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모녀지간이 돼버린 한국 한센인과 일본인 변호단의 소송 준비, 2년2개월…끈끈한 정과 초인적 인내심으로 끌어온 배상 소송을 패소로 주저않히지 못하리
▣ 도쿄=글·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다.”
10월25일 오전 10시.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 민사3부 판사 쓰루오카 도시히코가 입을 열자 103호 법정은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의 눈은 법정에 출석해 판결을 기다리던 장기진(85)·강우석(82)·남상철(79)·김정임(74)·이행심(78) 등 한국인 한센인 5명에게 쏠렸다. 장기진(85) 할아버지는 흥분한 채 발을 동동 굴렀고,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이행심 할머니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통역자가 판결 결과를 알려주자, 이 할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무너지듯 눈물을 흘렸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억눌린 울음이었다.
14장의 반대 판결문과 3장의 승소 판결문
원고 쪽 변호인단에 앉은 구니무네 나오코 변호사와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장 할아버지를 다독였다. 이번 소송을 이끈 대표 변호사 구니무네는 “2년 동안 믿고 따라와줬는데, 이기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일본 자원봉사자들이 흐느끼며 법정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이, 장 할아버지는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를 태운 휠체어는 곧 법정 밖으로 옮겨졌다. 재판소 밖에서는 일본 변호인단 관계자가 “부당 판결”이라고 쓴 펼침막을 들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장기진(85)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올해 1월이다. 그때 기자는 1942년 일제 학정에 항거해 당시 소록도 갱생원장이었던 수호 마사토를 죽인 이춘상(당시 27살)을 취재하고 있었다(<한겨레> 2005년 1월31일치 9면). 장 할아버지는 몸에 침투한 병균 때문에 늘 선그라스를 쓰고 있었다. 장 할아버지는 취재진을 사건 장소로 안내하다 전동 휠체어에서 두 번 떨어졌다. 그의 두 다리는 의족이었다. 쓰러진 그를 부축해 일으키는 기자의 손을 잡고 “일본 변호사들이 도와주러 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장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꼭 사과를 받고 싶다”며 웃었다.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던 그의 웃음을 아직 잊지 못한다.
장 할아버지의 육신은 몸에 닥친 병과 일제의 잔혹한 강제격리 정책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그는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15살 때 고향에서 병에 걸렸다. 20살 때 ‘병 고치러 가자’는 일본인 순사의 손에 끌려 소록도로 향했다. “3년만 지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판결이 나기 전날 밤 일본 교육문화회관 6층에서 열린 원고단 회의에서 장 할아버지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23살 때 단종 수술을 당했고, 이어진 가혹한 노동에 두 다리와 양쪽 손가락을 잃었다.
일본인 판사는 “일본의 한센인 격리 정책으로 소록도 환자들이 차별과 편견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면서도 배상 요청은 거부했다. 그는 거부의 논리를 만들기 위해 무려 14장짜리 판결문을 썼다. 승소한 대만 낙생원 소송의 판결문은 겨우 3쪽이다. 도쿠다 변호사는 “소록도 판결은 부당한 판결”이라며 흥분했다.
도쿠다 변호사, 무작정 소록도를 찾다
장 할아버지는 도쿠다 변호사를 “우리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가 소록도를 처음 찾은 것은 2003년 8월이다. 그는 2001년 5월11일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에서 89년 동안 한센인 격리정책을 펴온 국가를 상대로 배상 소송을 벌여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한 달 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는 “한센병 환자들이 그동안 받아온 고통을 생각해 감히 항소를 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한센병요양소 입소자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도쿠다 변호사는 “재판이 끝나고 다시 한 번 엄한 비판과 맞서게 됐다”고 말했다. 소록도에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일본 국내 요양소 환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살아온 한센인들이 있었다. 도쿠다 변호사는 한센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 가지고 무작정 소록도를 찾아갔다. 통역관을 거쳐 더듬더듬 보상 청구서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나이든 한센인들과 얘기를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노인들의 기억은 늘 혼미하고, 그 속에서 일관된 진술을 이끌어내는 데는 초인적인 참을성이 필요하다. 일본 변호사들은 2003년 12월24일 소록도 한센인 28명에 대해 후생노동성에 보상금 청구서를 제출했고, 보충 작업을 통해 그 수는 점점 늘어갔다.
