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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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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이라 카믄 학을 띤다카이”

등록 2006-08-11 00:00 수정 2020-05-03 04:24

5·31 지방선거 이후 잃어버린 ‘텃밭’ 울산 동구와 북구 민심 르포…“8년간 과반 의석을 확보하더니 관성에 젖어 ‘만년 여당’처럼 굴더라”

▣ 울산=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민주노동당요? 배신이죠, 배신!”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울산 ‘중산 현대아파트’ 자치회장 박종옥(42)씨는 “현대자동차 노조원인 남편이 예전엔 ‘민주노동당 안 찍으면 이혼할 생각하라’고 할 정도였다”며 “이젠 민노당 사람과 아는 척이라도 하면 동네에서 왕따당한다”고 말했다.

중산동 자원화 시설이 빚은 비극

장맛비가 쏟아지던 7월26일, 민주노동당의 ‘텃밭’이었던 울산 북구와 동구를 찾아갔다. 두 지역은 정유·자동차·조선 등 대규모 공장들의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1998년 지방선거 이후 북구청장과 동구청장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민주노동당의 인기는 좋았다. 2004년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차지한 지역구 2곳 가운데 하나가 울산 북구였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2005년 의원직을 잃은 조승수 전 의원도 북구청장 출신이었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초라했지만, 이곳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집권당이었다. 지난 5·31 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망가졌다. 동구와 북구는 더 이상 민주노동당의 땅이 아니다. 현대자동차 노조원 출신 후보 4명이 구의원 후보로 출마했는데 3명이 당선됐다. 이들은 민주노동당 후보가 아니라 한나라당 후보였다. 조 전 의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재선거(2005년 10월26일)에서 한나라당 윤두환 의원이 큰 표 차로 당선됐을 때부터 빨간불이 켜졌지만, 민주노동당은 속수무책이었다.

비옥한 땅이 메마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상범 전 북구청장은 ‘음식물 쓰레기 자원화 시설’을 북구 중산동에 지었다. 2005년 8월에 준공된 자원화 시설은 냄새 때문에 2006년 5월에 가동이 중단됐다가 7월부터 다시 가동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북구 민심이 등을 돌린 핵심 의제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민심은 사나웠다.

“민노당이라 카믄 내가 학을 띤다. 저 애물단지를 이상범이가 밀어붙이고, 몬사는 동네라고 약한 자 이용하고…. 냄새 때문에 몬 살겠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지방선거 때 중산동 투표율이 70%가 넘었는데 그기 다 민노당 떨굴라고 그런 기다.” 주부 박아무개(38)씨의 목소리 톤은 한번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몰랐다. 당시 울산 전체의 평균 투표율은 53%였다.

쓰레기 자원화 시설이 싫다는 이유 외에도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과 사후 대책에서도 문제가 많았다고 지역 인사들은 입을 모았다. 북구 의회 유인목(44·민주노동당) 의원은 “학교나 은행 등 사회 기반시설이 없는 낙후한 지역인데 음식물 자원화 시설을 일방적으로 추진해 주민들이 화가 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을 차분하게 설득하는 과정이나 기피 시설을 수용하는 데에 따른 후속 대책 마련 등이 없이 밀어붙이다 보니, 불신과 배신감이 커졌다는 얘기다. 게다가 시설 설치 반대 시위를 한 주민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 조치를 취했다.

노동자들을 옥죄기 위해 자본이 즐겨쓰던 방식을 민주노동당 구청장이 사용하자, 주민들의 분노는 기름을 부은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북구 의회 이은영(39·민주노동당) 의원은 “민원 제기 시점부터 당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며 “8년간 민주노동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관성에 젖어 ‘만년 여당’처럼 굴었다”고 비판했다.

“노동당은 노사분규당 아닌교?”

문제는 민심을 되돌릴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중산동 주민들은 자원화 시설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울산시는 각 구별로 쓰레기를 직접 처리하도록 하고 있다. 시설을 짓는 데 들어간 28억여원을 날리고 다른 지역에 새 터를 마련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과정보다 더 어렵다.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쓰레기 자원화 시설을 볼 때마다 이곳 주민들은 민주노동당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북구가 쓰레기 자원화 시설이라는 현안으로 불거진 반면, 동구는 좀더 근본 문제에 가깝다. 민주노동당의 ‘최대 주주’인 민주노총과 이어진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구 대송동에 사는 헤어디자이너 김태건(32)씨는 잦은 파업을 비난했다. “제발 데모 좀 빨리 끝내라고 해요. 민노당이 도대체 한 게 뭡니까? 맨날 파업이나 하고….” 농소1동 호계시장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황명수(64)씨는 “노동당은 노사분규당 아닌교? 노동자들 이익만 추구하지 말고, 서민들 좀 생각하라고 하소”라며 불만을 털어놨다. 민주노동당이 파업을 하거나 앞장서 파업을 주도하는 것도 아닌데, 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은 그대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실제 울산 전체가 현대 계열의 대규모 사업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에, 하청업체 노동자와 자영업자 등은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파업에 비판적이었다.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은 하청업체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출렁이게 만든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기본급은 월 100만원이 채 안 된다. 민주노동당이 ‘하청업체에 대한 부당한 처우 개선’과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해도,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 노조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이 깔려 있는 이곳에서는 울림이 크지 않은 것 같았다.

비옥했던 땅이 몹쓸 땅으로 변해가는데, 울산의 민주노동당은 얼마나 위기를 체감하고 있을까. 어떤 위기 타개책이 있는지 궁금해 울산시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당의 강호석(37) 사무처장은 “여론조사를 해보면 당 지지율이 45%를 유지하고 있어 떨어졌다기보다는 정체돼있다고 본다”며 “5·31 지방선거에서는 불모지였던 남구에서 당선자가 나왔다”고 자평했다. 정말 위기임을 모르는지, 아니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건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응순 정책실장은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실장은 “예전에는 정규직, 대공장 노조 등의 자양분이 있어 유리한 환경이었지만,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아져 토대가 약해졌다”며 “그럼에도 당은 정규직 대공장 노조 중심틀을 유지하고 있어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울산시당의 대의원과 열성 당원들의 현실 인식도 궁금했다. 이들은 울산에서 특히 심한 정파 간의 갈등에 지쳐 있었다. 또 위기 상황임에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 의욕을 잃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당내 경선을 하면서 생긴 정파 간 감정의 골이 심각합니다. 선거 때 대다수 당원들이 소속 정파의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실망한 당원들이 ‘그래 니들끼리 해봐라’ 하면서 탈당하고 있습니다. 울산연합(NL·민족해방 계열) 대 반연합(PD·민중민주 계열) 구도가 해소되지 않으면 당은 희망이 없습니다.” 현대자동차 5공장 대의원 부대표 오수용(44)씨는 정파 간의 갈등에 당원들이 이탈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열성 당원인 임기흥(36)씨는 “당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며 “울산 지역위원회만 쳐다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그래도 잔정까지 거둘 순 없지라

그럼에도 한때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던 울산의 유권자들이 잔정까지 완전히 거둔 것 같지는 않다. 민주노동당이 배신했다며 앙칼지게 비판했던 박종옥씨도, 기대치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고 박한 점수를 주는 비정규직 노동자 백판기(29)씨도, “민주노동당이 잘해야 노동자들이 떳떳하게 대우받고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전제는 확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밉지만 그나마 기댈 곳은 민주노동당밖에 없지 않느냐는 얘기다. 민주노동당이 울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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