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도부는 아찔한 줄타기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경제 제재와 봉쇄 등 미국의 비군사적 위협에 더욱 노출되는 결과만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국제정치는 냉혹한 승부의 연속이다. 승부는 찰라의 선택이 가른다.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선택은 때로 파국을 부를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의 파국은 곧 우리 모두의 파국일 수밖에 없다. 마침내 ‘핵실험 강행’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 북한 지도부의 ‘줄타기’가 아찔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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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응이 부정적일 땐 실험 강행?
북한 외무성은 지난 10월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연구 부문에서는 앞으로 안정성이 철저히 담보된 핵시험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지난해 2월10일 핵무기 보유 선언을 한 지 꼭 20개월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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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등 북녘 땅 전 매체가 이날 오후 6시 동시에 발표한 성명에서 외무성은 “미국의 극단적인 핵전쟁 위협과 제재 압력 책동은 우리로 하여금 상응한 방어적 대응 조치로써 핵 억제력 확보의 필수적 공정상 요구인 핵시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핵실험 강행의 명분으로 내건 것은 “자기의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이 없으면 인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나라의 자주권이 여지없이 농락당하게 된다는 것은 오늘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육강식의 유혈 참극들이 보여주는 피의 교훈”이었다. “핵무기는 철두철미 미국의 침략 위협에 맞서 우리 국가의 최고 이익과 우리 민족의 안전을 지키며 조선반도에서 새 전쟁을 막고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으로 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핵실험 선언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는 등의 보도가 아니어도, 사뭇 결연한 태도였다.
“이번 북한 외무성의 성명은 두 가지 면에서 예전의 성명과 그 성격이 다르다. 그 하나는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는 마지막 단계인 핵실험 계획을 명시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번 성명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부정적으로 나오는 경우 북한은 성명의 신뢰성을 위해서라도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이 10월4일치 에서 지적한 대로 “이번 성명은 그 사안이 매우 엄중하며 지극히 우려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는 사세다.
북 외무성의 발표 직후부터 성급한 언론들은 앞다퉈 ‘카운트다운’을 해대기 시작했다. ‘주말 실험설’이 비중 있게 다뤄지더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7년 노동당 총비서직을 승계한 날인 10월8일이나 노동당 창건 61주년을 맞는 10월10일이 ‘디데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지난 7월의 미사일 동시발사 실험이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진행된 것을 눈여겨본 이들은 “오는 11월7일 미국 중간선거일에 맞춰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란 억측까지 내놓고 있다. 요컨대 북한의 핵실험 강행은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태도가 주류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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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북한이 핵실험을 시행한다면 이는 국제평화 및 안전에 명백한 위협이 될 것이다. …북한이 국제 사회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 헌장상의 책임에 부합하게 행동할 것임을 강조한다.” ‘선언’이 나온 지 사흘 뒤인 10월6일 유엔 안보리는 전례 없이 강한 어조로 북한을 비판하는 의장 성명을 채택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특히 ‘유엔 헌장상의 책임에 부합하게 행동할 것”이란 표현은 경우에 따라 군사적 제재 조치도 가능케 하는 유엔 헌장 제7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존 볼턴 유엔 주재 미 대사도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 미국은 대북 군사적 행동 위협이 포함된 유엔 결의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거들고 나섰다.
‘페리 프로세스’의 가능성은 열려있어
그동안 북한이 ‘핵 카드’를 휘두를 때마다 두 가지 분석이 공존했다. ‘벼랑 끝 외교’라는 말과 함께 ‘협상용’이라는 지적은 주로 외교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는 쪽에서 나왔다. 반면 ‘핵무기 보유 자체가 목적’이라는 평가는 주로 대북 강경론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른바 ‘공동의 포괄적 접근법’을 마련했다며 외교가의 움직임이 부산해질 무렵 터져나온 북한의 핵실험 강행 선언은 결국 후자의 손을 들어준 꼴이 돼버렸다.
북한이 핵실험 강행 선언을 통해 미국으로 ‘공’을 넘긴 뒤에도 “핵을 보유한 북한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자세는 요지부동이다. 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매일이다시피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면 우리가 (양자)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런 협상에 결코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핵과 미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을 것”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엄중한 상황임엔 분명하지만 돌파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미 의회를 통과한 ‘2007년도 국방예산 법안’은 대통령의 서명에 의한 법 발효 이후 60일 안에 고위급 대통령 특사를 대북 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부시 행정부판 ‘페리 프로세스’의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이와 관련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에 이어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낸 웬디 셔먼 국무부 자문관은 10월7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한 인터뷰에서 “대북 정책조정관의 임무는 미국의 대북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는 것이지만, 우선 북한을 방문해 핵실험을 막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고위급 인사가 대북 정책조정관에 임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조정관을 임명하기 전에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 될 공산이 크다.
이미 ‘제2의 고난의 행군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북한 지도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금으로선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핵실험 선언’ 카드의 효력은 북녘 땅 어딘가에서 핵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게다가 설령 핵실험을 강행해 성공을 거두더라도, 북한의 처지가 쉽게 나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북한 지도부가 느끼는 심리적 위협도는 낮아질지 몰라도 대북 봉쇄 조치는 더 광범위한 나라의 참가 속에 대폭 강화될 것이 뻔한 탓이다.
북한 지도부가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미 ‘북한 위협론’을 명분으로 군비 증강과 동맹체제 강화에 나서고 있는 한·미·일 군사협력 체제는 북한의 핵무장이 가시화할 경우 그 속도를 훨씬 높일 것이다. 북한이 군비경쟁의 늪에 빠지면 그 여파로 체제 붕괴의 위험성에 노출되고 말 것이다. 결국 핵실험은 ‘군사적 억제력’ 확보에는 기여하지 못한 채, 미국 주도의 (경제 제재와 봉쇄 등) ‘비군사적 위협’에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지난 10월5일 이후 숨고르기에 들어간 북한 지도부가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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