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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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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비용, 달러 빚이라도 내랴?

등록 2005-11-23 00:00 수정 2020-05-02 04:24

보수층의 인권논쟁 속에 내부 냉전의 벽에 부닥친 통일협력자금 확보
일관된 화해협력으로 동독에게 양보 얻어낸 서독에서 교훈 얻어야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갈수록 쓸 곳은 많아지는데 손에 쥔 돈은 없으니 이거 죽을 지경입니다.”

통일부 직원들의 시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벌여놓은 사업은 많은데 자금을 조달하기가 녹록지 않아서다. 다들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얼마 전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전담할 남북협력공사 설립계획이 벽에 부닥치면서 한숨 소리는 더 높아졌다. “결국 다 돈 문제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갈수록 전문화·다양화되는 대북사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발전시키기가 어렵다.” 내년도 남북협력기금은 올해 1조2525억원보다 110.3% 늘어난 2조6334억원으로 정해졌다. 이 가운데 남북협력계정에는 국채를 발행해 조성하는 공자기금 예수금에서 올해 처음으로 500억원을 빌려온 데 이어 내년에는 4500억원을 끌어오기로 했다. 빚을 내서 대북사업을 지원한다는 비판에 정부가 할 말이 없게 됐다.

야당에선 “1조5천억원 넘지 마라”

그런데 통일부가 신청한 사업 내용을 들여다보면 딱히 나무랄 곳도 없다. 기금의 덩치가 커진 것은 교류협력 기반조성 사업에 쓰이는 비용을 올해보다 3배 늘린 6572억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동해선 연결(340억원), 경의선 출입사무소 건설(685억원), 개성공단 기반시설 건설(547억원)을 비롯해 지난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합의한 농업·수산·광업·과학기술 협력과 경공업 지원, 대북 전력지원 등 신규 사업에 4900억원이 투입된다. 거의가 북한 당국과 약속한 사업이라 중단 없는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들어갈 돈들이다. 문제는 좀더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해마다 빚을 내야만 이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야당이나 보수층에서는 대북지원 규모와 관련해 1조5천억원 선을 넘어서는 곤란하다는 자세다. 남쪽에서도 빈민층이 속출하는 등 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데 북한에 더 쏟을 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대북정책에서 돈 문제가 요즘처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적도 없는 듯하다. 그런데 대북지원과 통일비용 논쟁에 새로운 ‘혹’이 하나 더 붙었다. 정부의 초조감을 더 높이는 또 다른 골칫거리다. 미국과 국내 보수층에서 인권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수록 돈 얘기를 꺼내기가 더욱 궁색해지는 게 정부 처지다. 대북지원이나 인권 문제는 극심한 이념적, 정치적 논쟁의 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11월16일 유엔총회에 상정된 북한 인권결의안에 대해 정부의 표결 참여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열린우리당의 반대로 국회 상임위 상정이 무산된 것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참 기막힌 일”이라고 통탄했다.

민간 자금 시도한 ‘남북협력공사’도 무산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1월15일 한 세미나에 참석해 “당면한 최대 장애물은 내부에 존재하는 냉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쪽 내부의 하늘을 찌르는 보수의 벽을 절감하는 표현으로 비친다. 통일비용과 인권 문제 등을 놓고 여야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대북정책의 원활한 추진에 적지 않은 차질이 예상된다. 보수층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부각시킬수록 진보 진영의 남북 통합을 가속화하기 위한 자금 확보는 어려워질 게 뻔하다. 이런 이유로 정부 내 한숨 소리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통합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내부 통합이 안 돼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우리가 북에 도와준다는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 이익의 문제다.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엔 환경조성 차원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이게 이념의 장벽 문제로 민족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 내 핵심 관계자가 얼마 전 토해낸 안타까움이다.

야당과 보수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인권과 대북지원 문제를 놓고 날을 세워 비난하고 있다. 한 보수 신문에서는 통일부가 내년 예산에서 북한 인권 문제 개선 노력 사업비로 잡은 액수는 ‘4500만원+α’에 불과한데, 북한 지원을 위해선 늘 돈타령이라고 비꼰다. 얼마 전에 남북협력공사 설립이 무산된 것은 이런 보수적 비판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정동영 장관은 “국민이 내는 세금 재정만으로 협력사업을 감당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다. 지난해까지 5천억원에서 이제 1조원 시대, 앞으로 점점 더 커질 텐데 민간·국제 자금을 조성해 남북협력 사업을 추진하려면 정부 중앙부처가 하기에는 무리”라고 반관반민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드러냈지만 보수 세력은 요지부동이다. 결국 거의 마무리 수준까지 갔다가 충분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체계적으로 신중하게 풀어나가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따라 남북협력공사 설립은 당분간 물밑으로 가라앉게 됐다.

그렇지만 통일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추원서 한국산업은행 동북아센터장은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증세를 통한 자금조달이 가능하며, 현재 전체 예산의 0.5% 활용시 연간 최대 8천억원의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그는 남쪽을 비롯한 외부 자금 지원도 중요하지만 북한의 자체적인 자금조달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1991년 이후 북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군사비 비중은 약 30% 수준인 바 남북관계의 진전과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을 통해 군사비 감축분을 경제개발 재원으로 활용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역시 통일비용 조달의 열쇠는 국민적 합의를 어떻게 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보수층에서는 정부가 당장 이달 중으로 예정된 유엔총회의 북한 인권개선 결의안 표결에서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과거 서독은 화해와 지원의 대상에게도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압박한다. 비판할 것은 하고 줄 것은 줘야 그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과거 서독 정부의 대동독 정책의 내용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노무현 정부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서독은 동독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 보장 못지않게 동독과의 화해협력을 통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평화를 확보한다는 명제를 중요시했다. 서독은 오히려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독으로부터 체제개방 양보를 얻어냈고, 이에 따라 동독 주민들의 분단에 따른 고통도 완화되어 인권 상황이 나아졌다고 본다.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는 대신 이산가족 상봉, 동독 주민의 여행·방문 조건 완화, 서독 텔레비전과 라디오 시청 허용이라는 양보를 얻어낸 것이다.

인권개선과 화해협력 연계하단 역효과

물론 이런 조처들이 서독 주민들을 모두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냉전시대에 동독의 인권 문제를 공개적, 선언적으로 거론할 때보다 가시적인 성과는 더 이끌어낸 셈이다. 이때 오히려 부담스러워한 쪽은 동독이었다. 체제개방에 따른 부담이 갈수록 커진 탓이다. 서독 당국은 동독 주민들이 좀더 많은 자유와 인권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동독 정권 담당자들과 대화를 더 자주 하고, 지원을 했던 것이다. 실질적 인권개선을 위해 마치 곡예를 하듯 화해협력 정책을 폈다. 서독은 특히 인권 개선과 화해협력 정책 연계가 동독으로 하여금 점진적인 인권 개선마저도 포기하도록 만드는 역효과를 낳을 것을 우려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재와 미래의 통일비용을 줄이는 길은 당장은 어렵더라도 지속적인 화해협력 정책 외에 대안이 없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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