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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 물리는 배신의 사이클이여

등록 2006-08-18 00:00 수정 2020-05-03 04:24

브로커 김홍수가 뒤늦게 범죄를 털어놓은 것은 “믿었던 판사가 구명하지 않아서”… 김씨 자신도 제보 뒤 무마를 약속하며 금품을 요구하는 이중 플레이로 고발당해

비리혐의 판사 구속

▣ 이순혁 기자 한겨레 법조팀 hyuk@hani.co.kr

여기 한 범죄가 일어난다. ㄱ은 비밀스런 청탁과 함께 ㄴ한테서 거액을 받는다. 물론 현장에 제3자는 없다. 얼마 뒤 ㄱ은 조용히 힘을 써 ㄴ이 유리하도록 일을 처리해준다.

쿨하게 거래는 끝났다. ㄱ과 ㄴ 단둘만이 아는 이 범죄가 세상에 알려져 이들이 처벌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검찰 특수수사통들은 “5~10% 넘기기가 힘들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설령 수사기관이 범죄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ㄱ과 ㄴ이 돈을 숨긴 채 입을 맞춘다면 사실상 처벌할 방법은 없게 된다.

범죄를 발굴하는 ‘배신의 심리학’

그렇다면 검찰과 경찰은 어떻게 이런 범행들을 찾아내고, 수사하고, 처벌받도록 하는 것일까.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어느 한쪽의 배신이다.

어떤 이유로든 ㄱ과 ㄴ의 사이가 벌어지고, 배신감을 느낀 한쪽이 상대에게 복수하기 위해 범행의 전모를 수사기관에 털어놓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신고한 자신도 손해를 보게 된다. 하지만 강렬한 복수심은 웬만한 손해는 감수하도록 만든다.

배신의 과정에서 자신도 무너져가지만 원한의 대상인 상대의 파멸을 보며 미소를 짓는 것, 이른바 ‘배신의 심리학’이다. 이렇듯 배신의 심리학은 때로 비리 수사의 단서가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정의를 세우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최근 차관급 예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와 전직 검사, 현직 총경 등이 구속돼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법조 브로커 김홍수(58·구속수감 중)씨 사건에서도 이런 배신의 심리학이 작동했다.

김씨가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지난해 7월. 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해 수사가 본격화된 것은 올해 4~5월쯤부터다. 구속된 뒤로 10개월 가까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한 채 ‘조용히’ 수감돼 있던 그가 갑자기 자신의 브로커 행각을 검찰에 털어놓은 이유는 뭘까.

김씨는 지난해 7월 구속된 뒤 평소 친하게 지내며 자신의 청탁을 들어주던 법조계 인사들이 자신을 구명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랜 검찰 수사에서도 자신과 관련된 판·검사들에 대해 말을 아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신을 구해주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등을 돌린 법조계 지인들에 대한 섭섭함과 야속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배신감으로 변해갔다.

김씨의 가장 큰 원망 대상은 10년 넘게 교분을 쌓아온 조관행(50·구속수감 중)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구치소에 외롭게 수감돼 있던 김씨는 조 전 부장판사 등에게 배신감을 토로하는 내용의 편지(진정서)를 썼다. 검찰은 지난 4월 김씨가 수감돼 있던 구치소를 압수수색하다가 이를 입수했고, 이때부터 수사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압수수색돼 검찰에 넘어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쓴 진정서였던 만큼, 검찰은 진정서의 ‘진정성’에 큰 무게를 뒀고 이를 토대로 김씨를 추궁했다. 지난해 검찰 수사와 재판에서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극구 자신의 법조 인맥을 감싸안았던 김씨는, 검찰이 전혀 모르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처럼 믿었던 지인들에 대한 배신감에서 입을 연 김씨였지만, 정작 김씨 자신도 주변 사람에게 깊은 배신감을 심어주는 바람에 검찰에 구속됐다. 김씨와 절친한 관계였던 지인이 김씨한테서 깊은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지난해 초 김씨의 브로커 행각을 검찰에 제보한 것이다.

김씨의 행각을 검찰에 알려 김씨를 구속하기에 이르게 한 주인공은 금융 브로커 박아무개(45·별건으로 구속 중)씨. 그는 브로커 김씨에게 자신과 관련된 사건 해결을 청탁하던 ‘고객’이자 동업자였다.

