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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레임덕, 워터게이트 뺨친다

등록 2005-11-23 00:00 수정 2020-05-02 04:24

버지니아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의 참패는 오로지 대통령 때문!
정실인사 쇼크와 지지율 추락 속에 ‘제2의 레이건’으로 남긴 힘들 듯

▣ 워싱턴= 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며 반등할 기미가 없다. 정권 핵심부에선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온다. 정실인사의 폐해가 드러나고, 국정운영이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믿는 국민들이 늘어난다. 여당 의원들의 대통령 비판이 언론에 공개적으로 표출된다. 1년 전만 해도 굳건해 보였던 정치적 지지 기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 내년 선거가 다가오면서 패배의 위기감이 여당을 짓누른다….”

부시와의 합동 유세가 선거 패인?

한국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조지 부시 정권이 처한 상황이다. 한국은 내년 5월 지방선거를 치른다. 미국은 내년 11월에 중간선거를 치른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한국이 미국보다 낫다”고 워싱턴의 어느 한반도 전문가는 말했다. “지금처럼 정실인사와 고위층 비리가 문제가 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1970년대 초 워터게이트 사건 때가 이랬을까”라고 그는 자문했다.

미국은 ‘내 사람 챙기기’에 한국보다 훨씬 관대하다.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부시 대통령이 오랜 측근들인 ‘텍사스 사단’을 백악관과 행정부에 대거 입성시켰을 때도 비판은 크지 않았다. 능력이 문제지, 출신 지역이나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게 대다수 미국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텍사스 사단의 핵심인 해리엇 마이어스 백악관 법률고문을 연방대법관 후보에 지명했던 게 결정타였다. 결국 마이어스는 자진 사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시의 인사정책은 만신창이가 됐다.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집중 비판을 받는 건 정권 운영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얘기다.

재집권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레임덕(권력누수)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11월8일 치러진 버지니아, 뉴저지 주지사 선거는 부시의 영향력 상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뉴저지뿐 아니라 버지니아에서도 공화당은 상당한 격차로 민주당에 패했다. 뉴저지야 원래 민주당의 강세지역이니 그렇다고 쳐도, 버지니아는 지난해 대선에서 부시가 승리한 전통적인 ‘공화당 주’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는 내년 중간선거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지표로까지 불렸다.

백악관에 뼈아픈 대목은 버지니아의 패배가 부시 대통령 때문이란 분석이다. 버지니아는 민주당 후보인 팀 케인과 공화당 후보인 제리 킬고어가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다. 킬고어는 부시의 낮은 지지율 때문에 그와 거리를 두다가, 선거 전날 ‘승부수’로 부시와의 지원유세를 벌였다. 낮은 투표율을 감안하면 공화당 표를 결집하는 게 중요하고, 부시의 등장은 여기에 도움을 주리란 계산에서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뉴욕타임스>는 “부시 유세가 공화당 표를 결집시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민주당과 부동층 표를 케인에게 몰아주는 효과가 더 컸다”고 분석했다.

레임덕의 현상 중 하나는 여당 후보들이 대통령과 나란히 서는 걸 꺼려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인기가 높으면 서로 모시려고 하지만, 인기가 떨어지면 거리를 두려 한다. 11월13일의 갤럽· 공동 여론조사에서 부시 국정지지율은 37%로 집권 5년 동안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공화당의 뉴저지 주지사 후보로 뛴 백만장자 더글러스 포레스터는 선거기간 내내 부시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패배 직후 “부시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한 공화당의 J. D. 헤이워스 하원의원(애리조나)은 ‘부시 대통령이 당신을 위해 애리조나에 온다면 환영하겠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가, 골수 공화당원들의 반발을 샀다.

‘엑서브’지역마저 흔들리다니…

동전의 양면이긴 하지만, 공화당이 보는 아픈 대목은 따로 있다. 백악관은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이 약화될까 우려하지만, 공화당은 내년 중간선거를 우선 생각한다. 공화당은 버지니아의 선거결과가 내년 중간선거에서 전국적으로 현실화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지난해 대선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존 케리 민주당 후보와 박빙의 싸움을 펼치리라는 예상을 깨고 큰 격차로 완승을 거뒀다. 부시 승리의 밑바닥엔 도시 외곽의 발전하는 중산층 지역, 이른바 ‘준교외’(엑서브·exurb) 지역의 압도적 지지가 깔려 있었다. 엑서브란 ‘ex’와 ‘suburb’(교외)의 합성어로, 교외보다 약간 더 바깥쪽의 신흥 개발지역을 말한다. 대규모 주택단지가 개발되고 새롭게 상점들이 들어서는 이 지역은 주로 중산층 밀집지역이다.
지난 대선에서 부시는 미국에서 가장 개발이 빠른 지역 100곳 중 97곳에서 승리했다. 대부분이 엑서브 지역이다. 이것이 부시가 예상 밖의 압승을 거둔 비결이었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선 공화당의 텃밭인 엑서브 지역이 흔들리고 있음이 드러났다. 버지니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엑서브로 꼽히는 라우든과 프린스윌리엄 카운티에서 공화당 후보는 민주당 후보에 상당한 격차로 밀렸다. 두 곳 모두 지난 대선에서 부시가 손쉽게 이겼던 지역이다. 이는 부시의 인기 하락과 관계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공화당 전국위 의장인 켄 멜먼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전체적 분위기에 부동층이 영향을 받는다. (이런 분위기 탓에) 부동층은 야당 후보에 투표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부시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보수 진영은 이걸 1984년 로널드 레이건의 역사적인 재선에 비유했다. 부시에겐 ‘제2의 레이건’이란 찬사가 잇따랐다. 대선 직후 부시의 최측근인 칼 로브는 “보수주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했다.
‘강력한 지도자’를 내건 부시가 재선 1년도 되지 않아 레임덕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부시와 레이건을 자주 비교한다. 레이건 역시 어려움 속에서 집권 2기 초반을 보냈지만, 결국 미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중 하나로 남았다.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이들은 두 부류다.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나라의 기초를 세운, 그래서 당파를 초월해 존경받는 대통령들이 있다. 자기 정당의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성공한 이들도 있다. 미국 사회보장 체계를 세운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민주당원들은 아주 좋아하지만, 공화당원들은 그렇지 않다. 로널드 레이건은 정반대의 경우다. 공화당은 레이건에 열광하지만, 민주당원 중에선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도 루스벨트나 레이건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는 데엔 별 이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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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별명은 ‘위대한 소통자’였다. 그는 매주 토요일 아침, 국민에게 직접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주례 라디오 연설을 했다. 생방송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2차 세계대전 때 노변정담식의 라디오 연설을 한 걸 본뜬 것이다. 레이건은 국민과의 소통에 성공했다. 그를 반대하는 민주당원도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믿었다.
부시 대통령도 토요일마다 빠짐없이 라디오 연설을 한다. 하루 전에 미리 녹음을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듣는지는 모른다. 백악관 공보국장은 “아마 수백만 명은 청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인터넷이 대중화한 시대에 라디오 연설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수 있다. 방법은 중요치 않다. 문제는 국민과 소통하려는 대통령의 의지다. 그걸 보여줘야 국민은 대통령을 믿는다. 부시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다. 지금 부시는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다. 부시의 위기 탈출이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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