 평정해야 한다는, 큰 디자인이 있었다.
△ 김석: 경찰에 연행된 뒤 가장 먼저 받았던 질문이 ‘너네 학교 안에서 서로 동무라고 불렀지?’였다. 빨갱이로 몰아가려는 분위기였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본 신문에는 공산폭도로 묘사돼 있었다. 농성자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 사회: 대학 건물 안의 장기농성이라는 점에서 96년 한총련 연대 사태와 비교해볼 수 있다. 96년에는 그 사건으로 학생운동이 심대한 타격을 받고 영향력을 소진했다. 그런데 86년 건대에서는 1288명이나 구속된 뒤에도 바로 다음해인 87년 6월항쟁 당시 학생운동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김신: 학생운동의 저변이 두터웠다. 학생들만 투쟁한 것도 아니다. 또 정권의 욕심이 지나쳤다. ‘친북괴 공산혁명분자들의 점거난동 사건’이라는 공식 규정이 국민들에게까지 먹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애들인데…’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쩌면 정권으로서도 자충수였던 측면이 있었다.
△ 김석: 3박4일 동안 굶으면서 처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은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희생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86년까지만 해도 운동권은 극소수였는데 이듬해인 87년에는 자연스럽게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거리가 좁혀졌다.
△ 한홍구: 87년 1월의 박종철 사건 역시 전환점이었다. 건대가 터진 이후 두 달 동안 정권은 운동 진영을 싹쓸이하려고 올코트프레싱을 가했다. 그런데 고문조작 사실이 폭로되면서 찌그러져 있던 운동 진영이 살아났다.
△ 사회: 구속자를 양산하는 바람에 그들이 다시 나와 학생운동을 더 열심히 한 측면도 있지 않나. 87년 학생운동 대중화에 큰 영향을 준 것 아닌가.
△ 김석: 구속됐다가 100일 정도 재판을 받은 뒤 집행유예로 나왔는데 처음엔 무척 썰렁했다. 그전에는 학생운동 조직이 대부분 언더서클 형태였는데 87년 전반부터는 선후배들이 모두 과 대표나 과 학생회장이 돼 있었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자는, 대중 노선이었다.
△ 한홍구: 그 부분은 건대의 결과라기보다는 민주화운동의 발전 과정으로 봐야 한다. 당시 지식인 사회의 책임도 크다. 미국에 대해 설명을 못하니까 학생들이 나선 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남쪽 사회의 눈으로 남쪽을 봐야 하는데 북쪽의 시각으로 남쪽을 보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을 폈지만, 사실 당시 한국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발전한 상태였다.
△ 김석: 반미 문제를 선도적인 입장에서 제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념공세의 빌미가 됐지만, 사건 이후 ‘반미’나 ‘통일’이 주요한 이슈로 빠르게 확산됐다.
빨갱이 몰이의 ‘주범’은 누구인가
△ 사회: 구속자들은 예외 없이 ‘386세대’다. 요즘 386이 무능과 부패의 대명사처럼 돼 있는 분위기인데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 김신: 구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나중에 더 고생했다. (웃음) 요즘 386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사실 386이 언제 정권을 잡아본 적이 있나. 국가 경영을 보좌하는 위치이지 경영을 직접 한 건 아니다. <조선일보>를 보니까 북한에서도 핵실험을 북의 386이 주도한다고 하더라. (웃음) 건대 이후 학생운동권이 몰리는 것보다 지금 (386들이) 더 몰리는 것 같다. 내가 선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행복을 주는 일은 다른 것 같다. ‘의도’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 결과에 책임을 지는 자세도 필요하다.
△ 김석: 우리(세대)가 정권의 주체가 됐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일부 친구들이 정권에 참여했지만, 제대로 일도 못해보고 무능함이나 부도덕함의 상징인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안타깝다. 건대 항쟁 20주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새삼 놀란 점은 학생운동이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과제다.
△ 한홍구: 사실은 그때가 비정상이고 지금이 정상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역할이 과도했다. 대학생들의 의식과 삶은 변했고 학생운동의 역할도 변했다. 어떤 과제나 가치라도 그들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지금 학생들은 단 한 번도 자기 생각을 바꾸거나 전복해볼 기회가 없었다. 한 번도 입시제도와 아버지를 거부하지 못한 세대들이다.
△ 사회: 사건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고 구속자들은 사면·복권됐지만, 여전히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작업은 필요하지 않나.
△ 김신: 우울증을 앓고 있는 친구나 선후배들을 본다. 정신적인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봐야 한다.
△ 한홍구: 준비 없이 들어갔다가 공산혁명 분자나 빨갱이로 매도됐기 때문에 그 상처는 오래갔을 것이다. 사실 진상규명도 제대로 안 돼 있는 셈이다. 1천 명 이상의 대학생을 3박4일 동안 묶어놨다가 구속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누가 냈는지 모르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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