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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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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금리에 돈이 헤맨다

등록 2001-02-07 00:00 수정 2020-05-02 04:21

돈값 끝없이 추락하는 저금리시대 지속… 주식·채권에 자금 몰리고 부채 구조조정 바람

금리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국고채 금리나 시중은행들의 수신금리가 사상 최저수준이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해 12월 예금은행의 수신평균 금리가 5.95%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더니 올 들어서도 은행들은 경쟁적으로 수신금리를 끌어내렸다. 지난해 연말과 올 1월에 걸쳐 시중은행들이 적게는 두 차례, 많게는 4차례까지 수신금리를 내려 1년짜리 정기예금 고시금리가 연6.0%까지 떨어졌다. 은행에 1억원 일반예금을 든 사람한테는 불과 한달 사이에 1년기준 이자소득이 71만∼83만원이 준 셈이다.

게다가 이런 추세로 가면 예금금리가 곧 연5%대에 들어선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은행에 돈을 맡겨 예금이자로 생활하는 사람들로서는 날벼락이다. 연6%의 금리도, 사실 이자소득세 16.5%를 빼고 나면 실제 이자소득은 연5.1%밖에 되지 않는다. 올해 물가가 통화당국의 억제목표치 4%만큼 오른다고 가정하면, 은행에 돈을 맡겨봤자 남는 게 거의 없는 지경이 된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은행도 곧 유럽이나 일본의 일부 은행들처럼 소액 예금자한테는 이자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보관료를 받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점친다.

은행에 보관료 내는 날 오는가

은행들이 왜 이렇게 돈을 푸대접할까? 은행은 고객에게 받은 돈을 기업에 빌려주거나 채권이나 주식 같은 금융상품에 투자한다. 여기서 받을 때 이자와 자산을 운용할 때 이자의 차이(예대마진)로 먹고사는 게 은행이다. 그런데 고객이 싸들고 오는 자금을 마땅히 운용할 데가 별로 없다. 고객이 안전한 자금운용처를 찾아 은행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행들도 떼일 염려가 전혀 없는 국고채에 주로 투자해 고객재산을 운용해왔다. 이른바 안전한 ‘금리 따먹기’에 안주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 국고채 금리가 올 들어 연5%대에 진입해 예대역마진이 발생했다. 마땅한 자금운용처 없이 금고에 돈을 쌓아두고 있는 은행으로서는 찾아오는 예금고객이 반갑지 않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고채 3년물 금리가 연5%대에 머물고 부도 가능성이 없는 회사채 금리도 계속 떨어져 자산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각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최근 한달 동안 2∼3차례씩 수신금리를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수지악화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라는 얘기이다.

예금금리의 인하는 곧바로 은행들의 수지 개선에 도움을 준다.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8월 이후 지금까지 수신금리는 1.0∼1.5% 내렸으나 대출금리는 그대로이다. 얼마 전 중소기업은행이 우량기업에 적용하는 대출 우대금리를 0.3%포인트 내렸으나 다른 은행들은 아직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이 결과 은행들의 예대마진이 확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지난해 12월 말 현재 22개 예금은행들의 평균 예대금리차는 2.46%로, 외환위기 이후 최저수준으로 떨어진 지난해 8월의 2.34%보다 0.12%포인트 늘었다. 4개월째 증가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올 1월에도 예대금리차는 더 증가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에 들어가는 돈의 이자가 내려간 만큼 나오는 돈도 조금 시차를 두고 떨어지게 되어 있다. 아직 서민들이나 담보능력이 없는 중소기업들에는 저금리가 딴 세상 이야기로 들리지만, 알게 모르게 ‘저금리 효과’가 시나브로 퍼지고 있다.

우선 신용도가 높은 기업이나 개인들한테는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대출세일에 나서고 있다. 이미 일부 시중은행들은 일선 지점장들에게 우량고객에 적용하는 대출금리를 1% 이상 신축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주고 실질적인 대출금리 인하에 나서고 있다. 또 우량고객과 비우량고객간 대출금리 차등폭을 확대하는 전제 아래,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과거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기업들에 돈을 빌려주고 있다. 금고에 잠겨놓아 이자가 한푼도 발생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저금리 효과로 기업들의 돈가뭄 해갈

회사채발행을 통한 기업들의 자금조달에서도 저금리 추세는 대세이다. 국고채로만 들어오던 자금이 좀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회사채쪽으로 흘러들어 꽁꽁 얼어붙었던 회사채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3년짜리 A급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7.0%선을 깨고 6%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마땅한 자금운용처를 찾지 못한 금융기관들이 앞다퉈 채권을 찾으면서 우량 회사채는 물량 품귀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수요가 생기니까 A급 이하 회사채까지 시장에서 무난히 소화되고 있다. 지난 1월중 회사채 발행규모는 총 2조6200억원으로, 지난해 12월의 1조3600억원보다 두배가량 늘었다. 유통시장을 보면 지난해 12월 고작 2천억∼3천억원에 머물던 하루 회사채 거래량이 요즘에는 1조원을 넘나들 정도로 늘었다. 그만큼 수요기반이 든든해진 덕분이다.

투신협회에 따르면, 27개 투신사의 전체 수탁잔고가 1월중에 10조7천억원가량 늘어나 99년 11월 이후 13개월 만에 투신 수탁고가 150조원대에 새로 진입했다.

