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헌재 게이트’는 허황된 작문인가

등록 2006-06-30 00:00 수정 2020-05-03 04:24

“감사원도 인정한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에 몸통 역할 했다” … 시민단체 고발로 검찰 소환 초읽기… 측근들은 “근거없는 음해” 일축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란행(不須湖亂行·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俄行跡·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2000년 1월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2층 대강당에서는 한시 한 편이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백범 김구 선생이 1948년 나라의 분단을 막기 위해 38선을 넘으면서 읊었다는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주위는 일순 숙연해졌다. 쉰두 해의 시차를 두고 백범의 바통을 이어받아 이 시를 다시 읊은 이는 이헌재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그는 경제부처의 수장 격인 재정경제부 장관에 발탁돼 금감위원장을 그만두는 처지였다.

이헌재와 서산대사

‘뒷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들리는 이임사의 시구는 금감위·금감원 직원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을 터이다.

외환위기 직후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미스터 구조조정’ ‘금융 황제’ ‘개혁 전도사’로 불리던 이의 당부여서 울림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초대 위원장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퇴출 기업·금융회사의 직원들에게 ‘저승사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금감위·금감원 내부적으로는 재임 기간 내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초대 금감위원장의 선명한 발자국을 운치 있는 이임사로 마무리했던 그가 끊임없이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다.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부동산 투기 의혹 시비에 얽혀 부총리직을 그만둔(2005년 3월) 기억이 잊혀질 때쯤인 올 들어 ‘김재록 게이트’에 엮여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뒤이어 대출 비리 의혹으로 계좌 추적을 당하고, 출국금지 조처까지 받는 수모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6월19일 나온 감사원 감사 결과에서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헐값에 팔렸고, 이 과정에 재경부·금감위 등 금융감독 당국이 개입돼 있는 것으로 발표된 것과 관련해선 ‘이헌재 사단’이 의혹의 뒷배경으로 거론되고 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아예 ‘이헌재’ 전 부총리의 실명을 들어 외환은행 헐값 매각의 ‘몸통’이라고 지목하며, 검찰에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그를 부총리직에서 밀어냈던 부동산 투기 의혹은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판명났고, 김재록 게이트 관련 의혹은 진전 없는 소문으로 그치고 말았다. 적어도 아직은. 현재 검찰 조사가 이뤄지는 대출 의혹 사건 역시 계좌추적·출국금지로 떠들썩했던 것에 견줘 별다른 추가 내용이 드러나지 않은 실정이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과 그를 연결시킬 만한 명백한 끈도 아직은 찾아보기 어렵다.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팔린 2003년 8월 그는 재경부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적어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는 금융당국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외환은행 사안과 그를 연결지을 수 있는 명시적이고 유일한 끈은 론스타의 법률 자문을 맡은 김&장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었다는 점뿐이다.

“그분, 화병 안 난게 다행”

이 전 부총리의 최측근 인사로 분류되는 김영재 칸서스자산운용 회장은 (이 전 부총리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에 대해) “특정 세력의 음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헌재 금감위원장 시절 대변인을 지냈으며, 지금도 이 전 부총리와 꾸준히 만나고 있다. 김 회장은 김&장 고문직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재경부 장관직을 그만두고 6개월의 ‘제척 기간’을 지낸 뒤에 맡았던 것”이라며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김&장에선 주로 거시적인 대외경제 환경과 관련한 조언을 해주는 정도였다. 김&장이 장사하는 데 도움이 안 됐다. 김&장에서 주선하는, 밥 먹는 자리에도 안 간 걸로 안다. (김&장의 설립자인) 김영무 변호사와는 학교(경기고·서울대 법대) 때부터 잘 알던 사이여서 설립 때부터 자문을 맡았다고 들었다.” 김&장법률사무소의 고문직은 외환은행 매각 사안과는 전혀 무관했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부동산 투기와 대출 의혹에 대해서도 “왜 그렇게 작문들을 해대는지…”라고 말해 언론의 보도는 섣부른 억측일 뿐임을 강조했다. “그 양반처럼 우직하게 사는 사람도 없다. 1985년부터 18년 동안 양재동 집에서 살았다. 집이 하도 낡아 두 번씩이나 도둑을 맞을 정도였다. 내가 가서 못질을 해준 적도 있다.” 20년 가까이 한곳에 눌어붙어 산 사람한테 부동산 투기 의혹을 씌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집을 사면서 10억원의 대출 약정을 해놓고 중도금, 잔금을 줄 때 나눠 갚았다. 전세금과 정기예금 상환분 두 가지로 상환했다는 게 검찰 조사에서 다 밝혀질 것이다. 관보에도 다 공시돼 있다.

