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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면예금 좀 쓰면 안 되겠니?

등록 2006-10-26 00:00 수정 2020-05-02 04:24

김현미 의원 등의 법안이 제출돼 있으나 정부와 금융권의 반대로 표류 중… 은행의 “기금 출연은 위헌”에 “소멸이지 은행으로 소유권 귀속 아니다” 반발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는 저소득층에 대한 소액신용대출, 이른바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촉진하기 위한 법안이 제출돼 있다. 우선 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표 발의한 ‘휴면예금의 처리 및 사회공헌기금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 은행권에만 3천억원 이상 쌓여 있는 휴면예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저소득층에 대한 금융지원 사업 등에 쓰자는 내용으로 돼 있다.

“공익사업 준비 중” vs “자선사업인 줄 아나”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 대표 발의의 ‘휴면예금 관리 및 재단 설립에 관한 법률안’, 홍문표 한나라당 의원 대표 발의의 ‘휴면계좌의 활용에 관한 특별법안’ 또한 큰 맥락에선 김 의원 안과 같다.

김현미 의원은 법 제안 이유로 “장기간 찾아가지 않는 휴면예금 또는 휴면보험금을 재원으로 ‘사회공헌기금’을 설립해 저소득층에 대한 금융지원 사업 등에 쓸 수 있게 함으로써 서민생활의 안정과 복지 향상을 꾀해 균형 있는 사회 발전을 이루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법안에선 이를 위해 국무총리실에 기금운영위원회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안은 지난해 정기국회 때 열린우리당 당론으로 채택됐음에도 지금껏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들 휴면예금 관련 법안이 탄력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정부와 금융권의 반대 때문이다. 금융권의 반대 논리는 ‘위헌성’. 은행연합회 수신신탁팀의 강상구 부장은 “상사 소멸시효(5년)가 지난 휴면예금의 소유권은 은행으로 귀속되는데, 이를 기금에 출연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강 부장은 “소멸시효가 끝난 휴면예금이라도 고객이 나중에 찾으러 오면 돌려주는 관행도 감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무리 좋은 목적에 쓴다고 해도 법으로 강제해 휴면예금을 기금으로 출연하도록 하는 것은 무리라는 설명이다. 그는 “(국회 쪽의) 법안 발의 전부터 은행권에선 (휴면예금으로) 공익재단을 만들어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었다”고도 했다.

김현미 의원실의 진형근 비서관은 이에 대해 “(은행권이)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자선사업’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은행들은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대한 전문인력도 노하우도 갖추지 못했다. 또 극빈층을 제도 금융권에서 내쫓았다. 그래놓고선 휴면예금을 갖고 오려고 하니 자기네가 한다고 부랴부랴 나서고 있다. 제도 금융권에서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할 경우 최소한 손해는 안 보려 할 것이고, 건전성을 지키는 쪽으로 쓸 것이기 때문에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 은행권에서 제기하는 위헌 시비에 대해 진 비서관은 “은행의 수익으로 잡힌 휴면예금은 고객 처지에서 봤을 때 ‘상사 시효의 소멸’일 뿐이지, ‘소유권 이전’은 아니다”며 “위헌성이 없다는 유권해석을 법무법인 두 군데서 받았다”고 말했다.

