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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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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만 보면 화가 나세요?

등록 2006-01-25 00:00 수정 2020-05-02 04:24

인권위가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발표하자 벌떼처럼 일어선 재계
“노사관계 개입 말라”는 비판은 국제법 원칙에 비춰볼 때 어불성설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인권이냐, 경제냐.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비생산적인 양자택일식 대립 논쟁이 인권 분야에도 번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발표한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NAP·National Action Plan·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동안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인권정책을 수립하도록 인권위가 권고한 것)을 둘러싼 재계와 인권위의 갈등에서다. 인권 분야 전문가들은 “이번 논쟁이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인권이라는 가치가 사회 운용의 주요 변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는 출발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회권’ 자리잡은 지 언제인데…

인권위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작심하고 이뤄지는 듯하다. 인권위 구성원들의 경력과 성향까지 문제 삼으면서 “인권위가 과연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조직인가” “인권위 안대로라면 기업을 계속하기 힘들다”는 등의 격한 반응까지 보이고 있다. “(재계가) 말 안 하고 참는다고 봐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시만 하더라”고 언급한 김영배 경총 상임부회장의 말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재계의 속내는 인권위가 기본계획에 공익사업장 파업에 대한 직권중재제도 폐지 등 노사관계와 관련한 제도를 포함시킨 데 대한 반응에서 드러났다. 경제5단체장은 이에 대해 “이상론에 불과하며 인권위가 노사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고 나섰다. 노사관계 관련 제도와 법에 인권의 가치를 반영하기 시작하면 노동 쪽의 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오래된 불안감이 현실화한 데 따른 격한 반응이었다. 재계는 “권고안이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서 ‘인권위 해체’까지 거론했다.

이에 대한 인권위의 반박 논리는 비교적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아직 인권위가 왜 생겼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 40여 개국에 있는 국가 인권기구의 제도적 의미를 한마디로 하면 국제 인권법과 국내법의 연결고리라고 요약할 수 있다. 개별 국가의 법과 제도가 국제 인권규범에 부족함이 있는지를 조사하고 부족하다면 그 수준에 맞춰나가도록 추동하는 구실을 인권위가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국가 인권기구가 국제 인권법을 실현하는 국내 기구의 성격을 지닌다는 원칙은 1991년 유엔인권위원회가 채택한 국가 인권기구 설립 원칙인 ‘파리원칙’에도 규정돼 있다. 이에 따르면 현대적 의미의 국가 인권기구의 전문적 기능은 3가지다. 즉, △인권에 관한 법·제도와 정부 정책에 대한 자문(권고) 기능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교육 기능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 기능 등이 그것인데 인권위가 이번에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을 만든 것은 첫 번째 기능이자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위는 이에 더해 노동권·교육권·주거권 등 이른바 ‘사회권’이 인권의 핵심적인 영역이 된 지 오래라는 점을 들어 “인권위는 노사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자본의 논리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또 이런 주장이 인권을 자유권 영역으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데로 귀결된다는 게 인권위의 설명이다. 한국은 특히 이 분야와 관련해 유엔의 권고를 여러 번 받은 바 있다는 점도 인권위는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1995년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는 (노동조합의) 단결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시민사회 안에서 ‘아마추어리즘’ 비판도

같은 위원회가 2001년에는 “한국에서 비정규직이 급증하는 현상과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함에도 임금과 연금 혜택, 직업 안정성 등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면서 비정규직의 권리 보장, 파업권 행사 노조에 대한 형사소추 중지와 교사·공무원의 단체교섭권과 파업권 보장 등을 권고하기도 했다. 또 필수 공익사업장에 대한 직권중재제도 폐지 역시 2003년 ‘노사관계제도 선진화 연구위원회’가 노동부 장관에게 보고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에도 포함돼 있다는 게 인권위 쪽의 설명이다.

그러나 재계와 보수단체 이외에도 시민사회 안에서 인권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다. 인권위가 기본계획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국가기구와 협의를 충분히 함으로써 갈등을 줄이고 현실적합성이 좀더 높은 방안을 만들 수도 있었는데 미흡했다는 것이다. 한 인권운동가의 말을 들어보자.

“기본계획을 만들고 발표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시민단체식의 아마추어리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재계와 보수세력의 반발이 그 정도라는 것은 이미 예상됐던 일이다. 문제는 ‘액션 플랜’이라고 부를 만큼 방안이 정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국가기관답게 다른 부처와 끊임없이 협의하고 설득하는 기간을 더 가졌어야 했다. 제도적인 면에 치우쳐 현장주의를 자꾸 잃어가는 것도 걱정이다.”

어쨌든 ‘인권과 경제’ 논쟁은 이제 우리 사회도 ‘환경’뿐만 아니라 ‘인권’이라는 가치도 ‘지속 가능한 발전’의 변수로 고려해야 하는 사회로 진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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