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침공 이후 미군 최악의 민간인 학살, 2005년11월19일의 재구성…매설 폭탄 터져 동료가 죽자 근처 민가 찾아다니며 24명을 쏴죽이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미 해병 당국자는 바그다드에서 북동쪽으로 140마일가량 떨어진 하디사에서 11월19일 도로매설 폭탄이 터져 현지 주민 15명과 미 해병 1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미 해병 대변인인 제프리 풀 대위는 이날 폭발이 해병 순찰조와 이라크군을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폭발 직후 무장괴한들이 해병대를 겨냥해 총기를 난사했으며, 총격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적어도 8명의 저항세력이 사살됐다고 덧붙였다.”
해병들의 침묵과 충격, 그뒤…
지난해 11월21일 가 전한 이라크 소식 가운데 하나다. 저항이 거센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 라마디 주둔 미 해병 당국의 발표 내용을 그대도 전한 이 기사에 새로울 것은 없다.
이라크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상’이 또 하루 되풀이됐다는 느낌뿐이다. 하지만 이 무미건조한 기사에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비밀이 감춰져 있다. ‘비밀의 문’은 지난 3월19일치 시사주간지 에 의해 열렸다. 도대체 2005년 11월19일 하디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의 첫 보도 이후 두 달여 만에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는 외신보도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토요일이던 이날 아침 7시15분께.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 북서쪽 하디사 마을 외곽도로에 미 해병 수색조를 태운 험비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 1사단 1연대 3대대 ‘킬로’중대 소속 병사들이 일상적인 정찰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차량은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리모컨을 이용한 강력한 도로매설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이 사고로 차량을 몰던 텍사스주 엘패소 출신 미구엘 테라자스(21) 상병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그의 동료 2명이 다쳤다.
폭발음이 울린 직후 사위는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해병대원들은 충격으로 얼어붙은 듯했다. 불타는 차 안에서 부상자를 끌어내리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누군가 분위기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중무장한 해병대원들이 폭발 현장에서 130여m 떨어진 이만 왈리드(9)의 집으로 향했다. 학살극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만은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어요. 그리고 가족 모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복해온 일을 했지요. 아버지는 쿠란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을 위험에서 구해달라고 신께 기도를 올렸죠. 어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와 두 오빠, 삼촌과 고모 등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거실에 모여 있었어요.”
미 해병대원들이 이만의 집으로 난입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한 해병대원이 영어로 뭔가 소리쳤고, 이어 병사들이 그의 아버지가 쿠란을 읽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총소리가 났다. 다시 병사들이 거실로 나왔을 때 잠옷 차림의 이만은 두려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병사들의 총부리만 볼 수 있었다. 미군은 이만의 할아버지 압둘 하미드 하산 알리(76)에게 두 차례 총격을 가했다. 처음엔 가슴에, 그 다음엔 머리에. 그의 사망기록에는 “가슴과 복부에 9발의 총알이 집중됐고, 이 때문에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쓰여 있다. 당뇨병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던 알리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렇게 참담하게 숨을 거뒀다.
부엌과 화장실까지 수류탄을 던지다
이어 이만의 할머니가 미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최후를 예감한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품속에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모두 죽어갔다. 이날 이만의 집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와 남동생 압둘 라흐만(5) 둘뿐이다. 희생자 가운데는 태어난 지 이제 두 달이 된 이만의 사촌동생 아시아도 끼어 있었다. 이만도 다리에 금속 조각을 맞았고, 동생 라흐만은 어깨 부위에 총상을 입었다.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며 심한 통증으로 힘겨워하는 사이 이라크인 병사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팔에 안겨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어린 이만은 울부짖었다.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한 이라크 병사는 “우리도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만의 집을 나선 해병들은 두 번째 ‘목표물’을 덮쳤다. 유니스 살림 카피프(43)의 집이었다. 카피프의 이웃에 사는 아우스 파흐미는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카피프는 미군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나는 친구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가족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미군들은 듣지 않았다.” 파흐미는 “미군은 무차별 총격과 함께 부엌과 화장실 등지로 수류탄까지 던졌다”고 말했다.
는 “사망진단서와 목격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카피프와 그의 아내 아에다 야신 아흐메드(41), 8살 난 아들과 14살에서 3살까지의 딸 5명, 카피프의 가족이 보살피고 있던 돌쟁이 여자아이 등이 이날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카피프 가족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는 그의 딸 사파 유니스(13)다. 무차별 총격이 시작되면서 기절했던 사파는 숨진 엄마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피범벅을 한 채 기절한 아이를 미군들이 숨진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란 게 이웃 주민들의 추정이다.