주식시장의 고객예탁금도 1월 한달 동안 3조원가량 늘었다. 한국은행은 은행권 수신금리가 안정적으로 5%대에 들어가면 240조원에 이르는 시중 부동자금이 제2금융권과 증권시장으로 대거 이동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은행권의 자금이 당장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올 들어 은행들의 저축성예금도 10조원가량 늘었다. 그만큼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있다는 증거이다.

주택시장에도 금리인하의 여파가 미치고 있다. 주택 매매시장은 아직까지 잠잠하지만, 임대시장에서는 전세가 강세를 보이는 반면에 월세는 급속히 위축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은행에서 싼 이자로 전세자금을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전세수요는 크게 늘어나는 반면에 전세 매물은 뚝 끊겼다. 집주인들이 전세보증금 목돈을 받아 은행에 넣어봐야 별 재미가 없기 때문에 월세를 선호하고 있다. 그렇지만 월세를 찾는 임대수요자들은 별로 없다. 그래서 서울 강남 일대와 분당, 일산 등 새도시에서 전세는 평형에 따라 최고 1천만원까지 올랐으나 월세의 경우 이자율이 월1.2∼1.5%에서 1% 이하로 떨어졌다.

발빠른 대응이 상책… 비싼 대출금 갚아라

이처럼 금리인하는 경제 전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특히 이런 추세가 일시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을 때에는 각 경제주체들이 발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벌써 눈치빠른 기업들은 금리하락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기존에 비싼 이자를 물고 발행한 회사채나 대출을 싼 이자의 새것으로 바꿔 금융비용부담을 대폭 줄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들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지난 97∼98년에 20%를 웃도는 높은 금리로 발행한 회사채를 갚는 대신에 10% 안팎의 금리로 회사채를 차환발행했다. SK, 제일모직, 제일제당, LG전자, 현대모비스 등이 이런 방식의 회사채 차환발행에 성공해 각각 수백억원씩의 금융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은행빚이 있는 개인도 마찬가지로 ‘부채구조조정’에 나설 때이다. 비싼 금리로 돈을 빌려 잔고가 많이 남아 있으면 얼른 싼 금리로 새로 대출을 받아 갚아버리는 것이다. 조흥은행 서춘수 재테크팀장은 “아직까지 모든 은행들이 대출금리의 연동기준이 되는 우대금리(프라임레이트)를 내리지 않았지만 일선 창구에 찾아가 상의를 하면 조정해준다”면서 금리가 1%포인트 이상 차이나면 발품을 아끼지 말라고 충고했다. 방식은 기존 대출금을 먼저 갚고 다시 대출을 받는 것이다. 이 경우 며칠 동안 필요한 목독을 마련해야 하는데, 각 은행들이 연9.0∼9.3%의 금리로 시행하고 있는 ‘리파이낸스 대출’을 활용하면 된다. 새로 대출을 받으면 대출금액의 1% 정도인 설정비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즘에는 이를 완전히 면제해주거나 한달분 이자를 면제해 설정비를 물지 않는 효과가 있도록 해주는 은행들이 많다.

저금리 추세는 저성장, 저물가와 맞물려 돌아간다. 부작용도 있다. 무엇보다 채권자에게는 아주 불리한 반면에, 빚꾸러기 기업이나 가계로서는 ‘햇볕’이다. 때문에 무분별한 차입경영으로 과잉설비를 안고 있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어쨌든 거품성정과 고물가를 배경으로한 두 자릿수 금리는 우리 경제의 견실한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대수익을 낮추고 저금리 시대에 적응을 해야 한다.

금융연구원 이명활 박사는 “통화당국이 경기진작을 위해 유동성을 지속적으로 여유있게 공급하고 있고 반면에 기업들의 설비투자 위축으로 자금수요는 정체되어 있어 올 상반기에는 금리하락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주요 업종별 대표기업 250개사를 대상으로 올해 시설투자계획을 조사해본 결과 34조4722억원으로 전년대비 0.3% 증가에 그쳤다. 신규투자가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수침체에다 금융·기업구조조정에 따른 불안감, 미국경제의 경착륙 우려 등으로 투자를 하기가 두렵다는 게 기업들의 반응이다.

은행을 벗어나 투자하고 소비한다

정부와 통화당국도 저금리 추세가 지속되고 은행고객이 주식이나 채권 같은 직접금융시장으로 발길을 많이 옮기도록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시중자금이 은행권으로 대거 몰렸지만, 자체 부실처리에 허덕여 자금중개기능을 소홀히 해 실물경제로 자금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금융시장을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면, 심장에는 터질 듯이 피가 고여 있는데 핏줄은 극심한 빈혈기를 보이는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돈을 가진 사람들은 은행의 중개기능에만 기대지 말고, 채권이나 주식시장에서 직접 자기책임하에 투자를 하라는 게 정부의 바람이다.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부동산에 눈을 돌려보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경기침체국면을 벗어나더라도 과거처럼 부동산값이 크게 오를 가능성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전망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 박사는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주택보급율이 95%를 넘는 단계에서는 부동산을 금융자산을 대체할 수 있는 투자대상으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저금리 시대에는 가계에서 목돈을 모아야 할 인센티브가 줄어 전반적으로 저축은 덜하고 여가와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소비를 늘리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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