금융 브로커는 왜 김홍수에게 이를 갈았나

박씨는 2000년대 초부터 자신의 기소 중지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수억원을 가져간 김씨가 사건을 잘 해결하지 못해 자신이 구속된 것에 크게 실망했다. 박씨는 또 2004년 중반께 사채업자들과 함께 금융기관에 ‘보호예수’ 조치됐던 하이닉스 주식을 낙찰받아 장내에 편법 매각해 큰돈을 벌었는데, 이 돈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김씨와 크게 다투며 사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박씨가 김씨한테서 깊은 배신감을 느낀 결정적인 계기는 김씨의 ‘이중 플레이’. 금융 브로커인 박씨는 금융기관 대출과 관련해 대출자한테서 금품을 받은 사실이 있었는데, 김씨가 이를 검찰 쪽 지인에게 제보한 뒤, 되레 박씨를 찾아와 “사건을 해결해주겠다”며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때 박씨는 김씨에게 “당장 돈이 없다”며 사건 해결 제안을 거절했는데, 나중에 김씨의 이런 이중 플레이를 알게된 박씨는 복수심에 이를 갈았다.

김씨의 이중 플레이는 아직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수사팀 관계자는 “박씨는 김씨가 자신의 비리를 검찰에 제보한 뒤 자신을 찾아와 금품을 요구한 것으로 알고 적개심을 품게 됐다”면서도 “김씨가 진짜로 박씨를 검찰에 신고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로커 김씨가 평소 절친했던 박씨의 뒤통수를 치려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2005년 1월 서울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민오기 총경에게 박씨에 대한 수사를 청탁하며 3천만원을 건넸기 때문이다. 민 총경은 이 혐의로 지난 9일 새벽 조 전 부장판사, 김영광 전 검사와 함께 구속된 상태다. 김씨의 청탁에서 시작된 박씨에 대한 경찰수사는 브로커 김씨가 어떤 이유에선지 수사를 그만해달라고 부탁해 결국 흐지부지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브로커 김씨의 이중 플레이에 큰 배신감을 느낀 박씨는 지난해 초 김씨의 브로커 행각을 검찰에 털어놓았다. 자신이 기소 중지된 사건 해결을 청탁하며 2억여원을 건넨 사실도 진술했다. 이 때문에 김씨는 지난해 7월 검찰에 구속됐지만, 박씨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브로커 김씨가 검찰에 제보했다는 금융기관 대출을 알선해주고 돈을 받은 혐의로 수감 중이던 박씨는 올해 3월 보석으로 석방된 뒤 곧바로 ‘두 번째 복수’에 나섰다.

앞서 밝힌 것처럼 박씨 등은 2004년, 국제통화기금 시절 파산 위기를 맞은 하이닉스(옛 현대전자)에 대해 채권단들이 출자전환한 주식 200만 주를 싼값에 낙찰받아 비싼 값에 장내에 매각해 수십억원의 차익을 얻었다. 이후 채권단은 자신들의 소유 주식에 대해 보호예수 조처를 내렸는데, 브로커 김씨가 “정치권 실세를 통해 보호예수를 풀고 또다시 주식을 낙찰받으면 큰 차익을 얻을 수 있다”면서 2004년 말 사채업자 등에게서 로비자금 명목으로 10억여원을 조달했다. 박씨는 브로커 김씨가 사채업자들로부터 십수억원을 조달해 여권 실세 인사의 보좌관 김아무개씨에게 수억원을 건넸다는 내용을 검찰에 제보했다. 검찰은 김씨를 집중 추궁해 자백을 받아냈다. 여기에 김씨가 돈을 전달한 상황 등을 적어놓은 김씨의 다이어리까지 확보한 검찰은 김씨로부터 6억35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지난 5월 전 국회의원 보좌관 김아무개(40)씨를 구속 기소하게 된다.

“진실만을 말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결국 브로커 김씨에게서 강한 배신감을 느낀 박씨가 김씨를 구속하도록 만들고, 김씨의 여죄에 대해서도 추가로 검찰에 제보해 그를 파멸로 내몬 것이다.

‘조관행 전 부장판사-법조 브로커 김홍수-금융 브로커 박씨’로 이어지는 물고 물리는 배신의 사이클. 이들의 배신과 암투에 대해 검찰은 어떤 입장일까. “이 사건에 언급된 사람들 가운데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대질했을 때 서로의 진술이 일치하는 대목은 전체 대화 내용의 5~10% 정도에 그친다. 모두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며 상대방의 약점을 헐뜯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고 최대한 진실에 가깝도록 퍼즐을 맞춰갈 뿐이다.”(수사팀의 한 관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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