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 복원을 꿈꾸는 현대중공업 선후배 노동자들의 한숨섞인 좌담
노조에선 사건해결 의지 없어… 개인 책임으로 몰고 가는 건 막아야
▣ 사회·정리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민주 노조 복원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든 현대중공업(이하 현중) 노동자들은 지쳐 있었다. 그들은 ‘강경 투쟁’과 ‘사태 관망’의 양 극단에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흔들렸다. 젊은 노동자들은 “당장이라도 광장에 모여 싸워야 한다”고 말했지만, 늙은 노동자들은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전력으로 싸워 지고 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말했다. 현중 노조가 ‘87년 여름’의 활력을 잃은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다. 2002년 노조 간부의 비리 파문으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을 때까지, 민주 노조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겨우 생명을 이어왔다. 노동자들은 “이대로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며 떨쳐 일어났다. <한겨레21>은 민주노조 복원을 꿈꾸는 선배 노동자들의 모임인 ‘전진하는노동자회’(전노회)의 김형균(43·의장생산부) 의장과 정병모(51·특수선생산부)씨, 후배 노동자들의 모임인 ‘청년노동자회’(청노)의 강창원(36·도장2부), 남정대(38·배조립5부)씨 등을 3월8일 만나 노조 비리 사태를 바라보는 그들의 고민을 들어봤다.
사회 어용 노조 비리 파문으로 회사 안팎이 시끄럽다. 일반 노동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김형균(이하 김) 이번 사건의 핵심은 어용 노조의 핵심 세력인 ‘노동자민주혁신투쟁위원회’(노민투) 간부들이 2003년 입찰 심사 때 돈을 받고 다른 업체 쪽 입찰 자료를 빼돌려 특정 업체 밀어주기를 했다는 것이다. 노민투 비리가 ‘카더라’ 통신으로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청노 쪽에서 3월8일 “현 집행부는 즉각 사퇴해야 한다”는 내용의 홍보물을 만들어 아침 출근길에 노조원들에게 뿌렸다. 노동자들은 당연히 큰 충격을 받았다.
끌어내야 하지만 힘이 없어 답답
남정대(이하 남)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복합적이다.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고, “날강도 같은 놈들 두들겨 잡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현장의 노동 통제가 강압적이어서 속깊은 얘기를 좀처럼 털어놓지 않는다. 나 같은 경우만 해도 회사 쪽에 찍혀 장소를 옮겨다닐 때마다 반장이 따라붙는다. 2002년 비리 사건으로 민주 노조도 내려앉은 선례가 있기 때문에 “다 똑같은 놈 아니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다.
강창원(이하 강)비슷하다. 우리 부서는 다른 부서와 다르게 현장이 많이 장악돼 있다. 노조에 관심이 있어도 나와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찍힘의 대상이 된다. 쉽게 말은 못하지만, 밥 먹는 자리에서는 “집행부가 당연히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 너희는 뭐하고 있냐”는 말을 듣는다. 노조에 관심이 없는 1994년 이후 입사자들은 내색을 안 하지만, 87년 투쟁을 경험했던 선배들은 분노하고 있다.
정병모(이하 정)사건이 터지자마자 “(현 집행부를) 끄집어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힘이 없어 답답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길외부인인 기자는 비리 파문이 터진 뒤 현 집행부가 당연히 사퇴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어용 노조는 절대 자진 사퇴 같은 건 안 한다. (웃음)
강비리 사건으로 노조 사무실이 압수 수색되는 초유의 사건이 터졌지만, 노조 집행부 쪽에서는 이번 사건을 ‘개인 비리’로 몰고 가려 하고 있다. 위원장은 “자체 진상조사위를 꾸리겠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보인 <참붓언론>을 통해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다”라고 벌써 결론까지 내놓고 있으니 사건 해결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남참다 못한 청노 쪽에서 오늘 홍보물을 뿌렸다. 대부분 “시원하게 말 한번 잘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홍보물을 보고 또 보며 분노했다. 회사 쪽 경비대 사람들이 우리가 뿌린 홍보물을 걷어들이는 모습도 목격됐다.
여기서 또 밀리면 희망이 없다
정우리가 20대였으면 파이프 들고 노조 사무실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청노도 ‘청년’이라고 말은 하지만, 대부분 30대 후반이다. 40~50대인 전노회는 그만큼도 움직이지 못한다. ‘12년 무파업 신화’에서 보듯 노조의 투쟁 동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동안의 패배의 경험에서 드러나듯 “함부로 나섰다가는 뒷감당하기 힘들다”는 패배주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2002년 때의 아픔도 있어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다 똑같은 놈들 아니냐”는 쪽으로 논의가 흐르면 싸움은 ‘이전투구’가 된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답답하겠지만, 선배들이 망설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남그렇지만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까지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도대체 우리가 지금까지 움직인 게 뭐냐. 보도된 기사를 복사해서 조합원들에게 돌리고, 홍보물을 복사해 출근길에 뿌린 것밖에 없다. 싸우기 힘든 사람들은 빠지고, 투쟁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뭉쳐 싸워야 한다. 전노회 쪽에서는 “조합원들에게 (비리 사건을) 사실 그대로 알린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행동에만 나서겠다고 했는데, 이해하기 힘들다.
