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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는 로비스트로 등록하라?

등록 2006-04-12 00:00 수정 2020-05-02 04:24

‘고문’이라는 모호한 이름 달고 변칙적 로비 활동 벌이는 전직 고위관료들… 밀실에서 이뤄지는 뒷거래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시 이뤄지도록 법 바꿔야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미국의 전 법무장관 애슈크로프트는 로비스트다. 지난해 9월 로비스트로 등록한 뒤 20곳이 넘는 기업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뛰고 있다. 2004년 선거가 끝난 뒤 2기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옷을 벗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3만5천여 명의 다른 로비스트들처럼 어느 회사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그의 활동 내역은 비교적 상세히 공개된다.

한국의 이헌재와 미국의 애슈크로프트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법무법인 김&장의 비상임 고문이다. 이 전 장관의 이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로비스트 김재록씨와의 인연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씨가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당시 이 전 장관은 론스타의 법률 대리인인 김&장의 고문이었다. 아직까지 이 전 장관이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본인이 부인하는데도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는 의구심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헌재와 애슈크로프트의 활동엔 둘 다 고위 공직자이면서도 큰 차이점이 있다. 투명성이다. 미국인들은 애슈크로프트가 무슨 활동을 하는지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알 수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헌재가 누구를 위해 무슨 활동을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 전 장관이 많은 기업의 인수·합병에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김&장의 고객을 위해 하는 일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셈이다.

현재 이 전 장관을 비롯해 많은 고위 관료들이 공직에서 물러난 뒤 대형 로펌(법무법인)과 회계법인에 들어가 고문을 맡으면서 국내외 자본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활동이 흐릿하게나마 외부에 알려지게 되는 것은 겨우 무슨 무슨 게이트가 터져나왔을 때다. 이들은 공직에 있으면서 만든 네트워크와 영향력, 노하우를 갖고 일상적으로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이나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상 ‘로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로비활동을 공개하거나 감시하는 장치는 전무하다. 정부 상층의 의사결정권자들과 ‘핫라인’을 통해 접촉이 언제든 가능한 이들이 마음껏 활동하고 다닌다 해도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기 마련이다. 같이 밥을 먹고 골프를 치고 술을 마시면서 소속 로펌이나 회계법인 고객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같은 로비 활동을 좀더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시하자는 움직임은 게이트의 역사만큼이나 꽤 오래됐다. 미국은 1938년 외국 로비스트 등록법을 제정한 이후 로비 활동과 관련된 법을 계속 고쳐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1년 정몽준 의원이 처음으로 ‘외국대리인 로비활동 공개에 관한 법률안’을 상정했다. 그러나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 들어서 재상정됐다. 이승희 민주당 의원도 ‘로비스트 등록 및 활동 공개에 관한 법률안’을 지난해 8월 국회 법사위에 제출했다. 그사이 ‘이용호 게이트’ 등 크고 작은 ‘불법’ 로비들이 숱하게 불거졌다.

만약 로비스트 관련 법률이 통과된다면…

이승희 의원은 “로펌이나 회계법인에서 고문이나 자문을 맡은 전직 고위 공직자들이 로비스트라고 부르면 펄쩍 뛰겠지만, 사실상 이들이 고문이나 자문이란 모호한 이름을 달고서 변칙적으로 로비 활동을 하고 있다”며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로펌에 소속된 전직 차관 출신이 고위 공직자와 골프를 치면서 어떤 정책과 관련돼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암흑의 정글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투명한 게임의 룰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이 의원의 입장이다. 로비 활동 공개의 원칙은 정몽준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률안에서도 공통된다. 두 법안 모두 미국의 예를 따라 로비스트가 법무부에 등록한 뒤 6개월마다 활동 상황을 법무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수준의 로비스트법이 통과되면 김재록씨나 이헌재씨나 먼저 로비스트로 등록한 뒤 자신의 활동을 공개해야 한다. 정부 및 공공기관의 정책결정 과정이나 집행, 국회의 입법 과정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공무원을 대상으로 로비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할 경우엔 로비스트로서 등록할 필요가 없다. 일단 등록한 로비스트는 이승희 의원의 법안대로라면 10만원을 초과하는 지출 거래를 항목화해 대상 공무원과 의뢰인의 이름, 지출 총액, 지출 발생일, 로비 활동 목적을 작성해 6개월마다 한 번씩 법무부에 보고해야 한다. 따라서 김재록씨가 2000년 9월 시드니올림픽에 이헌재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 등을 부부 동반으로 무료로 참관시킨 것도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지기 이전에 공개됐을 수 있다. 또 외환은행 매각 당시 김재록씨가 만난 정책결정자들의 이름이나 김씨의 활동 윤곽도 드러났을 것이다. 이 전 장관의 경우에도 로펌의 고문으로서 공무원들을 만나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로비스트로서 자신의 활동을 투명하게 드러내야만 했을 것이다. 론스타 등 외국 자본의 대리인들의 활동도 마찬가지다. 물론 ‘법률이 통과됐더라면’을 근거로 가상해본 것에 불과하다.

현실은 로비 활동이 공무원에게 금품이나 향응 등 뇌물을 제공했을 경우를 빼곤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향력 행사하려는 욕구는 당연한 것

그렇다고 로비스트법이 능사는 아니다. 법이 모든 뒷거래를 차단할 순 없는 노릇이다. 미국에서도 최근 아브라모프 스캔들처럼 수시로 불법 로비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로비 활동을 공개할 경우 돈이 많은 쪽이 막강한 로비력을 지닌 로비스트를 독점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로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대중적 인식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법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승희 의원은 “기업이나 단체의 처지에서 보면 정책결정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알리고 이해를 관철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구를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당연한 것이다”며 “오히려 그것을 비정상적으로 틀어막아 놨기 때문에 김재록씨 사건 등이 터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음성적인 경우에 돈이 훨씬 더 큰 위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로비 합법화로 인한 부작용보다 지금과 같은 애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지난 8년 동안 로비를 관리 감독하는 법률안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종금 정·관계 로비, 이용호 주가 조작 로비, 옷 로비 등 5건의 불법 로비를 조사하는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로비스트법 제정이 바람직하고 필요한지 여부를 떠나서 로비 활동의 공개화와 투명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밀실에서 이뤄지는 뒷거래를 최소한 무슨 주제로 누가 연출하고 출연하는지라도 알 수 있는 공개 무대로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앞으로도 불법 로비 조사를 위한 법률안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더욱 많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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