세 번째 집으로 들이닥친 미군들은 마르완·카흐탄·카시브·자말 아흐메드 사형제와 맞닥뜨렸다. 형제들과 떨어져 옆집에 살고 있던 유시프는 과 만나 “한참 아버지 집 쪽에서 총격이 계속돼 뛰쳐나와 보니 집 마당을 지키고 있던 이라크군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유시프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가까이 가려 하지 마라. 미군들이 당신도 죽일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튿날 아침 6시30분까지 미군은 아무도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유시프가 집 안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주검이 치워진 뒤였다. 그는 “하지만 바닥에 널려 있는 핏자국을 보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며 “미군들은 4명의 내 형제를 아버지 방으로 데려가 장롱 속에 가두고는 총을 쏴 죽였다”고 말했다.
‘의도치 않은 희생’이지만 전면 재조사?
이날 참극의 마지막 희생자는 인근 기술대학에 다니는 칼리드 아야다 자위 등 4명의 젊은이와 이들을 태우고 마을로 향하던 택시기사 아흐메드 카데르였다. 마을에 도착할 무렵 불타고 있는 미군 험비 차량을 발견한 카데르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차를 돌려 전속력으로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30m 남짓 떨어진 거리에 있던 해병대원들은 달아나는 택시를 향해 또다시 총기를 난사했다. 차 안에 타고 있던 5명 모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어느새 자오선을 지나고 있었다. 폭발 사건이 난 지 벌써 5시간여가 흐른 뒤였다.
이날 밤 자정 무렵, 미 해병은 24구의 주검을 인근 병원으로 옮겨왔다. 현지 병원 관계자는 등과 만나 “미군들은 거리에 매설된 폭탄의 파편에 맞아 숨진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가슴과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것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이튿날 한 젊은 언론학도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학살이 벌어진 집들과 주검안치소 등을 촬영했고, 이를 함무라비인권그룹에 전했다.
지난 1월 이 이들 화면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그다드 주둔 미군 당국에 제시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미군 대변인 배리 존슨 대령은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지난 2월14일 미 육군 그레고리 와트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하디사 현지로 급파돼 킬로중대원들과 생존자, 현지 의료진 등의 증언을 듣는 등 조사활동을 벌였다. 조사 결과 무고한 민간인이 미 해병대의 손에 죽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미군 당국은 하디사 사건이 ‘의도치 않은 희생’이었지, 킬로중대원들의 ‘의도적이고 악의에 찬 행동’에 의해 저질러진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사망자 가운데 일부는 총기를 소지한 저항세력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미군 당국은 조사 결과 무고하게 숨졌다고 판단한 희생자 15명의 가족에게는 1500~2500달러씩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부상자에게도 약간의 돈을 내줬다.
와트 대령의 1차 조사에 이어 미군 당국은 지난 3월 하디사 사건의 재조사에 들어갔다. 이번 조사에선 비무장 민간인 희생자의 정확한 규모와 함께 현장 지휘자들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킬로중대는 정기 순환근무 규정에 따라 이미 캘리포니아주로 귀환했으며, 미 해병당국은 킬로중대가 속한 3대대장 제프리 체사니 중령과 루크 매코넬 대위 등 중대 지휘관 2명을 직위해제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디사에 배치된 킬로중대원들은 저항이 가장 거센 팔루자 등지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경험한 노련한 병사들이 상당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킬로중대원들이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이유는 뭘까? 1968년 3월16일 베트남 쿠앙응아이 지역 선미 마을(미군 작전지도상의 이름은 ‘미라이’)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윌리엄 컬리 중위가 이끈 미 육군 아메리칼사단 11연대 찰리중대는 마을에 들어가 노인과 여성, 어린이와 신생아까지 50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일부는 고문이나 성폭행을 당했으며, 미군은 주민 수십 명을 한 구덩이에 몰아넣은 뒤 ‘처형’하기도 했다. 불의한 전쟁에 동원된 겁먹은 병사들이 저지른 참극이었다.
베트남의 미라이를 아시는가
유엔헌장과 헤이그인권선언, 제네바협정 등 국제법은 전쟁 중에도 민간인이나 비무장한 이를 살해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이를 어기는 것은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하디사 학살극에 가담한 해병들과 이들의 지휘관은 미군 당국의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으로 보인다. 미 의회도 군의 조사 보고서가 나온 직후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청문회를 열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라크 침공 이후 최악의 민간인 학살극이 드러났으니, 군 지휘체계 전반에 대해 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전에 암묵적 동의를 표했던 미 국내 여론에 불을 댕겨, 대중적인 반전운동의 뜨거운 함성으로 이어졌다. ‘하디사는 아랍어로 미라이’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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