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중도매인’ 심흥식·은식 형제의 올빼미 생활
밤 12시에 ‘찜’한 트럭 4대치 받았지만 소매상에 못 넘기면 밑질 수도
▣ 글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처음엔 코피 엄청 쏟았지.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니까. 적응하는 데 한 1년 걸리더라고.”
심흥식(57)씨가 고향(전북 순창)을 떠나 서울에서 야채 도매상, 이른바 농산물 중간 상인의 길로 들어선 건 19살 되던 1967년이었다. 그 뒤 38년 동안 무·배추와 씨름하던 생업의 터전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송파구 가락동으로 바뀌고(1985), 본격적인 경매 제도 도입(1995)에 따른 거래 체제의 격변을 겪었지만, 낮에 잠자고 밤새 일하는 ‘올빼미 생활’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겉모양·출하표 살피며 ‘속박이’ 조심
심씨의 하루는 보통 직장인들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 7시쯤 시작된다. 그가 주로 취급하는 품목인 배추의 경매가 밤 11시에 이뤄지는 데 맞춰진 일과다.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 11월15일에도 그는 어김없이 저녁 7시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안의 야채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가락시장에서 야채 경매장으로는 가장 큰 대아청과(주) 경매장. 대아청과의 경매장 세 곳 가운데 주로 배추를 취급하는 제1경매장에는 이미 전국 곳곳에서 배추들을 실어온 5t 트럭으로 가득 차 있다. 얼추 50대 안팎에 이르렀다.
심씨 같은 중도매인들은 트럭에 사다리꼴로 높다랗게 쌓아올려진 채 밖으로 드러나 있는 배추들의 상태를 살피며 경매 전에 미리 점찍어둔다. 트럭 위로 올라가 몇 포기씩 끄집어내 상태를 좀더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배추 더미의 깊은 속까지 헤집어볼 도리는 없다. 트럭에 실린 채 ‘차떼기’ 경매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칫 ‘속박이’(속을 부실하게 채워넣은)에 당하는 수가 있다.
“배추는 겉잎이 얇은 게 좋지. 청이 싱싱해야 하고….” ‘좋은 배추 고르는 법’에 대해 묻자, 심씨의 목소리에는 아연 활기가 돌았다. “통이 크다고 좋은 건 아니고, 김장 담글 때 2쪽으로 갈라서 담글 수 있는 크기면 돼. 너무 큰 건 늙은 거라고 봐야지. 맛이 없어.” 배추 더미에서 파악한 겉모양새보다 더욱 중요한 정보는 생산지와 산지 수집인에 관한 사항이다. 이는 트럭마다 붙어 있는 꼬리표(출하 명세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도매인으로 오래 일한 심씨는 산지 수집인의 80%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 출하자를 보면 배추의 질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11월 중순을 넘긴 요즘엔 고창(전북), 나주(전남) 등 호남지역의 배추가 인기다. 기온이 상대적으로 따뜻해 상태가 좋기 때문이란다.
“올해 초장에는 배추 작황이 별로 안 좋았는데, 비가 좀 온 뒤에 확 달라졌어.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비가 왔잖아. 여름 비는 야채를 망가뜨리지만, 가을 비는 그렇지 않거든. 올해가 배추 농사는 풍년이라고 볼 수 있지.” 심씨 같은 중도매인들은 이렇게 작황이 좋고 거래가 활발한 걸 반긴다. 국산 김치에서도 기생충알이 검출됐다는 보도 뒤 배추 수요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나빠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지난해보다는 사정이 낫다고 한다.
밤 10시 양배추에 이어 10시 반에 무 경매가 이뤄지면서 배추 경매장 쪽도 부산해졌다. 40~50명의 중도매인들이 경매장 곳곳에 늘어선 배추 트럭들을 둘러보며 맘속으로 물건과 응찰가를 결정해두는 시간이다. 이때 산지, 출하자, 배추 상태 이상으로 중요한 정보는 전날과 비교해 물량(트럭 대수)이 많은지 적은지 하는 점이다. 거래 관계를 맺고 있는 소매상들한테서 들은 소비지 동향도 중요한 정보다. 심씨는 전날보다 물량이 좀 많다는 판단에 따라 조금 낮은 가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이날은 직접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같이 일하는 동생 은식(49)씨에게 맡겼다.
꼬박 샌 아침 8시 반, 100단 남았네
이윽고 밤 11시 배추 경매가 시작됐다. 이동식 경매대에 올라선 경매사는 각 트럭 앞을 지나갈 때마다 ‘호창’(산지와 출하자를 밝히고 응찰을 요청하는)을 하고,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중도매인들은 그때마다 손에 쥔 단말기로 응찰가를 눌렀다. 이날 심씨 형제는 고창 등 호남지역에서 산출된 네 트럭의 배추를 낙찰받았다. 가격은 각각 240만원, 250만원, 260만원, 310만원. 심흥식씨가 지난 일요일(13일) 밤 낙찰받은 트럭 두 대 분량의 값 280만원과 300만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 트럭에 실린 배추가 보통 2천 포기라고 하니 포기당 1200~1500원 수준인 셈이다. 경매에 참여해 도매로 사들이는 심씨로선 산지에서 얼마에 팔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중도매인들이 산지 수집을 하는 것은 법규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다.
경매가 끝나니 시곗바늘은 밤 12시를 지나고 있다. 심씨 같은 중도매인들이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는 게 이때부터다. 경매를 통해 사들인 배추는 트럭에 실린 채 식당업자, 소매상 등에게 차례차례 팔려나간다. 심씨는 이 작업을 위해 4명의 인부를 동원했다. 중도매인의 성패는 이 밤샘 흥정에서 판가름난다. 하룻밤 동안 다 팔지 못하면 배추는 버려지기 때문에 막판에는 원가(경매가격) 밑으로라도 팔아치워야 한다. 때문에 중도매인들은 자칫 밑질 위험을 안고 있다. 평균적인 마진은 보통 20~30% 수준이라고 하니 소매상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선 요즘 시세로 포기당 2천원 안팎으로 짐작된다.
밤샘 작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이튿날 아침 8시 반께 심은식씨에게 전화를 걸어봤더니 미처 다 팔지 못한 배추가 100단(2~4포기씩 묶은) 정도 남아 있다며 9시쯤엔 일을 접을 것이라고 했다. 형 흥식씨는 저녁 경매에 대비해 새벽 3시께 귀가했다고 한다. 중도매인들은 대부분 심씨 형제처럼 밤을 꼬박 새우고 점심식사도 거른 채 잠에 빠져든다. 경매가 없는 토요일만 빼곤 매일같이 반복되는 중도매인들의 일상이다.
| ||||
국내 최대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가락시장이 개설된 것은 1985년 6월. 농수산물의 원활한 유통을 꾀하기 위해 서울 원효로(현재 용산 전자상가 자리)에 있던 도매시장을 이곳으로 옮겨 문을 열었다. 시장 터는 16만4천 평에 이른다.
가락시장의 개설 주체는 서울시이며, 시 산하 농수산물공사(농림부 산하의 농수산물유통공사와는 별도 조직)에서 시장 내 질서 유지 등 관리를 담당하고, 경매 입찰 실시 등 시장 운영은 서울청과·농협(공판장)·중앙청과·동화청과·한국청과·대아청과 등 6개 도매법인에 맡겨져 있다.
서울시 농수산물공사에 따르면 거래량 기준으로 가락시장은 전국 32개 공영 도매시장에서 2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야채류의 거래가 활발해 배추의 경우 전국 도매시장 유통량의 38%인 22만5253t(755억4200원)을 중개한 것으로 집계됐다. 수도권에 공급되는 무, 배추의 70%는 가락시장을 거치고 있다.
가락시장을 비롯한 공영 도매시장에서 이뤄지는 농수산물 거래는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농안법) 규정의 경매 원칙에 따라 이뤄진다. 산지 유통인이나 생산·출하자가 이곳 시장으로 농수산물을 실어오면 6개 도매시장 법인은 이를 경매에 부치며, 농수산물공사에 등록한 중도매인들만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가락시장 소속 중도매인은 지난해 말 기준 2055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청과(야채, 과일) 중도매인은 1482명이며, 무·배추를 주로 취급하는 이들은 300~400명 수준이다.
농산물 경매는 양배추 10시, 무 10시30분, 배추 11시 등 주로 밤에 정해진 시각에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거래가 이뤄지면 출하자는 낙찰가의 4~7%를 도매시장 법인에 납입한다. 이렇게 낙찰된 물량은 중도매인들의 밤새 흥정을 통해 소매상에게 넘어가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총각무, 마늘, 쪽파 등 거래량이 적은 농산물은 상장예외 품목으로 경매 절차 없이 거래가 이뤄진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무거운 ‘습설’ 대설특보 수준…아침 기온 10도 뚝