김남 동지의 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얼마 남지 않은 활동가들을 다시 한 번 깨고 가면 과연 몇 명이 남겠는가. 더디고, 조심스럽고, 답답하겠지만 이게 지금 우리의 한계다. 2004년 박일수 열사 투쟁 때를 생각해보자. 나가서 싸울 사람들은 싸우고, 마음만 있으면서도 용기가 없었던 사람들은 그냥 남았다. 투쟁에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사람들과 어색함을 털기 위해 술 마시며 몇 달 동안 조직을 추스르느라 애먹었다. 결국 싸움에서 이긴 것도 아니었다. 지금 모인 우리가 겨우 서로 믿으며 투쟁할 수 있는 한 줌의 동력인데, 여기서 또 밀리면 희망이 없다.
길민주 노조의 투쟁 동력이 이렇게까지 떨어진 이유는 뭔가.
남선배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1987년을 경험한 선배들 세대, 그러니까 현중 노조가 처음 생길 때는 다들 혈기왕성했다. 또 그때는 투쟁을 하면 곧바로 얻어지는 성과들이 있었다. 그것은 물질적인 보상이기도 했고, 노동자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성취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1990년대 들어 회사 쪽은 고과, 승진 등을 미끼로 노조 활동가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선배들도 40대가 되면서 자녀 교육, 퇴직 이후의 삶 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사내 추천인 제도가 운동 싹을 잘라
김그리고 1987년 이후 10년 가까이 생산직 사원들을 새로 뽑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연결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사람을 새로 뽑을 때 사내 추천인 제도 같은 게 있었는데, 노조 활동을 시작하면 본인뿐 아니라 자신을 추천한 사람들에 대한 압박도 강해졌다. 사람들은 지쳤고, 젊은 피는 수혈되지 못했고, 운동의 전망은 사라져갔다.
강2002년 13대 집행부가 비리로 나가떨어진 것도 큰 문제였다. 그때도 노조가 큰 힘을 쓰진 못했지만, 적어도 비빌 언덕은 돼줬다. 조직이 없는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고립돼갔다. 어용 노조가 집행부를 구성하고 해고 노동자들을 정리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패배 의식이 만연해진 것 같다. 그래도 조직이 있을 때는 지원사격이 됐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다. 광활한 벌판에 혈혈단신으로 버려진 느낌이다.
길앞으로 투쟁은 어떻게 전개해나가야 한다고 보나.
김솔직히 이번 사건이 민주 노조 입장에서는 호재도 악재도 아니다. 저쪽의 반응은 뻔하다. 이번 사건을 구속된 ㄱ씨의 개인 비리로 몰고 가려 할 것이다.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ㄱ씨를 버릴 것이다. 같이 비리에 연루된 노민투의 핵심 간부 ㅂ씨는 ㄱ씨와 달리 구속되지 않았다. 이번 문제는 철저히 ‘어용’의 문제다. 투쟁의 초점은 그쪽에 맞춰져야 한다. 위탁업체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입찰심사 제도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는 추진돼야 할 일이지만, 큰 의미가 없다.
강=기본적으로 노조 비리가 계속 터지는 이유는 자본이 떡고물을 활용해 노동운동 세력을 길들였기 때문이다. 계급적 관점을 통해 자본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폭로해야 한다. 노조를 뺏기고 위축된 상태에서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이런 모습으로는 곤란하다.
남전국적으로 노조 비리가 계속 터지고 있다. 노조가 썩은 게 아니라 단련되지 못하고 자기를 정제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집요한 회유에 넘어가는 현상이라고 본다. 어찌 보면 이런 모습들이 기업별 노조의 한계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사태를 통해 앞으로 노동운동의 대안까지 고민하고 제시해야 한다. 자본에 철저히 길들여진 일본식의 노조 문화로 흘러가는 것을 끊어내야 한다.
내부 분열만은 끝까지 막아야
김솔직히 답답하다. 전노회 의장을 벌써 4년째 맡다 보니 옛날의 시행착오들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걱정이 태산이다. 문제가 불거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민감한 비리 문제다 보니, 외부의 힘을 빌려오기도 쉽지 않다. 그냥 우리 실력대로 싸워나갔으면 좋겠다. 싸우다가 내부에서 분열되는 상황만은 끝까지 막아야 한다. 싸우되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방향과 목적을 가져야 한다. 어용 노조는 절대 사퇴하지 않을 것이고, 회사도 이 집행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회사 쪽에서 검찰에 “이 집행부가 날아가면 울산의 노사 관계가 흔들린다”며 사건의 축소를 부탁했을 수도 있다. 20년 동안 싸움을 하다 보니 판이 보인다. 그렇지만 물러날 순 없다. 고민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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