박영선 의원안은 기부금·국가 예산도 고려

국내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대표 격인 사회연대은행의 설립을 주도한 노대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도 위헌성 시비를 일축한다. “외국에도 그런(휴면예금을 기금으로 출연하도록 한) 사례가 있다. 휴면예금은 예금주들 돈인데, 일방적으로 털어서 자기들(은행) 주머니에 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노 위원은 “외환위기 뒤 은행들이 국민 돈(세금)으로 크는 과정에서 저소득층은 더 가난해졌다”며 “(은행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은행들이 공익재단을 설립해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만,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에선 ‘돈’보다 ‘사람’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며 “별도의 재단 설립보다는 실제로 일하고 있는 마이크로 크레디트 기관들에 출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반박 논리에도 불구하고 휴면계좌 관련 법안의 앞날은 여전히 험난해 보인다. 돈을 쥔 금융권 쪽의 태도가 변할 가능성이 별로 없을 듯해서다. 더욱이 재정경제부나 금융감독위원회도 금융권과 비슷한 이유로 관련 법안들에 난색을 표명해왔다. 정부 쪽 역시 위헌 시비를 불러올 수 있는 방안보다는 금융권 돈이니 금융권이 알아서 쓰도록 하자는 쪽이다.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의 노벨상 수상으로 국내에서도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활성화 논의가 말잔치에 그칠 수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런 가운데 박영선 열린우리당 의원이 또 다른 마이크로 크레디트 관련 법안인 가칭 ‘신용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은행 설립 및 금융지원법안’을 준비 중이다.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대한 기본법을 정해 무담보 소액신용 지원 사업을 제도화하자는 취지다. 박 의원 쪽은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에 대한 지원금의 재원을 금융권의 휴면예금에 한정하지 않고 기부금, 국가예산 등으로 다양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 방안은 자금 지원의 통로를 다양화하는 것과 함께 마이크로 크레디트 기관에 교육, 컨설팅 업무를 맡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에선 초기 창업자금을 지원할 뿐 창업 뒤에 드는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데까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박 의원은 사회은행법안과 연계된 것으로 ‘금융기관의 공익성 제고 촉진법안’을 함께 준비해놓고 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 등에 지원하는 공적 활동을 평가해 ‘평판’을 높여주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만들자는 취지다.

기관들에 법적 지위 부여하는 게 우선

노대명 부연구위원은 “우선은 마이크로 크레디트 기관들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금 모금을 활성화하려면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기부금을 손비 처리하고, 금융기관으로서 여신뿐 아니라 일부 수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도 마련할 수 있고….” 노 위원은 “은행들은 실제로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을 수행하는 기관들을 측면 지원해주고, 마이크로 크레디트 담당자들을 위한 조그만 창구를 빌려주는 식으로 (간접) 참여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는 돈 모아 9230억원

휴먼계좌란 거래가 끊긴 지 오래된 계좌, 예금액 따라 소멸시효 달라

마이크로 크레디트 활성화를 위한 추가 ‘돈줄’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휴면계좌는 거래가 끊긴 지 오래된 계좌를 일컫는다.
은행권에서는 ‘휴면예금’이라고 하며, 통상 △10년 이상 거래가 없었거나 △1만원 미만 예금자로 1년 이상 입출금 거래가 없는 경우 △1만∼5만원 예금자로서 2년 이상 입출금 거래가 없는 경우 △5만∼10만원 예금자로서 3년 이상 입출금 거래가 없는 경우 휴면계좌가 된다. 은행에서는 휴면계좌를 ‘잡좌’로 분류했다가 상사 소멸시효(5년) 뒤 ‘잡수익’으로 잡지만, 고객의 요청 때는 반환 처리하고 있다.
보험권에서는 ‘휴면보험금’이라고 하며, 보험가입자가 보험료를 제때 내지 않아 계약 효력이 상실된 지 2년 뒤 보험사의 잡수익으로 잡히는 미지급 해약환급금을 말한다. 또 증권업협회 규정에서 휴면계좌는 6개월 동안 매매나 인출이 없으면서 잔고가 10만원 이하인 계좌를 말한다.
금융감독원이 10월15일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8월 말 현재 은행 휴면예금은 3437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말 1336억원의 2.6배 규모다. 보험사의 휴면보험금은 3월 말 현재 4575억원, 증권사 휴면계좌는 6월 말 현재 33만 계좌 1007억원에 이른다. 상호저축은행의 휴면예금은 4억6천만원, 신용협동조합의 휴면예금은 207억원에 이른다. 은행과 보험, 증권 등 전체 금융기관의 휴면예금은 모두 923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금감원은 집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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