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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이여, ‘그녀들’을 잊지 말라

등록 2006-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민주노동당 의원이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에게… 환영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노무현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지 말기를

▣ 최순영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06년 4월1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한명숙 총리의 취임을 환영하고 축하한다. 총리와 나는 70년대 이후 30여 년의 인연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30여 년을 되돌아보면 감회가 새롭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누적돼온 비민주적인 사회 상황에서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경제개발과 수출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남기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1970년대 한국 노동운동사의 포문을 열었고, 1979년 YH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른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있었다.


YH 투쟁부터 모성보호법까지

한명숙 총리와는 민주화운동의 길 중심에 함께 서 있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당시 한국 사회에 산재한 갈등과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창설됐지만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중립적 중재자를 양성하는 데 실질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노동자·농민·여성·학생·종교의 다섯 계층으로 나누어 집중적인 중간집단 교육을 진행했다. 유신독재 정권이던 암울한 시대에 노동자 간부교육은 그 어디에서도 할 수 없었고 또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평소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듯이 말이다.

그때 총리는 여성 담당 간사였는데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했으며, 여성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진행했다. 나 역시 여성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총리는 또 16대 국회의원 시절에 모성보호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여성부 장관 시절에는 그 법을 성사시켜서 출산 뒤 3개월 유급휴가를 법적으로 확립시켜, 여성들의 사회 진출, 보육의 공공성 확립 그리고 한국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 총리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여성들의 삶을 변화 발전시킨 주역은 한 총리 자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층여성들이라는 사실이다. 소외되고 억눌려 있는 여성들의 가늘지만 힘찬 목소리가 없었다면 결코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4월21일) 1979년 YH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흡사한 장면을 보았다. 어제부터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밤새 점거농성을 하던 KTX 여승무원들이 강제연행되는 모습이었다. 또 현대하이스코,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경찰의 강제진압이 진행되었다. 기본 생존권을 요구하는 절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게다가 현 정부는 대규모 산업 피해와 국민 고통을 가져올 수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있다. 한-미 FTA 협상 개시를 둘러싸고 불거지고 있는 선결조건에 대한 합의 의혹과 한-미 FTA 연구보고서의 조작 의혹 등에 대한 국민적 검증 과정도 거치지 않고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인데도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비정규직 법안과 한-미 FTA에 대해 보여준 한명숙 총리의 자세를 보고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1970년대 엄혹한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의 길을 함께했던 한 총리의 모습이 아닌 노무현 정권을 대변해주는 듯한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만인지하의 여성 총리를 기대한다

여성계를 비롯해 모든 국민들은 첫 여성 총리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당당히 서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총리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세워 한-미 FTA에 대한 올바른 입장 정리와 함께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를 줄여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예로부터 총리를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한다. 그러나 총리에게는 만인지하(萬人之下)를 기대해본다. 오늘의 첫 여성 총리 탄생과 함께 우리의 역사 속에는 기존 남성들과는 달리 새로운 주장과 방식으로 새로운 행정을 열어간 진정한 여성 총리였다고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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