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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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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더라도, 오는 공은 받아라

등록 2006-01-24 00:00 수정 2020-05-02 04:24

LG·삼성·SK그룹 세 명의 여성 팀장에게 들어본 그들만의 ‘서바이벌 노하우’
나만의 룰을 창조하고 조정자 역할을 즐겨라, 쩨쩨하게 일희일비하지 말라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기업이라는 정글 속에서 여자들은 ‘유리 천장’뿐 아니라 곳곳의 ‘유리벽’에도 부딪힌다. 입사 이래 늘 ‘최초의…’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아왔던 세대일수록 영광과 상처가 겹쳐진 ‘굳은살’이 몸 여기저기에 박혀 있게 마련이다. 홀로 편견의 벽을 부수며 지내온 탓이다. 동시에 그 덕에 기업 경쟁의 최전선에서 리더십을 인정받으며 알찬 기량을 펼치고 있다. LG CNS, 삼성SDS, SK C&C가 자랑하는 세 명의 여성 팀장을 만나 그들의 ‘서바이벌 노하우’를 들어보았다.

세상 남자가 아버지·오빠·남편만 있나

이들은 정보화 산업의 견인차라는 상찬과는 별개로 노동 강도가 ‘빡센’ 곳으로 꼽히는 시스템통합(SI) 업체의 관리책임자(팀장)를 맡고 있다. 셋 모두 전산 분야를 전공했고, 외부 발탁 인사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경희(40·부장·LG CNS 금융사업부 품질지원팀) 팀장은 1988년 입사 이래 늘 조직의 ‘큰언니’였다. 홍혜진(40·차장·삼성SDS 솔루션사업부 EasyBase사업팀) 팀장은 88년 삼성연구소에 입사해 삼성전자를 거쳤다. 4년째 돈벌이(영업) 분야의 유일한 여성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권정미(47·부장·SK C&C Mobile Solution&Service팀) 팀장은 미국 록히드사 등에서 일하다 90년 SK C&C의 전신인 선경정보시스템에 경력으로 입사했다. 여성 임원이 없는 탓에 직급·직책을 통틀어 ‘선임’ 여성 간부다.

조직생활에서 ‘잔뼈’가 굵은 세 사람이 공히 강조한 것은 △남자들의 룰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나만의 룰은 창조해야 한다 △조정자 역할을 즐겨라 △강박적인 자기 관리는 오히려 손해다 △쩨쩨하게 일희일비하지 말고 멀리 봐라 △친구든 여가든 운동이든 휴식과 충전의 시간을 반드시 가져라 등이다.

나만의 룰은 어떻게 만들까? 홍혜진 삼성 팀장은 “남자 잘 이해하기”를 강조했다. 그가 입사하던 해 삼성그룹의 남성 신입사원은 3천∼4천 명이었으나 여성은 비서직 등을 합해 모두 77명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해와 지지난해 신입 여성 비율이 30%를 웃돈 것에 견주면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엄두도 못 내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인 셈이다. 그는 사회화 과정에서 겪은 아버지·오빠·선생님·동창·남편 등을 ‘남자의 전형’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여차저차하니 ‘날 이뻐해주겠지’ ‘무시하겠지’ 쉽게 판단하는 것은 버려야 할 대표적인 편견이다. 여자들의 문화가 ‘소꿉문화’라면 남자들의 문화는 ‘집단문화’다.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생활방식이 달라져야 하며, 앞서 ‘메인스트림’이었던 남자들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해야 ‘나만의 룰’도 생긴다. 그는 특별한 날 직원들에게 일률적인 ‘하사품’보다는 각 개인에게 어울리는 넥타이 같은 패션 소품을 골라 선물해 ‘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우경희 LG 팀장은 “소통을 통한 조정력은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원”이라고 말한다. ‘왜 여자는 위아래옆 눈치를 계속 봐야 할까, 남자들은 둔해도 잘 지내는데…’ 하며 속상해하기보다는 살피고 고려하는 ‘포지션’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주문이다. ‘여자는 개선위원회, 남자는 수리공’이라는 비유가 있다. 문제가 생겨 곪아터질 때까지 남자들은 팔짱 끼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나서 해결하고 자기 공을 티내는 반면, 여자들은 ‘내 일 남 일’ 가리지 않고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결하려 들다가 ‘드센 여자, 까다로운 여자’ 소리를 듣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결국 ‘개선위원회’가 데미지를 줄인다. 끝까지 설득해내고 해결점을 제시하고 필요하면 ‘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개선위원으로 활동한 사람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

