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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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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멕시코로 갑니다”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FTA의 실태를 확인하러 떠나는 정태인 전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차기 정부의 청문회에 서지 않으려면 허황된 보고서 올리는 사람들부터 자르십시오

▣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안녕하십니까? 정태인입니다. 만나뵙고 말씀드리는 게 예의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지난해 2월1일 아침을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저도 잊어버렸다가 검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그날을 되새겼으니 말입니다. 아침 공기가 여전히 쌀쌀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는데, 사저에 들어서자 권양숙 여사께서 어린아이와 즐거움만 가득해 보이는 놀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누구 아이인지 여쭸고 친손주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통령님. 한-미 FTA는 남은 임기를 훨씬 넘어 아이들 세대를 거쳐 손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대통령께서 책임지려 해도 책임질 수 없는 일입니다.

화학·의료 분야에 타격 심할 것

물론 대통령께서도 너무나 잘 아시는 얘깁니다. 제가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리다 결국 설득을 당해 국민경제비서관으로 가겠노라 항복한 2월1일 당시만 해도 대통령께서는 그런 문제를 절실하게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날 대통령께서는 네 가지 부탁을 하셨고 그중 하나가 한-일 FTA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이걸 그냥 해도 되는지,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올 지경”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 믿지 못하겠다. 정 비서관이 한 번 더 꼼꼼히 챙겨보라”고 지시하셨죠. 그때 저는 “한국의 산업발전 전략, 포괄적으로 경제발전 전략을 먼저 정립하고 한-일 FTA가 그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거기에 맞춰 양허안도 마련하고 협상도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그 방향에서 8개 기관, 연인원 100여 명을 동원해 방법론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사건으로 그만둔 뒤에도 연구는 계속됐고 10월 말께 완성됐습니다. 꼼꼼히 하려 한다면 연구만 적어도 8~9개월이 걸린다는 얘깁니다. 이미 100여 권에 이르는 연구가 있는 상태에서도 그랬습니다.

한-미 FTA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는 보고를 받으셨겠지요. 달랑 세 편, 그것도 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들입니다. 한-미 FTA로 7.75%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올라간다는 전망은 경제학자가 아닌 장삼이사가 보더라도 어불성설입니다(또 하나의 보고서는 중력모형을 사용한 것인데 한-미 FTA를 시행하면 130억달러 정도 무역수지가 개선된다는, 역시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한-미 FTA라는 외부 쇼크를 맞은 뒤, 우여곡절을 겪어 자본과 노동이 완전 고용되는 균형 상태가 오면 그 이후에는 (다른 외적 변수가 없는 한) 우리의 실제 GDP 더하기 7.75% 해서 약 11~12%의 성장을 매년 계속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물론 ‘계산가능 일반균형’(CGE) 모델의 절대수치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경제를 잘 안다는 부총리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앞으로 우리 경제가 11~12%의 성장을 하게 된다는 허황된 말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아무리 신중하게 판단한다고 해도 이미 판단 자료가 편향돼 있는 만큼 대통령께서는 ‘볼테르의 팡글로스 박사’(볼테르의 풍자소설 <깡디드>에 나오는 인물로 근거 없는 낙관론자. 경제학에서 ‘팡글로스 밸류’라는 것은 가장 낙관적으로 부풀려진 수치를 의미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읍참마속이든 일벌백계든 해서 그릇된 정보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합니다.

한-일 FTA로 타격을 받을 업종이 기계·부품 산업이라는 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 참여정부에서도 여러 번 대책을 보고받으셨습니다. 물론 한-일 FTA 보고서에서도 또 강조하고 있지요. 그럼 한-미 FTA로 타격을 받을 산업은 어떤 분야일까요? 지금 대통령께서 딱 떠오르는 게 없다면 보고를 받지 않으신 것이고 제가 알기로는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 그 업종은 화학·의료, 특히 제약일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통계상으로도 이 업종의 민감도는 엄청나게 높이 나왔을 겁니다. 어떤 대책을 세우셨나요? 산업자원부나 산업연구원의 보고를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서비스업의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건 또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건지 보고를 받으셨나요?