딸이 되고 친구가 된 변호사들
박영립 한국 변호인단 대표변호사는 “일본 변호사들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만 해도 한센병이 어떤 병인지 제대로 몰랐다”고 말했다. 한국 변호사들은 한국 사람들도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에 일본 변호사들이 발벗고 나서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박 변호사는 그때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부위원장은 박찬운 현 인권위원회 인권침해조사국장이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한센인들을 돕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 변호사들은 재빨리 한센병 인권소위원회를 꾸렸다. 처음에 32명으로 시작된 한국 변호인단은 59명으로 늘었다. 한국 변호사들은 서류 작업을 진행하며 최규태 가톨릭대 한센병연구소장 등을 초청해 병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일본 후생노동성의 벽은 두꺼웠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4년 8월16일 “소록도 병원 입소자는 보상법이 말하는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보상금을 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같은 해 8월23일 소장 접수를 시작으로 법정 투쟁이 시작됐다. 소송 비용은 모두 일본 변호사들이 부담했다. 오쓰카 구사노리 변호사는 “2001년 소송에서 얻은 수임료가 이때 요긴하게 사용됐다”고 말했다.
소송을 진행하면서 오쓰카 구사노리 변호사는 이행심 할머니와 김정임 할머니의 ‘딸’이 됐다. 장기진 할아버지는 오쓰카 변호사를 ‘친구’로 생각한다. 도쿄대 법학과 박사과정 학생으로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권남희(34)씨는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돼버렸다”고 웃었다. 할머니들은 “일본 변호사들과 자주 만나다 보니 딸처럼 친해졌다”고 말했고, 오쓰카 변호사는 “평범하게 보통 할머니들을 대하듯 했다”며 웃었다. 권씨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많이 부족하지만 일본 변호사들과 한국 한센인들 사이의 끈끈한 정에 매혹돼 자원봉사 일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옛날에 고통 받았던 얘기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일이 미안하고 힘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너무나 심성이 고운 분들입니다. 일본 변호인단 입장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옛날에 했던 일들 때문에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를 너무나 따뜻하게 맞아주셨죠.” 오쓰카 변호사가 말했다. 한국인 한센인과 일본인 변호사는 일본 후생노동성 앞에서 웃고 떠들고 농담을 해가며 항의 집회를 열었고, 그 주변에서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은 “일본은 양심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완고한 성채처럼 무장된 후생노동성 건물에 하나둘씩 형광등이 켜졌다.
무리 속에서 만난 마쓰다 에쓰코는 10년 전에 한센인들을 위한 요양시설인 다마 전생원이 자리한 기요세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한국인 한센인들을 알게 됐고 곧바로 자원봉사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이번 판결이 정말 이상하게 나왔다”며 “한국 사람들이 판결 결과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 마쓰다 유지는 판결 결과를 알기 위해 회사에 휴가원을 냈다. 부부는 “소록도 문제가 이른 시간 안에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단에 통역으로 참여하고 있는 박지영씨는 “일본 쪽 분위기가 우리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조만간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결정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단과 한센인 원고들은 10월27일 오후 3시30분부터 일본 후생노동성 장관과 법무 장관과 연속 면담을 벌였다. 일본 후생노동성 장관은 “관계자들고 얘기해 이른 시간 안에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
“소록도에서 전통혼례 해줄거야”
한국에 남겨진 한센인들은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답변이 나올 때까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 릴레이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센인 원고들은 아직 귀국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권남희씨는 “소송에서는 졌지만 일본의 양심을 믿는다”며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 전 일본 한센인과 결혼한 구니모네 나오코 일본 대표 변호사의 혼례를 소록도에서 한국 전통식으로 치러줄 것”이라고 말했다. 눈물을 거둔 이행심 할머니는 시위대의 구호에 맞춰 후생노동성 건물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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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본 변호단 대표 변호사 구니무네 나오코]
승소 확신하지만 원고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빨리 문제 풀어야 할 것
구니무네 나오코는 일제 강점기 소록도 재원자 보상청구 소송을 이끈 일본 변호단(변호사 66명)의 대표 변호사다. 그는 “소록도는 1심에서는 졌지만 대만 판결 승소로 앞으로 전망은 밝은 편”이라며 “한국 한센인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한센인 가수 미아자토 신이치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소록도 판결에 대한 의견은.