‘영리한 개인주의’와 ‘멍청한 이기주의’

세 사람 모두 조직 내에서 뚜렷한 역할 모델 없이 자랐지만 어느 틈에 역할 모델이 돼버렸다. 권정미 SK 팀장은 여자 동기도 없는 상태로 지냈다. “‘잘나야 한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위치다. 하지만 그는 “역량을 다 갖춘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무조건 채우려 들기보다는 뭐가 부족한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리더십은 저절로 길러진다. 온화한 유형이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유형이 있다. 혼자 판단하고 밀어붙이는 이가 있는 반면, 의견을 조율하고 책임을 분장하는 이가 있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몽땅 갖춘 척하며 ‘피곤’을 자초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기 특징을 살리는 게 ‘오래가는’ 비결이다. 그래야 “아, 저 자리에 가도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구나, ‘안 망가질 수’ 있구나” 하는 ‘진정한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직 안에서 ‘콩나물값 몇 푼 깎는’ 식의 태도는 ‘영리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멍청한 이기주의’이다. 불쾌한 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았다 해도 바르르 끓어오르기보다는 멀리 유불리를 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세 사람은 입을 모았다. 성과금이든 포상금이든 ‘과외 소득’이 생겼을 때에는 과감하게 풀어 써야 한다. 보스에게 충성하는 것은 ‘무수리’ 노릇이 아니라 자기도 같이 크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아랫사람이 나를 치고 올라오는 것이 때론 내 성장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홍혜진 팀장은 “남자들이 몰라서 안 따지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소모적인 일에 에너지 쏟지 말라는 말이다. 속앓이할 시간에 친구랑 만나 즐겁게 놀거나 운동을 하는 게 낫다. 세 사람은 아침 일찍 꼬박꼬박 운동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권정미 팀장과 우경희 팀장도 “조직생활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게 필요하듯이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주말에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하다면 만사 제쳐두고 쉬어야 하고, 집을 분통처럼 꾸밀 여력이 없다면 내버려두면 된다.

이들은 경험에서 우러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연도 귀띔했다. 권 팀장은 대학생인 두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한 번, 남편과 오래 주말부부로 지낼 때 한 번, 직장을 쉬거나 파트타임으로 바꿀까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을 떠난 자기 모습을 떠올려보니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결국 “후회할 일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여유 있는 남편에게 딸들도 딸려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내 성격과 조건에 맞게 가정생활을 ‘세팅’해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안 그러면 회사일과 집안일이 뒤엉켜, 집에서 과장님처럼 굴고 회사에서 주부처럼 지내게 된다.

‘피구의 법칙’을 상기해야

우 팀장은 “현실적인 동기 부여”를 강조했다. 비전 타령하며 ‘현실 회피적인 고민’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이기도 하다. 뚜렷한 확신도 없이 진학을 한다고, 공부를 한다고, 이직을 한다고 저절로 ‘꽃길’이 열리지는 않는다. 그는 “조직에서 ‘성별 역할 구분’이라는 편견은 점차 줄고 있다”면서 “여성 스스로 어떤 피해의식에 따라 ‘자기 벽’을 치는 건 아닌지, 그래서 몸 사리고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 팀장은 “오는 공은 받아라, 그런 다음 되던져라”라고 ‘피구의 법칙’을 말했다. 얼마 전 회사 체육대회에서 여성들이 ‘피구 게임’을 했는데, 과장급 이상 간부들은 오는 공을 받으려 드는 반면, 연차가 낮은 이들은 ‘어머어머’ 피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이를 보던 남자 동료가 “역시 아줌마들이랑 아가씨들은 달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간부 가운데 싱글 여성도 적지 않았다. 그는 남자 동료에게 “관리직 경험 유무의 차이”라고 설명해줬다. 오는 공을 받아야만 설사 놓쳐 죽더라도 요령을 익혀 다음 경기에서는 훨씬 잘 뛴다. 하지만 오는 공을 피하려 들면 경기 내내 헉헉대며 피하기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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