현재 보도된 근거로는 대통령께서 “국민을 믿는다”, 경제보좌관이 “교포를 보라. 서비스업에서 성공했다”는 말밖에는 없습니다. 사실상 근거가 없는 얘기입니다. 대통령께서도 잘 아시는 우리나라 최고의 금융전문가 중 한 분은 금융에서 크로스보더(영역 넘나들기)가 허용되면 신상품 개발 등 모든 기획 기능은 미국의 금융계가 하고 우리 금융권은 지점보다도 못한 연락사무소 역할을 하면서 수수료나 챙기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고 걱정합니다(실제로 멕시코의 경우 예금의 80%를 미국계 은행에서 챙기고 있습니다). 그나마 고용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얘기죠. 이미 10여 년 개방을 해서 면역력이 생겼다는 금융도 그런 것이 현실입니다.

효과는 다음 정부에서 나타날 것

대통령께서도, 유시민 장관도, 또 김종훈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도 “의료와 교육 시장을 개방해도 우리 의료체계나 공교육 체계는 건드리지 않겠다. 특히 강제지정제 폐지, 초·중등학교 개방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미국의 의료계나 교육계에서 그런 요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직 시장조사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봐야겠죠. 그러나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재경부가 교육과 의료 기관의 영리법인화를 줄기차게 외쳐온 지 이미 10년 가까이 되고, 외국인 학교나 병원을 끌어들이려고 갖은 특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외교부도, 대외경제정책연구원도 공식 문건에서 싱가포르 사례를 들고 있지요. 심지어 대통령께서 참여정부의 보고서 중 최고라고 상찬한 국민경제자문회의의 1월 보고서에도 ‘강제지정제 재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께서는 이런 주장이 한나라당의 신앙에 가까운 전매특허라는 것도 잘 아시고 계십니다. 한-미 FTA의 효과는 참여정부가 아닌, 다음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나 보건복지부 장관이 임기 중에 공공성의 훼손을 힘겹게 막아낸다 해도,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관료, 재벌, 그리고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삼각동맹 체제는 이제 한-미 FTA의 규정을, 국제적인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제 갈 길로 갈 겁니다. 한-미 FTA에 포함될 미국 BIT2004는 투자에 관한 모든 규제를 무력화할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

퇴임한 대통령이 그걸 어떻게 막겠습니까. 대통령께서는 둑에 손가락 하나 정도의 구멍을 내신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결국 차기나 차차기 정권에서는 둑이 무너지듯 공공성은 여지없이 훼손될 겁니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대통령 당선자의 허락을 받아 중지시킨 네트워크형 공기업의 민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삼각동맹은 줄기차게 한전 등의 민영화를 주장해왔습니다. 이제 한-미 FTA는 그 길을 활짝 열어놓을 겁니다. 불과 2년 반 만에 소신이 변한 건가요? 설마 ‘내 임기 동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지요?

맨 앞에 손주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 손주가 돈이 없어 감기 정도는 그냥 앓아버리고 말기 바라십니까? 제 과장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전 노동부 장관 로버트 라이시의 <미래를 위한 약속>을 읽어보십시오).

도대체 달러라는 기축통화도 없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도 없이, 하버드와 같은 세계의 인재 흡수 기관도 없이 어떻게 미국형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고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경제학에서는 경제제도의 수출가능성 문제(exportability problem)라고 해서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낡은 일본형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개조하는 게 우리의 살길이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썼더군요. 그가 과연 알고나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유형이 우수한가에 대한 평가는 학자마다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앞으로 동북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고, 이 지역의 경제모델이 세계의 표준이 됩니다. 이미 한계를 보일 대로 다 보이고 군사력밖에 의존할 데가 없는 붕괴 일로의 미국형 제도는 결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닙니다. 지금 정부가 하는 일은 난파선에 스스로 올라타는 격입니다.

동북아의 꿈이 사라집니다

한-미 FTA로 동북아의 꿈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고민해보셨는지요? 물론 중국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중국위협론이 급작스레 부각되고 “중국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지만 미국은 아니다. 정반대로 미국형으로 개조하는 것이 살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기, 적어도 엄청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청와대에서 하고 있는 건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혹시 한-미 FTA가 남북관계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오히려 한-미 FTA가 전략적 유연성과 함께 중국과 북한의 연계만 강화시킬 뿐 국민의 정부 이래로 공들인 우리의 노력마저 수포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섭니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강화되고 이에 대응해 북-중-러 삼각관계가 돈독해지면 이런 걱정은 단순히 기우에 그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대통령 말씀대로 우리가 살려면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국민이 스스로 참여하는 자발적 개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루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런 개혁만 지속 가능합니다. 외부 쇼크에 의한 개혁은 결코 아닙니다. 혹여 성공할지라도 그 쓰나미에 휩쓸려 생명마저 잃어버릴 수많은 약자들의 신음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으시나요?

