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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머리’는 날라갈 것인가

등록 2005-11-08 00:00 수정 2020-05-02 04:24

리크게이트의 당사자로 지목된 최측근 참모 칼 로브를 둘러싼 고민
특검 수사선상에 오른 뒤 공화당 인사들도 ‘물갈이’를 요구하는데…

▣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부시는 칼 로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10월28일 패트릭 피츠제럴드 특별검사의 ‘리크게이트’ 수사 발표 이후 워싱턴 정치권이 백악관에 던지는 질문이다. 2년간의 리크게이트 수사 결과,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인 루이스 리비가 기소되고, 칼 로브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계속 수사대상으로 남았다. 백악관의 막강한 두 참모가 모두 수사선상에 오른 것이다.

부시와 로브는 55살 동갑내기 동지

리비는 기소된 직후 곧바로 사임했다. 그는 법정 투쟁을 통해 자신에게 덧씌워진 위증 혐의를 벗어던지겠다고 별렀다. 로브는 여전히 백악관에 남아 있다. 피츠제럴드는 수사발표를 하면서 로브의 이름을 적시하지 않았다. 그냥 ‘백악관 고위관리 A’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 A가 로브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리크게이트란 지난 2003년 6월 조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한 전직 외교관 조지프 윌슨의 부인이 미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이란 사실을 백악관 고위 관리가 언론에 흘리면서 시작됐다. 비밀요원의 신분을 누설하는 건 연방법 위반이다. 누가 ‘리크’(누설)했는지를 찾기 위한 특별검사 수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칼 로브와 루이스 리비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이다.

특별검사는 리비가 고의적으로 비밀정보를 누설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그가 기자들과의 대화 내용을 거짓 진술한 점을 들어 위증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로브 역시 특별검사 조사 과정에서 처음엔 “기자들에게 윌슨의 부인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나중에 <타임>의 매슈 쿠퍼 기자가 “(윌슨 부인의 신분을 알려준) 내 취재원은 칼 로브”라고 공개했다.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로브는 “쿠퍼 기자와 대화한 사실을 잊어버렸을 뿐 일부러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버텼다. 피츠제럴드 특별검사는 막판까지 로브 진술의 허점을 찾아내려 애썼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계속 수사대상’에 올려놓고 일단 기소대상에서 제외했다.

로브는 살아난 것인가. 아무도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없다. 로브 변호인은 “특별검사가 결국은 기소를 포기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먹잇감(수사대상)을 고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스타일이라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텍사스 사단’ 와해될 수도

문제는 ‘기소는 되지 않았지만 리크게이트 연루 사실은 드러난’ 로브를 백악관이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다. 수사 발표 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로브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지는 않겠다고 백악관 관리들은 밝혔다. 역대 백악관 참모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으로 꼽히는 로브의 미래를 입에 올리는 건 백악관에서는 일종의 금기다. 백악관 공보국장인 니콜 월러스는 “로브는 여전히 훌륭하게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의 로브 사랑은 단순히 일 잘하는 참모에 대한 대통령의 총애를 넘어선다. 로브와 부시는 55살 동갑이다. 둘은 주군과 신하일 뿐 아니라, 정치적 동지요 친구이다.

부시 대통령은 1기 임기 때 워싱턴 부근의 로브 집을 찾아가 식사를 한 뒤 “훌륭한 식사였고, 훌륭한 우정이다. 당신의 집은 (워싱턴에서) 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로브에 대한 부시의 애정이 배어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73년, 칼 로브가 부시 대통령 아버지의 참모로 일할 때였다. 그 뒤 32년간 두 사람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해왔다. 부시 대통령이 1993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을 때, 선거운동 방향과 공약을 처음 상의한 사람이 로브였다. 부시 대통령이 개략적인 방향을 제시하자, 로브는 거기에 필승의 선거 전술을 채워넣었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의 캐치프레이즈, ‘온정적 보수주의’란 말을 만들어낸 이가 로브다. 당시 보수 진영에선 “그럼 보수주의는 원래 온정적이지 않다는 말이냐”고 비판했지만, 로브는 “이것만큼 부시를 대중에게 다가서게 할 수 있는 구호가 없다”며 밀어붙였다. 부시 1기 4년을 거치면서 그의 정책이 결코 서민들에게 ‘온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어쨌든 2000년 선거에선 그게 먹혔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 지난해 대선을 승리로 이끈 이도 칼 로브다. 11월 대선 승리 직후, 부시는 기자들 앞에서 로브를 가리키며 “이번 선거운동의 설계자”라고 칭찬했다. 여론은 부시가 잘한 게 없다는 데 쏠린 것처럼 보였지만, 낙태나 동성결혼 문제로 보수층을 격동시켜 투표장에 많이 끌어낸 건 칼 로브였다. 칼 로브의 사퇴를 강경 보수 진영에서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개인적 애정으로 정치적 현실을 뛰어넘긴 힘들다. 로브가 이번에 기소를 면하긴 했지만, 여전히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건 백악관엔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다. 부시의 로브에 대한 신뢰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타임>은 백악관에 정통한 공화당 인사의 말을 빌려 “(최근 일련의 사태로) 가장 귀기울여왔던 칼 로브에 대한 부시의 신뢰가 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타임> 역시 부시가 쉽게 칼 로브를 버리진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부시는 충성심을 인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칼 로브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로브는 부시 정권의 이너서클(실세그룹)을 구성하는 ‘텍사스 사단’의 맏형 격이다. 텍사스에서부터 부시를 보좌해온 이들이 지금 백악관과 행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백악관에선 최근 대법관에 지명됐다 자진 사퇴한 해리엇 마이어스 법률고문과 댄 바틀렛 정치고문, 스콧 매클렐런 대변인 등이 텍사스 사단으로 꼽힌다.

조류독감 대책으로 위기 돌파?

텍사스 사단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칼 로브는 리크게이트에 연루돼 있고, 해리엇 마이어스는 대법관 임명파동 끝에 스스로 대법관 지명자직을 물러났다. 스콧 매클렐런은 리크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백악관에 연루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강변했다가 이젠 기자들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로브가 물러난다면 부시 정권을 이끌어온 축인 ‘텍사스 사단’은 사실상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과 보수 진영 내부에선 부시에게 이런 길을 택하라고 권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부시는 어느 대통령보다 정실인사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인사 스타일을 버리고 과감하게 현 보좌진을 물갈이하라는 게 공화당과 보수 쪽 상당수의 주장이다. 강경보수 성향의 워싱턴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 소장인 윌리엄 니스캐넌은 최근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부시 대통령은 로브를 비롯한 최측근 참모들을 희생해야만 한다”고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미국에서도 민심 수습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인사 쇄신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80년대 초반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백악관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진을 대폭 교체해 지지율을 반등시킨 건 미국 정치에서 하나의 교본으로 종종 인용된다.

부시 대통령은 정책으로 지금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난주 갑작스레 조류독감 종합대책을 발표한 건 그런 예다. 특히 내년 초 새해 국정연설을 계기로, 다시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게 백악관의 시나리오라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그러나 로브가 백악관에 남아 있는 한 이런 부시의 시도는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부시의 새 출발을 누구도 진정한 ‘새로운 출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선 로브를 부시의 ‘머리’라고 부른다. 부시는 ‘머리’가 없다는 비아냥이다. 로브를 버린다면 이런 비아냥도 일시에 날려버릴 수 있지만, 그 결과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지금 백악관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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