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부자는 3대를 못 가는가

등록 2006-04-12 00:00 수정 2020-05-02 04:24

현대차, 2세 승계 땐 집안다툼하고 3세 땐 사회와의 충돌
…‘지분확보’집착 버리지 않는 한 정의선 사장의 미래는 없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아들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은 1970년 10월생이다. 만으로 치면 아직 36살도 안 된 그가 기아자동차 사장 자리에 오른 건 지난해 3월이었다. 1999년 현대자동차에 구매담당 이사로 입사해 3년 만인 2002년 전무에 오르고, 다시 3년 만에 현대·기아자동차그룹 주력 계열사 중 1곳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초고속 엘리베이트 승진이다. 여느 직장인 같으면 갓 과장 배지를 달 나이에 사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에선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아버지 잘 만난 복 아니냐’거나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게 모든 아버지들의 인지상정 아니겠느냐’는 식이다.

‘순환출자’라는 요술 방망이

이런 어설픈 사회적 통념과, 순환출자로 엮여 있는 재벌 체제의 특수성에 힘입어 현대자동차의 쾌속 질주만큼이나 고속 승진 가도를 달려온 정의선 사장이 위기의 나날을 맞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인 글로비스 비자금에서 시작된 현대차그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정 사장을 비롯한 총수 가문을 직접 겨냥하고 있어서다.

이는 경영권 승계 작업에 급제동이 걸렸다는 관측으로 이어진다. 정 사장은 계열사 사장직을 차지하고 있을 뿐 그룹을 틀어쥘 만한 지분을 확보하지 못했다. 검찰의 수사 대상은 정 사장의 지분 확보 과정에 얽힌 의혹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따라서 정씨 가문이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 세대로 지분과 경영권을 넘겨주는 애초 구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 3세 승계 과정의 무리수가 사회적 규범과 충돌해 그룹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모습을 보면 ‘부자 3대 못 간다’는 속담이 절로 떠오른다. 옛 속담은 부잣집 아들들의 헤픈 씀씀이를 비꼰 것이지만, 급속하게 압축 성장해온 재벌 체제에서 세대를 거칠수록 지분 확보 및 경영권을 유지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속성을 설명해주는 경구로도 유용해 보인다. 국내 재벌은 덩치를 급속히 키우는 과정에서 총수 가문의 지분이 묽어져 창업한 지 3세대쯤에 이르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영권을 쥐는 데 한계가 온다. 총수 가문의 지분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2세 승계 과정에서는 형제들 사이의 ‘집안 다툼’이 주류를 이루는 반면, 3세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는 ‘사회(법·제도)와 충돌’을 일으킬 개연성이 높아진다. 이는 삼성과 현대에서 실제로 벌어진 공통적인 현상이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현대차그룹은 SK그룹 다음으로 총수 일가의 지분이 적다”며 ”그러다 보니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 사정은 상위 재벌일수록 더욱 심하다. 두산그룹이 전형적인 사례다. 현대의 경우 (2세 형제간 다툼으로) 세 그룹으로 나눠 승계하면서 소유 구조가 흐트러졌다. 두산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가 사업을 급속히 확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대차그룹의 총수 일가 지분은 5%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다. 한국 경제처럼 재벌이 압축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사업을 확장하고 증자(자본금 증액)를 거듭한 결과다. 이는 다른 그룹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쥐꼬리만 한 지분을 갖고도 그룹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은 그동한 숱하게 지적돼왔듯 ‘A →B → C → A’식으로 계열사 사이의 순환출자라는 요술에서 비롯된다. 현대차그룹의 소유 구조를 보면, 정몽구 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 7.93%(2005년 말 기준)를 지렛대 삼아 계열사 간 순환출자라는 요술지팡이로 그룹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3세인 정의선 사장은 지렛대로 삼을 만한 지분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변칙적인 방법으로 설립한 그룹 계열 비상장사(글로비스 등)를 상장시키는 과정에서 얻은 차익 등을 통해 기아자동차 지분을 확보했지만, 아직 2%(2005년 말 1.99%)에도 이르지 못한 실정이다. 정몽구 회장의 지분을 아들에게 넘기는 방법도 뾰족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상속·증여에 따른 세금을 떼고 나면 남는 게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선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험난할 듯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에서 벌어진 비자금 조성, 회사 사업기회 편취 등 갖가지 불법·변칙적인 형태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의선 사장이 핵심 계열사의 지분을 쥘 수 있는 자금 마련의 발버둥’으로 여겨진다. 비자금 조성은 애초 부각됐던 글로비스(물류회사)뿐 아니라 그룹과 관련을 맺고 있는 다른 회사들에서 광범위하게 저질러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지난 4월4일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윈앤윈21, 윈앤윈21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 씨앤씨(CNC)캐피탈, 문화창업투자, 큐캐피탈홀딩스 등 5개 회사를 보자. 현대차그룹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회사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불법적으로 사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큐캐피탈홀딩스(당시 큐캐피탈파트너스)와 윈앤윈21은 2001년 말 현대차그룹이 기아차의 옛 계열 정밀종합 기계업체인 (주)위아(옛 기아중공업)를 인수·합병하며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 과정에서 600억원 이상 순이익을 낸 위아의 주식 694만 주(90.6%)를 큐캐피탈홀딩스(46.6%)와 한국프랜지(44.0%)로부터 주당 100원에 매입하는 등 7억원도 안 되는 돈으로 인수해 헐값 매입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윈앤윈21은 현대·기아차에 워터펌프와 오일펌프, 실린더헤드 등을 납품하는 ‘지코’를 자회사로 두고 있어 납품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이는 정씨 일가의 미미한 지분조차 자금 원천의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음을 보여주며, 정의선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작업이 험난할 것이란 관측을 낳게 한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세상이 바뀌었는데, 옛날에 하던 짓을 그대로 하니 문제가 된 것”이라며 “현대차그룹이 변한 환경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근본적으로 지분 확보를 통해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해법은 없고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경영권은 경영 역량을 통해 확보하는 게 당연한데도 총수로서 그에 상응하는 지분을 가지려는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비자금·분식회계·회사기회 편취·금융관련법 위반 같은 무리수가 나온다는 설명이다.’

‘사고의 틀’ 안 바꾸면 파열음 계속

국내 재벌의 전반적인 경영권 승계 형편을 보면, 대체로 창업자 3세로 넘어와 있거나 넘기는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이 가운데 그나마 안정적인 지배력을 확보한 곳은 지주회사 체제로 변신한 LG그룹 정도다. LG의 경우 창업자의 3세인 구본무 회장 일가가 지주회사인 (주)LG의 지분을 40% 가까이 확보하고 있어 지배력 유지에 별 문제가 없다는 평이다. 삼성의 경우 널리 알려져 있듯 3세(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 넘기는 과정에 있으며, 금융관련법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규범과 요란한 충돌음을 빚어내고 있다. 상위권 재벌에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한 형편이다. 3세 체제를 맞고 있는 국내 재벌들이 소유·지배구조를 단순·투명화하거나 지분보다 경영 역량으로 인정받겠다는 쪽으로 ‘사고의 틀’을 바꾸지 않고는 파열음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