=완전히 부당한 판결이다. 일본 법원은 일제의 한센인 격리 정책으로 한국의 한센인들이 편견과 차별을 받았다는 것과 그 때문에 보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2001년 6월22일 제정된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에서 소록도를 포함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보상 요청을 기각했다. 법을 편협하게 해석한 매우 잘못된 판결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만 판결과 차이가 난 이유는 궁금해하고 있다.
=재판을 진행한 판사가 달랐기 때문에, 언제나 동일한 판결이 나오기를 기대할 순 없다. 한국 소송은 도쿄 지방재판소 민사3부에서, 대만 소송은 38부에서 진행했다. 3부 판사 쓰루오카 도시히코는 “소록도가 보상법에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고 했고, 38부 판사 간노 히로유키는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2001년 만들어진 법 정신에 비춰 대만 낙생원을 보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소록도 판결은 이도저도 아닌 판결이지만, 판결문이 공개되면 일본 사람들은 누가 옳은지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후 진행은 어떻게 하는가.
=패소 판결을 한 민사3부도 보상법이 소록도를 제외하는 게 아니라, ‘포함하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보상의 세부 내용은 후생노동성 고시를 통해 결정된다. 소록도와 대만 낙생원이 보상 대상에 포함되도록 고시를 명확히 개정하면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다. 항소해도 승소할 것이란 확신이 있지만, 원고들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그보다 더 빨리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남은 것은 후생노동성 장관과 관계자들의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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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게 꿈과 희망 준다면 한일관계에도 도움 될 것
소록도 보상 소송 판결 직후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 103호실에서 만난 박영립 한국 변호인단 대표 변호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소록도 한센인들과 일본 변호사들이 큰 고생을 했는데 안타깝게 됐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대만과의 엇갈린 판결로 일본 여론이 우호적으로 돌아서고 있다”며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힘을 내면 좋을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판결의 소회는.
=한국 변호인단은 지난해 5월부터 일본 변호인단을 도와 소송을 진행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이 7번이나 일본을 오가며 큰 고생을 했는데 안타깝다. 소록도 판결에서 보듯 일본 사법부는 보상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보다는 행정부 쪽에 공을 떠넘기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만 쪽 재판부가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소록도 소송은 일본 쪽에서 먼저 시작됐다. 한센인 인권에 대해 우리 정부가 너무 무심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측면이 있다. 일본은 2001년에 관련 보상법을 만들었지만, 우리는 이제 입법 과정을 밟고 있다.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은 일제 강점기 때의 강제 격리 정책이 원인이 됐지만, 집단 학살 등 해방 이후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소송이 이뤄지는 동안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일본 시민사회와 달리 우리 쪽은 다소 무심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요소들이 재판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고 보긴 힘들다. 재판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그런 점은 존중돼야 한다.
앞으로의 전망은.
=밝은 편이다. 일단 일본 여론이 우호적이다. 일본 변호인단은 후생노동성을 압박해 소록도 한센인들에게도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고시를 개정하는 쪽으로 운동 방향을 정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에 대한 보상은 단순한 금전적 보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살아온 약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는 의미가 있다. 또 경색된 한-일 관계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해 동북아시아의 우호 증진에도 기여할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소송을 이끌어온 일본 사람들의 양심을 믿어보자. 예로부터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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