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밤택시의 20만원에 한번 놀라고 한국팀 평가전에 또 한번 놀라고…밀리는 설기현과 목이 굳은 안정환… 98년 벨기에전의 근성을 다시 한번
▣ 오슬로 울레볼 경기장=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노자 교수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영국의 런던에서 싼값에 쇼핑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평소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볼 수 있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취재진은 5월31일 노르웨이 오슬로공항에 내려 기세 좋게 숙소까지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때부터 노르웨이 악몽이 시작됐다. “1375크로네입니다.” 노르웨이 화폐인 크로네는 1유로에 7.5크로네로 거래된다. 택시비만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20만원이 나온 꼴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르웨이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5만1801달러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다. 이어 도착한 호텔 직원은 “지금은 2500크로네짜리 ‘스위트룸’밖에 없다”며 취재진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로부터 2시간 동안 취재진은 오슬로 거리를 헤매다 새벽 2시에 겨우 800크로네짜리 방을 찾아 고단한 여장을 풀었다.
가장 물가 비싼 나라에서의 이틀
그렇게 도착한 오슬로였건만, 골이 터지지 않은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은 실망 그 자체였다. 경기 시작 전 옆에 앉은 노르웨이 기자와 한국이 2-1로 이길 것이라고 말싸움을 벌였지만, 경기는 노르웨이가 우세를 점한 가운데 시종일관 지루하게 이어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와 한 골도 터지지 않는 경기를 지켜보는 노르웨이 오슬로 울레볼 스타디움 한국 기자석 쪽에는 경기 내내 썰렁한 침묵만 흘렀다.
딕 아드보카트 한국 대표팀 감독은 예고한 대로 그동안 경기에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다. 녹색 그라운드에 선 대표팀 선수들은 평소와 같은 빨간색이 아닌 하얀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대표팀이 하얀색으로만 구성된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른 것은 12년 만이라고 한다. 상대 구역 깊숙한 곳에 안정환이 갈기머리를 날리며 달리고 있고, 김상식·백지훈은 수비형 미드필더,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여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김두현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섰다. 아직도 실험 중인 4백으로는 이영표-김진규-최진철-이영표가 나섰다. 황선홍 SBS 해설위원은 “아드보카트 감독이 베스트 멤버인 이호·김남일·이을용·박지성 등을 아껴두고, 가장 신뢰하는 이천수와 박주영도 내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경기는 체격이 좋은 노르웨이 선수들이 우리 국가대표들을 강하게 몰아붙이며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중앙 미드필더로 나선 김두현이 고군분투했지만 주변에는 공을 넘겨줄 만한 동료를 찾기 힘들었다. 오른쪽 날개 공격수 설기현은 경기 초반 상대에 밀리지 않는 몸싸움 능력을 보여줬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상대와의 공중전에서 밀렸다. 설기현은 경기 막판 상대의 옆 그물을 때리는 슛으로 노르웨이 관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왼쪽 정경호도 이영표와 호흡이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드보카트 감독은 부진한 오른쪽 윙백 송종국을 빼고 이영표를 오른쪽 윙백으로 돌렸다. 후반부터 왼쪽 윙백으로 김동진이 나서자 정경호의 플레이도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노르웨이 수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안정환은 날아오는 공을 쳐다보느라 목덜미가 굳은 모습이었다. 옆에 앉은 노르웨이 기자는 “저 사람이 2002년 이탈리아전에 나왔던 그 안이냐”고 물었다.
“저 사람이 이탈리아전의 그 안이냐”
그렇지만 경기장 밖은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와 교민들의 외침으로 달아올랐다. 현지 유학생과 교민, 현지로 직접 건너온 축구 동호인 클럽 회원 등 250여 명은 본부석 오른쪽 골대 뒤편에 자리잡은 뒤 작은 규모지만 단결된 응원전을 펼쳤다. 지난해부터 오슬로에서 살고 있다는 신명선(45)씨는 “오래전부터 한국 대표팀이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가슴이 설다”고 말했다.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취재진에게 다가온 김영호(36)씨는 “아직도 표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경기장 밖에서 암표가 거래되는 모습이었지만, 그가 경기장에 들어와 경기를 관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경기가 끝난 뒤 몰려든 기자들을 상대한 신문선, 황선홍 해설위원은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부정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데 어쩌지.” 카메라를 앞에 둔 황선홍 해설위원이 웃었다. “어제 스위스가 이탈리아와 평가전을 벌이는 모습과 비교할 때 너무 맥이 빠지네요.” 신문선 해설위원이 거들었다. “전술적으로 좀더 다듬어지지 못한다면 G조 싸움에서 큰 어려움을 만날 것 같습니다. 미드필더들이 부진했고, 공격도 날카롭지 못했습니다. 수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상대 공격이 그렇게 날카롭지 못했죠.” 그들은 “우리 국민이 이번 월드컵에 큰 기대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이번 경기가 우리 선수들에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지난 2002년 월드컵 이후 우리 대표팀은 유럽 원정 경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과 아시안컵 등 주로 아시아권으로 원정을 많이 다녔으며 최근에는 중동과 홍콩 그리고 미국에서 멕시코와 경기를 한 것이 가장 멀리 나가본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아드보카트 감독의 다소 신경질적인 기자회견도 마무리된 뒤 오슬로 울레볼 스타디움은 다시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곳에 네덜란드 대표팀을 몰고 와서도 이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기자들은 그 말에 그다지 큰 위안을 얻는 것 같진 않았고, 새벽잠을 설치고 대표팀의 경기를 지켜본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얼마나 대단한 성적을 낼지는 알 수 없다. 80% 이상의 국민은 우리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때 2002년의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우리의 목표는 여전히 월드컵 본선 1승이다. 선수들은 국민의 기대에 큰 부담을 갖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를 의식한 듯 아드보카트 감독은 “우리는 좀더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여전히 1승?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다면, 지금까지 봐온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경기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던 경기는 폴란드를 상대로 한 2-0의 승리도, 루이스 피구를 앞세운 ‘황금의 세대’ 멤버를 집으로 돌려보낸 포르투갈전 1-0 승리도, 이탈리아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버린 2-1의 승리도 아니다. 그것은 1988년 프랑스 땅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거둔 1-1의 무승부였다. 마르세유에서 히딩크가 이끈 네덜란드에 0-5로 패한 뒤 경기장에 나선 우리 대표팀은 벨기에를 상대로 머리통이 깨지고(이상헌), 다리에 쥐가 나고(김도훈), 눈앞으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는 육탄 방어(장형석)로 0-1로 끌려가던 경기를 기어코 1-1로 만들어냈다. 두 번 다시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용기, 이제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그들의 절박함, 가슴에 단 태극기를 부끄럽게 할 수 없다는 그들의 애국심이 이제는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평범한 승점 1점을 일궈냈다.
이번 대표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8년 전 그들의 선배가 보여줬던 근성 있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20만원짜리 택시를 타고 오슬로 밤거리를 새벽 2시까지 헤매는 수고스러움이 전혀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밤 10시가 됐는데도, 해가 저물지 않는 북국의 하늘을 뒤로하고 울레볼 경기장을 빠져나오며 든 생각이다. 모쪼록 우리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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