” 김 회장은 “조사해보면 다 알 걸 갖고 없는 혐의를 씌운다”며 “그분, 화병 안 난 게 다행”이라고도 했다. 김 회장의 설명대로라면 이 전 부총리에게 씌워진 혐의나 구설은 모두 근거 없는, 본인에겐 화병을 일으킬 만한 낭설인 셈이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에 대한 감사원 감사에는 이 전 부총리에 대해선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감사원 감사가 부실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를 의혹의 중심으로 꼽는 시각이 너무 섣부른 예단일까?

‘이헌재’라는 실명을 거론하며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의 몸통으로 꼽은 심상정 의원은 “사법적 잣대에 따른 불법 여부를 얘기한 게 아니라 나라 살림과 국민 생활을 책임지는 고위 정책결정권자의 롤(역할)과 관련한 책임론을 거론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는 1998년부터 금감위원장으로 일할 때 부실 기업·금융회사의 정리를 주도했다. 그 뒤 재경부 장관으로 입성해 공적자금 조성 방안을 마련했다. 이어 김&장법률사무소 고문으로 갔는데, 김&장은 구조조정 업무와 관련한 굵직한 일감들을 도맡았다.” 구조조정의 전체 과정과 공적자금 조성 계획을 한복판에서 관리한 이 전 부총리에게 ‘정보’가 쏠려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직에서 떠나 있었다고 해도 김&장 고문의 역할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를 주목한다

심 의원이 두 번째로 드는 정황 증거는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인적 네트워크, 이른바 ‘이헌재 사단’의 존재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당시 그는 재경부를 떠나 있었지만, 금융권을 장악한 ‘이헌재의 사람들’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외환은행 매각 당시 2대 주주인) 수출입은행의 행장은 이헌재씨의 오른팔로 알려진 이영회씨였다. 또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김석동 재경부 차관보(당시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 등 재경부, 금감위에도 이헌재씨의 인적 네트워크가 포진한 상황이었다.”

심 의원은 “외환은행의 헐값 매각은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재경부, 외국계 사모펀드에 은행 대주주 자격 승인을 내준 금감위, 외환은행 이사회까지 관장해야 될 사안이었다”며 “한두 사람의 실수나 공모에 의해 가능한 게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금융감독 당국과 외환은행 경영진에 대한 통제뿐 아니라 법률 대리·회계 자문까지 덧붙여진 혼연일체가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어서 ‘조직적 공모’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심 의원의 주장이다.

심 의원은 “개인 비리는 별개의 문제고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매각토록 한 구조, 이 전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보·인적 네트워크의 구조에서 빚어진 각종 권한 남용과 월권·일탈 행위를 밝히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21일 검찰의 손으로 넘겨진 감사원 감사 결과 자료 중에는 이 전 부총리의 이름도 들어 있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처음 제기한 투기자본감시센터에서 고발한 관련자 20명 가운데 1명으로 포함된 것이다. 감사원 자료에는 이 전 부총리를 비롯한 이 20명을 상대로 한 질의·응답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한다. 검찰은 이들을 상대로 차례차례 소환 조사를 벌일 방침이어서 이 전 부총리 또한 수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

