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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을 생산하는 수사공장

등록 2006-05-26 00:00 수정 2020-05-03 04:24

박석안 전 서울시 주택국장 자살로 되돌아보는 검찰 특수부 수사 관행… 교묘한 언어폭력을 통한 심리적 압박에 “제도 개선 필요” 한 목소리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eyeshoot@hani.co.kr

“조사하면 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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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2TV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범죄의 재구성’에서 가장 자주 튀어나오는 말이다. “‘최면수사, 심리수사 등 온갖 수사 방법을 동원해보지만 결국 검사가 기대는 것은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호통뿐”이라는 설정은, 이 코너의 인기 비결인 동시에 현실의 역설적 반영이다. 검찰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석안 전 서울시 주택국장 사건이 검찰 특수부 수사 과정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도드라지게 하고 있는 국면이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폭력·밤샘조사에서 수모 주기로

박 전 국장이 실제로 자살 충동을 일으킬 정도의 강압수사를 받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또 자살의 이유가 숨기고 싶은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서였는지, 아니면 수사의 폭력성에 있었는지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검 중수부도 사안이 지니는 폭발성 때문인지 박씨를 조사했던 수사팀에 대한 감찰 조사조차 벌이지 않겠다는 ‘무시 전략’을 채택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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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씨 유족과 지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수사 도중 폭언에 가까운 말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꾸며냈다고 하기에는 발언의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당신이 부이사관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 “처남과 한방(감방)에 넣어주겠다” 등이 거론된 폭언의 내용이다. 이 정도가 자살할 정도로 심한 ‘언어폭력’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상당한 모멸감을 받을 수준인 것만은 틀림없다.

검찰 안팎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특수부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를 압박할 때 주로 사용해온 ‘언어폭력을 통한 심리적 압박’ 방식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 정부 들어 검찰수사 도중 자살한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 등이 무려 9명에 이른다는 통계 역시 개선책 마련의 필요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80년대는 물론이고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검찰청 특수부 검사실에서 검사나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임을 내세우는 정치인 가운데 일부는 “슬리퍼로 피의자 뺨 때리는 데 탁월한 특기가 있었다”거나 “욕을 퍼부으면서 피의자를 때릴 때 보면 깡패인지 검사인지 알 수 없었다”는 평가를 현직 검사들로부터 듣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직접적인 폭력 행사가 어려워지면서 특수부 수사에서 애용된 피의자 압박 방식은 자존감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는 방법이었다. 몇 시간씩 벽을 보고 서 있도록 한다거나, 잠을 재우지 않는 식이었다. 재계 인사와 정치인들을 주로 다루는 검찰 특수부만의 노하우였던 셈이다. 특수부 수사관 출신의 한 인사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보통 주위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던 이들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수모와 모멸감을 주면 한순간에 넘어가 자백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육체적으로 힘들면 심리적으로도 약해진다는 점을 이용해 일부러 밤샘조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밤새 힘들어하다가 아침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녘에 얘기가 술술 풀려나왔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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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사 절차의 투명성과 적법성을 강조하는 검찰 안팎의 분위기로 수년 전부터는 밤샘수사조차 쉽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특히 2002년 서울지검 강력부에서 수사관들의 구타로 조사 중이던 피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런 분위기는 대세로 굳어졌다. 어떻게 해서든 피의자들을 압박해 범죄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수사 주체들로서는 언어폭력과 심리적 압박 등 더욱 교묘한 방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수사관이 공포 조성하고 검사는 간접 지시

최근 서울지검 특수부의 수사를 받은 ㅇ씨는 “한마디로 교묘하게 진을 빼 무너뜨리는 방식을 쓴다”고 말했다. 구속된 상태에서 검찰 수사를 받았던 그가 구치소에서 검찰청사로 불려나온 시간은 오전 9시 안팎. 그러나 그는 매일 무려 10시간 정도를 대기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야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나를 도덕적으로 몹쓸 놈으로 만드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툭하면 하는 말이 ‘당신 같은 조무래기는 신경 안 쓰니까 우리가 원하는 이름을 불어라’는 것이었고 수사관들은 혼잣말을 하면서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등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난 상태다.

현직 검사들과 검찰 수사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언어폭력이나 심리적 압박은 주로 검찰 수사관들이 직접 하고, 검사는 뒤로 빠져 간접적인 지시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검사들은 수사관들이 피의자에게 가하는 강한 압박을 소극적으로 방치하거나,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수도권 특수부에 근무하는 한 현직 검사는 “뇌물 사건의 경우 요즘엔 계좌추적의 가능성을 피의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검은 돈은 현금 형태로만 오간다”며 “물증은 없고 관련자들의 진술만 있는 요즘 뇌물사건에서 피의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지도 못한다면 수사를 하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조건 고위층을 잡아야 한다’는 특수부 수사팀의 공명심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대검 중수부 사건 수사 과정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를 변호 중인 한 변호사는 “최근에도 직접 대검 중수부 소속 검사한테 불려가서 ‘고위 경제관료를 지낸 아무개를 불도록 피의자를 좀 설득해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기도 했다”면서 “변호사에게 이럴 정도니 피의자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엄청날 것”이라고 말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냐’는 식으로 한 사람을 낱낱이 파헤치는 방식의 포괄수사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백승헌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는 “검찰총장이 사실상의 주임검사가 될 수밖에 없는 대검 중수부의 특수수사가 적절한 내부 통제를 가로막는 요인이 돼 인권침해 사안이 터져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측면이 크다”며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검토됐던 대검 중수부 기능 축소 또는 폐지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강압수사 없다” 오만한 앵무새 발언

사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말은 지극히 오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적일 수도 있는 표현이다. 그건 ‘조사 방법이 과학적이니까 당신의 범죄 사실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어’라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신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도로 궁박한 처지이고 당신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당신의 심리 상태까지 우리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라는 뜻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강압수사는 없었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기 전에 검찰이 곱씹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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