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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하나로마트는 경쟁력 있나

등록 2005-11-22 00:00 수정 2020-05-02 04:24

전문가가 진단한 대한민국 농산물유통의 문제점과 대안
저장·포장·판매 시설 마구 짓기보단 자본·인력 체계화 먼저

▣ 이성호/ (사)한국농수산유통연구소장

쌀을 비롯한 농산물 개방 문제를 둘러싸고 농민들의 불만이 대단하다. 점차 압박해오는 농산물 개방이라는 대외적 압력과 함께 값싼 중국산 농산물의 공세에 밀려 우리 농업과 농민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됐으나 개방에 대한 정부의 애매한 태도와 안이한 정책 때문에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농산물 수출국을 대표하는 미국의 철저한 공세적 농업정책과 농산물 수입국을 대표하는 일본의 주도면밀한 수비적 농업정책을 음미해볼 때 우리의 태도는 너무 안이했다. 생산비 격차에 따른 농업생산의 문제점과 더불어 먹을거리를 식탁까지 전달하는 농산물 유통 부문에도 문제가 쌓여 있다. 농산물 유통 문제를 촉발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농산물의 생산과 상품의 특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최첨단 유리온실 흉물된 뼈아픈 기억

공산품은 판매계획에 의한 연중 계획 생산과 출하가 가능하지만, 농산물은 수확기가 정해져 있으며 특히 가을에 출하가 집중된다. 그리고 공산품은 규격화가 손쉬운 반면 농산물은 부피가 크고 생물이라는 특성 때문에 생산물의 규격화·표준화가 어렵다. 농산물은 또 신선도 저하와 부패로 상품 주기가 짧다.

이런 농산물 고유의 상품적 특성 탓에 유통에서는 항상 가격 불안정과 저장성의 문제, 물류에서는 규격화와 표준화 문제가 난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어려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직면하는 것이지만,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조건 때문에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효율화·적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라별로 태도와 정책을 달리한다.

농산물 유통 문제는 우선 생산자 단계에서의 유통, 도매시장 단계에서의 유통, 소비자 단계에서의 유통, 세 단계로 대별해볼 수 있다.

먼저 생산자 유통 단계의 문제점을 보자. 문민정부 시절에 우리 정부는 ‘기술농업’을 표방하면서 최첨단 유리온실에 대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그렇게 국민의 혈세로 투자한 수십억원에 이르는 유리온실 지원이 경영자의 능력을 감안하지 않고 무문별하게 이뤄짐에 따라 나중에 모두 도산해 농촌 도처에 흉물로 남았던 뼈아픈 기억이 있다.

최근엔 고품질 농산물들을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선별, 포장해 판매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 목표 아래 저장, 포장에 대한 장치 시설에 정부는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이러한 투자에 대한 원칙으로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는 방침은 옳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오늘의 농촌에 농림부가 밝히는 규모화·전문화된 마케팅 조직이 얼마나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숙고할 여지가 있다.

일본은 농산물 생산이 단지화·주산지화해서 꾸준한 자본과 인적 집적을 통해 자본력과 경영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경영을 위탁할 수 있고 전문 경영인을 영입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가지고 있으며 경영에 대해서도 높은 인식도를 보유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생산물의 주산지화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출하 규모도 분산돼 있으며 영세하다. 단위농협도 시장에서 충분한 가격 협상력을 가질 정도로 규모화돼 있다고 볼 수 없으며 경제사업에 대해 충분한 경영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도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산지 유통시설을 보급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오히려 자원의 낭비만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산지 유통의 활성화에 앞서 우선 산지의 자본과 인적 조직화부터 먼저 점검하고 그에 대한 육성을 병행해 지원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원 대상에 대한 엄격한 선발, 그리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비농업 부문의 경영전문 조직과 결합시키는 유연한 정책이 요청된다.

도매시장의 고지식한 경매원칙

두 번째 도매시장 단계의 농산물 유통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도매시장 경유 농산물량의 급격한 하락, 즉 도매시장의 역할 위축이다. 이웃 일본에서도 경매를 수단으로 하는 도매시장 유통물량의 급격한 축소 때문에 ‘도매시장 무용론’이라는 과격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도매시장 경유 농산물의 비중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고 시장 경유 물동량이 전체 농산물의 50%를 밑도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매시장을 경유하지 않는 농산물은 소비자 직거래 통로를 통해 바로 식당과 외식업체에 조달되고 있으며 대형 유통업체의 식품매장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최근 전자상거래의 발달과 농산물 도소매 물류센터의 발달로 도매시장의 위축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공영 도매시장의 건설이 속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도매시장의 위상과 기능이 빠르게 저하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도매시장이 고지식한 경매의 원칙에만 매달려 시장에 대해 탄력적인 대응을 못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경매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일본, 한국, 대만의 3개국에서만 시행하고 있고, 일본은 최근 도매시장 물동량의 감소 때문에 차츰 농산물 경매주의를 완화하고 농가들의 출하처를 다양화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추세에 있다. 우리의 경우도 농안법을 개정하고 도매상제를 도입해 경매와 병행해 시행해보고자 했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의 재량이라는 애매한 규정 때문에 서울의 강서도매시장 외에는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곳이 없는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았다.

현행의 농안법이 제시하고 있는 도매상 제도는 영업용 택시와 개인택시가 같이 운영되도록 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경매제도가 존속해야만 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기득권의 반대에 봉착해 이 제도는 기존 도매시장에 전혀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도매시장 내의 이해 관련자들이 서로 자기의 이익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도매시장 자체의 쇠퇴를 극복하기 위해 농수산물 공영 도매시장에 입주한 각 유통주체들, 즉 농협공판장, 도매시장 법인(경매법인), 중도매인들이 도매시장을 도매시장답게 하는 방향에 대해 뜻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농업 경영학의 순발력 발휘할 때

마지막으로 소비지 유통단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대형 슈퍼의 식품매장에서 산지 직거래를 할 때 농민들의 가격협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응해 일각에서는 농업협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소비지 시장에 진출해 농가의 소득보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어차피 도매시장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지 못하므로 새로운 경로를 통해 공급을 창출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농협의 하나로마트에서 보다시피 여전히 농협은 유통인력의 전문성이나 경영역량에서 일반 대형 유통업체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린다고 볼 수 없는 형편이다. 농협이 소비지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의 농협이 가지고 있는 역량과 전문성부터 점검한 뒤에 소비지 시장 개입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우리 농산물 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고색창연한 농업경제학이나 경제학 원리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 즉 케이스별로 접근하는 경영학의 순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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