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림팀의 아날로그 도청을 디지털 업그레이드한 DJ 정부의 불법 도청
임동원·신건 구속, 정치적 이해 떠나 ‘조직적인 국가범죄’ 관점에서 봐야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국민의 정부 당시 국정원을 책임졌던 임동원(1999년 12월~2001년 3월)·신건(2001년 3월~2003년 4월) 두 전 원장의 구속 과정에서 드러난 국정원의 광범위한 불법 도청 실태는 여러모로 끔찍하다.
먼저 김영삼 정부 시절 미림팀을 통한 ‘아날로그 방식’이 ‘디지털 방식’으로 형식만 바꿔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계속 이어졌다는 점에 충격을 받는 이들이 많다. DJ 시절 일부 언론이 휴대전화 도청 의혹을 기사화할 때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콧방귀를 뀌던 이들은 의심을 품었던 이들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몇 년 뒤에 고스란히 현실화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정원 국내담당 2차장을 지낸 김은성(2000년 4월~2001년 11월)씨의 수사 과정에서 불거지기 시작해 두 원장의 구속으로 전면화한 불법 도청의 양상은 자못 심각하다. 이번에 주로 드러난 것은 휴대전화 통화를 불법 도청했던 R-2(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의 존재다. 검찰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검찰 수사팀은 이번 수사의 실마리를 지난 8월 검찰이 실시한 국정원 건물의 압수수색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R-2’라는 도깨비방망이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은 한 세트당 600회선인 R-2를 모두 6세트(최대 3600회선) 구비해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감청장비는 불법 도청 업무를 맡았던 국정원 8국(과학보안국) 사무실에 준비돼 있었고, 국내 주요 인사 1800여 명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32명의 감청팀원이 365일 내내 24시간 3교대로 상시 도청을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국가범죄였던 셈이다.
R-2는 휴대전화와 휴대전화 사이의 통화 내용을 직접 잡아낼 수 있는 ‘휴대전화 감청장비’(CASS)와 달리 유선전화와 휴대전화 간의 통화 내용을 감청할 수 있는 장비다. 요컨대 R-2는 통화의 길목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모든 통화를 대상으로 해서 선택적으로 도청할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국정원은 처음에는 유선중계 통신망을 통과하는 모든 통화 내용을 무작위로 감청하다가 감청 작업의 효율화를 위해 여야 정치인, 언론인, 고위 공무원, 경제인, 대통령 친·인척 등 주요 인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했다. 본격적인 ‘집단적 표적 도청’이었다. 입력한 휴대전화가 울리면 빨간 불이 들어오고 그렇지 않은 통화에는 파란 불이 들어왔다.
‘빨간 불’은 특정한 방향이나 원칙도 없이 전방위적으로 켜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형택씨와 이성호씨 같은 대통령의 처남과 처조카 등 친·인척은 물론이고 통일부 장관과 아래 직원 사이의 통화까지 도청 대상이 됐다. 박지원씨와 박준영씨 등 당시 정권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히던 인물의 휴대전화가 울릴 때도 빨간 불이 들어왔다. 기자가 도청 대상이 된 것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 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1800여 명의 도청 대상 가운데는 범죄와 직접 관련된 인물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공·마약·기술 유출 등은 국정원이 전통적으로 주력해왔던 분야다. 국정원 쪽에서는 이 비율이 상당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50% 미만일 것이라는 게 검찰 쪽의 판단이다.
최대한 1천 명 안팎의 인물들이 범죄 혐의와는 무관하게 수년간 도청 대상이 돼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인권 침해의 화약고’라고 부를 만하다. 대부분의 사적·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전화 통화로 이뤄지는 최근의 추세로 볼 때 이런 식의 전화 도청은 한 인간을 완전히 발가벗기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간부가 얼마 전 기자에게 들려준 합법적인 감청의 위력은 불법 도청의 파괴력을 짐작케 한다. “몇 년 전 한 대기업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감청 영장을 받아 임원 여러 명을 감청하는데 별별 사생활이 다 확인되는 바람에 무척 곤혹스러웠다. 예를 들어 임원 아내들 가운데 한 명만 빼놓고 모두 애인들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게 어쩔 수 없이 확인되는 것이다. 범죄 혐의와는 무관한 것들까지 모두 체크된다.”
엿들은 시간이 분 단위까지 표시
한 사람이 통화하는 대상자의 범위가 무척 광범위하다는 점도 불법의 범위를 짐작케 한다. 범죄 혐의와 무관한 도청 대상자가 1천 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대상자가 하루 평균 10명씩과 통화했다면 하루에만 1만 명의 통화 내용을 엿들은 셈이고, 50명과 통화했다면 5만 명이 도청 대상이 됐음을 뜻한다.
이렇게 모인 불법 도청 정보 가운데 하루 15건 안팎의 핵심 통화 내용은 A4용지 반쪽짜리 크기의 보고서로 만들어져 국정원 국내 담당 차장과 국정원장에게 보고됐다. 이 보고서에는 엿들은 시간이 분 단위까지 표시돼 있었다고 한다.
두 원장의 구속을 두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파적 이해보다는 인권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는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구속을 비난하는 여당조차도 ‘반인권적 국가범죄 공소시효 특례법’ 적용대상에 불법 도청 행위를 포함시키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날로그 도청’이든 ‘디지털 도청’이든 국가범죄는 국가범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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