롯데백화점 “손님 그런 복장 출입 안 됩니다, ‘노조 조끼’ 벗으세요”

“갑자기 5초 만에 무너졌다” 광주서 또 붕괴사고…2명 사망·2명 매몰
![[단독] 공수처, ‘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 국회 위증’ 천대엽 수사 착수 [단독] 공수처, ‘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 국회 위증’ 천대엽 수사 착수](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1/53_17654387202391_20251211503426.jpg)
[단독] 공수처, ‘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 국회 위증’ 천대엽 수사 착수

‘대장동 항소 포기 반발’ 검사장들 좌천…김창진·박현철 사표

전재수 사퇴…여권 ‘통일교 악재’ 확산 촉각

코스트코 ‘조립 PC’ 완판…배경엔 가성비 더해 AI 있었네

특검, 한덕수·최상목 임명권 자의적 행사 ‘윤 탄핵심판 방해’로 규정
![그래, 다 까자! [그림판] 그래, 다 까자! [그림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5/1210/20251210503747.jpg)
그래, 다 까자! [그림판]

서울교육청 “2033학년도 내신·수능 절대평가…2040 수능 폐지”


![[단독] ‘세운4구역 설계 수의계약’ 희림 “시간 아끼려고”… 법 절차 생략 시인 [단독] ‘세운4구역 설계 수의계약’ 희림 “시간 아끼려고”… 법 절차 생략 시인](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original/2025/1202/20251202503678.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