원론으로 얘기한다면 양극화는 외적 변화에 대한 사람 또는 집단의 대응능력의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구조적으로 본다면 금융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 단계의 세계화, 정보 격차, 노동시장 유연화, 그리고 부차적으로 중국 쇼크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한-미 FTA는 그 경향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마지막 ‘자비의 일격’(coup de grace)입니다. 빨리 맺을수록, 미국이 주장하는 ‘골드스탠더드’가 될수록 그 타격은 심각해질 겁니다. 우리 경제가, 사회가 안락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시겠죠.

<조선일보>는 제가 대통령의 변화(‘후반기 노무현’이라고 표현하더군요)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3년간 특별하게 세상이 변한 게 없는데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사상이나 정책 기조가 그리 쉽게 바뀔 수는 없습니다.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대통령의 참모였던 사람으로서 몇 가지 건의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첫째 낙관적 보고만 올라오게 하는 현재의 분위기를 바꿔야 합니다. 대통령의 신중론 한마디, 그릇된 보고자의 문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둘째,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동안의 절차에 관한 모든 걸 공개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4월25일 국회 토론회에서 대외경제위원회 제1차에서 6차까지의 자료와 토론 내용, 그리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CGE 모형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공식으로 자료를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정부 참석자들도 이에 대응해 스스로 공개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현재처럼 한-미 FTA를 추진한다면 지극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대통령께서는 차기 국회의 청문회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의 문제는 차기 정부에서 터져나올 것이고 당연히 그들은 문제의 뿌리를 현 정부의 협상에서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투명하게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공공성 훼손 조항은 미리 못을 박아야

셋째, 우리의 전략을 밝혀야 합니다. 협상에 필요한 세세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경제와 사회의 발전 방향이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킬 것인지, 어떤 쪽은 포기할 것인지 방향을 알아야 국민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조업은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화학·의료 등 민감한 산업의 대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넷째, 이미 동북아 위에서 금융전문 대학원, 물류전문 대학원, 외국인직접투자(FDI) 대학원 등으로 단초를 마련한 일이지만 시급하게 서비스업의 고급인력을 키워야 합니다.

다섯째, 중국의 서비스 시장 개방에 대비해 전략적인 외자유치, 국내 서비스산업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미국 기업에 대한 무조건 개방이 능사가 아닙니다. 서비스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도하개발어젠다(DDA)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여섯째,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에 비춰봐도 그렇지만, 한-미 FTA가 맺어지면 일반적인 산업정책은 불가능합니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 클러스터 정책입니다. 지역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문제는 WTO에서도 인정하는 바이고, 내외자를 차별하지 않고 특혜 없이 네트워크 외부성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용한 정책입니다. 현재의 지역균형 차원의 클러스터 조성 정책을 수정해 그중 두세 개는 내셔널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곱 번째, 공공성을 훼손할 수 있는 조항은 FTA에 명시해 미리 못을 박아놓아야 합니다. 당장 미국이 제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면 언젠가는 BIT2004의 투자조항에 따라 하나하나 문제가 될 겁니다. 의료나 교육, 공기업 민영화의 특정 분야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협정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의 속도는 가능한 한 늦춰야 합니다. 지금 정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최강국과 협상을 하는 겁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바람직하기로는 FTA 협정의 체결을 차기 정부의 검토까지 거친 뒤로 미뤄야 합니다. 대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반영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합니다.

대통령께서 이 글을 볼 즈음, 저는 멕시코에 있을 겁니다. 이 편지의 제목을 “멕시코로 갑니다”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죠. 물론 멕시코와 우리는 많이 다르지만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특히 공공 영역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직접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제는 보고서를 쓸 수도, 써봤자 전달이 안 될 걸 잘 알기에 이 지면에 멕시코 보고서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부디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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