검찰 수사에서 이 전 부총리의 개인 비리 부분은 무혐의로 밝혀지더라도 그를 둘러싼 정치적·정책적 논란은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노동당 쪽에서 검찰 수사 결과를 봐가며 특검을 추진하고 이와 별도로 국정조사를 벌이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중심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는 이 전 부총리다. 민주노동당뿐 아니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쪽에서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에 대한 감사원 감사의 미흡함을 비판하고 있는 터여서 국정조사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특검·국정조사 개연성도 높아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고 해야 할지, 이 전 부총리는 관료 시절 탁월한 업무 역량을 인정받았으면서도 불운했던 편이다. 서울대 법대와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화려한 이력에 옛 재무부에서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1979년 ‘율산 사태’로 공직을 떠난 게 불운의 시작이었다. 이후 초대 금감위원장 시절을 빼고는 여러 구설로 중도에 불명예 퇴진하는 일이 거듭됐다. 관직을 떠난 뒤에도 갖가지 구설로 우울한 날이 계속됐다. 일각의 주장처럼 이 전 부총리 시절 금융 권력에서 배제된 세력의 음해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눈 덮인 들판에 찍힌 발자국은 똑바로 나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의 발걸음이 흔들렸던 것인지,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눈이 비뚤어진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억울한 사람이 나와서도, 의혹이 묻혀서도 안 된다는 대명제가 검찰 수사에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까?



근거는 ‘등’ 한 글자


법 무시하고 시행령만 따른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허가과정

국내 법체계상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인수할 수 없었다. 은행법상 론스타 같은 사모펀드는 은행 대주주가 될 수 있는 금융자본(금융회사 또는 금융지주회사)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 당국의 개입으로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팔기 위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2003년 말 추정치)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기준선(8%) 아래인 6.16%로 끌어내렸다는 시비가 일고 있지만, 설사 BIS 비율이 6.16%로 추정됐다고 해도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BIS 비율 6~8% 수준에서 금융감독 당국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금융산업구조개선법(10조)에 따라 외환은행에 (경영 정상화를 꾀하라는) ‘적기시정 조치’를 (요구도 아닌) ‘권고’할 수 있을 뿐이다.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넘기는 길을 터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쪽이 드는 근거 조항은 ‘은행법 시행령 8조’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 ‘등’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금산법 규정의 예외로 인정돼 론스타 같은 사모펀드도 은행 대주주로 승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론스타에 인수될 당시 외환은행은 법적인 절차에 따른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된 바가 없다는 문제가 남는다. 결국 재경부나 금감위가 기대고 있는 근거는 은행법도 아닌 시행령 조항에 들어 있는 ‘등’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보다 더 원천적인 결함은 상위 규정인 금산‘법’은 따르지 않고, 이에 어긋나는 은행법 ‘시행령’을 근거로 삼아 론스타에 은행 대주주 자격을 줬다는 점이다.
감사원의 6월19일 감사 결과 발표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재경부와 금감위의 항변은 이렇다. “감독당국은 외환은행의 경영 부실이 현재화한 뒤 적기시정 조치를 발동한 다음 예외 승인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었겠으나, 적기시정 조치 발동은 시장의 신뢰를 급속히 하락시켜 은행의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국민 경제에 끼치는 부정적인 파급 효과가 매우 커 선택하기 어려운 대안이었다.” 이 주장대로라면 금산법의 적기시정 조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써먹기 힘든 불필요한 제도로 전락하고 만다. 법이 시행령에 어긋나니 법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정상적인 루트(방법)로는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팔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캐피털에 판 것 역시 위법이지만, 그때(1998년)는 나라 전체가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외환은행 매각 때(2003년 8월)는 외환위기 직후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
전 교수는 “감사원 감사에서 좀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근거가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행정 행위의 난맥상과 공무원의 재량권 남용에 대한 추궁이 전혀 없었다”고 비판했다. 외환은행 매각의 원칙은 무엇이고, 누구의 주도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