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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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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조센징 한센인!”

등록 2005-11-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본의 강제격리정책에 ‘절멸’의 고초를 겪으며 민족차별까지 받았던 동포들
대부분 70~80대인 생존자 200여명 “고국에서 우리 존재만이라도 알아줬으면…”

▣ 도쿄=글·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구니모토 마모루는 80살이다. 그는 “이제 10년만 지나면 일본 땅의 한국인 한센인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한국 이름은 이위. 고향은 전라남도 광양이라고 했다.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왔고, 그곳에서 한센병에 걸렸다. “일본에서 나는 조선인이었고, 한센인이었다”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씨는 “요양소에 입소할 때 손을 잡고 울며 매달리던 여동생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1941년 5월1일 기타다마군 무라야마 마을의 전생병원(현 국립요양소 다마 전생원·우리 나라의 소록도와 같은 시설)에 들어왔다. 그때 14살이었다. 그의 부친은 병에 걸린 아들을 면회 올 때마다 쌀과 우동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 쌀 안에는 항상 10엔짜리 지폐가 두어 장 들어 있었다. 이씨는 “그 돈으로 병원에서 노름을 했다”고 말했다.

22년의 싸움끝에 연금차별을 없애다

병원은 엉망이었다. 소록도 한센인 재판을 이끈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는 “일본의 한센병 강제 격리 정책의 본질은 환자의 절멸이었다”고 말했다. 절멸(切滅)은 말 그대로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을 뜻한다. 요양소에서는 환자들에게 병의 치료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 한센병 치료제는 병세를 완화할 수 있는 대풍자유 주사 밖에 없었다. 주사를 맞은 곳에서는 끊임 없이 고름이 흘렀다. 간호사들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염된 그의 왼쪽 허벅지 살을 가위로 잘랐다. 그는 병세가 나아지자 치료를 그만뒀다. 아무도 그에게 “치료를 중단하면 병이 재발하고, 그렇게 되면 대풍자유가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해방 이후 일본의 한국인 한센인들을 기다린 것은 극심한 차별이었다. 1959년 4월 국민연금법 도입 이후 요양소에 입소한 한센인들에게 1500엔의 장애복지연금이 지급됐지만, 한국인들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국민연금법이 수혜 대상을 일본인으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김봉옥(80·일본 이름 가네코 호시)씨는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4명이 방을 같이 썼는데, 한 명은 우리 동포였거든. 다른 사람들은 맛있는 거 사먹을 때 우리만 손가락을 빨았지. 그때 정말 힘들더라고.”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20살 때 병에 걸렸다. 비 오던 밤 아무도 없는 집을 지키다 수갑에 채워진 채 요양소로 끌려갔다. 그는 5남매의 막내였다. “동네 사람들이 순사가 나를 잡아갔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나봐.” 경찰서로 찾아온 어머니는 그를 보고 정신을 잃었다.

그 무렵 일본에는 800여 명의 한국인 한센인들이 있었다. 한센인들에게 총련이나 민단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1960년 5월 ‘재일 한국·조선인 한센병 환자 동맹’을 만들어 활동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기약 없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한국 한센인들은 1968년 ‘일본 전국 한센병 환자협의회’(전환협·현 전요협)와 함께 한센인들에게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해달라고 투쟁했다. 투쟁의 결과 연금을 못 받은 사람들에게 매달 8천엔이 추가 지급됐고(1971년), 1982년이 돼서야 국민연금법에 국적 조항이 빠졌다.

왜 그들은 ‘C형’간염에 많이 걸렸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6년 한센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가능하게 했던 ‘나예방법’이 폐지된 뒤,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1998년 7월31일 구마모토 지방재판소를 시작으로, 이듬해 3월26일에는 도쿄, 9월22일에는 오카야마로 소송은 번져갔다. 그 투쟁을 앞장서 이끈 것이 이위씨다. 그의 직함은 ‘한센병 위헌 국가배상소송 전국원고단 협의회’ 사무국장. 그는 1998년 9월 일본 법정에서 첫 피해 진술을 했다.

예상과 달리 한센인 90%는 소송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 두려움을 느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와 “국가에서 지금까지 밥은 먹여줬다”며 “배은망덕한 조선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이씨는 “내가 일본인이었으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어제까지 친구였던 사람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고 말했다.

반대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씨는 “같은 주사기로 수백 명의 사람이 돌아가며 대풍자유 주사를 맞았다”고 말했다. 그는 ‘C형 간염’ 환자다. 처음에는 주삿바늘이 잘 들어가지만 몇십 명이 지나면 무뎌져 잘 들어가지 않는다. 병원에서는 바늘을 숫돌에 갈아 다시 썼다. 1998년 현재 전체 일본 한센인 가운데 25%가 C형 간염을 갖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0.7%만이 같은 병을 앓고 있다. 2001년 5월11일 역사적인 구마모토 판결로 한센인들은 800만~1400만엔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씨는 “소록도 패소 판결은 부당하다”며 “동포들의 보상을 위해 앞장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이제 일본에 남은 한국인 한센인은 200여 명이다. 그들은 모두 70~80대의 노인이다. 지금까지 이들과 얼굴을 맞댄 한국인 정부 관계자는 하나도 없다. 김씨는 “인터넷이나 통신산업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앞섰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뿌듯하다”며 “우리는 곧 죽겠지만 고국 사람들이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쓰다 겐스케’를 기억하라

궤변으로 일제의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을 사실상 주도한 장본인



한-일 두 나라 한센인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준 일제의 강제격리 정책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 배경에는 미쓰다 겐스케(1876~1964)라는 일본인 의사가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 말기 일본 한센병 환자가 영국 대사관 앞에 쓰러진 채 방치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국 정부는 일본 정부 쪽에 “행려병자를 방치한다”고 항의했고, 이는 러일전쟁 승리 이후 문명국으로 도약하려던 일본 정부에 깊은 상처를 줬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미쓰다 겐스케다. 그는 전염력이 매우 약한 한센병을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둔갑시켜 일제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의 효시인 ‘나예방에 관한 건’(1907)과 ‘나예방법’(1931) 제정을 주도했다. 12월 출판 예정인 <사는 날 타오르는 날>(브레이크 미디어)에서 이휘 ‘한센병 위헌 국가배상소송 전국원고단 협의회’ 사무국장은 “미쓰다는 군대 내에 한센인이 뒤섞여 있으면 순식간에 군대가 병균으로 오염된다는 생각으로 한센인들을 박멸하려 했던 국수주의자였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지키기 위해 후배 의사들의 연구 성과를 부정하고,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떠들어댔다. 그는 “나병은 감염력이 매우 낮은 병으로 병에 잘 걸리는 체질이 문제”라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오가사와라 노보루의 연구(1935)와 획기적인 한센병 치료제인 프로민의 효과(1951)를 부정했다. 그는 또 “한센병이 파리·모기 등을 통해 감염된다” “나균은 한국에서 옮겨오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입국을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956년 4월 로마에서 열린 국제 나병회의에서는 “나병 환자도 결핵 등 다른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취급해야 한다”며 일본의 차별법을 엄하게 비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일본 의학계는 결의문에 귀를 닫았다. 일본의 ‘나예방법’은 한센인들에게 40년이나 더 고통을 준 뒤 10년 전인 1996년에 폐지됐다.
이휘씨는 “미쓰다는 한센병 구제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공으로 문화훈장을 받았지만, 이는 어처구니없는 사회적 허상”이라며 “소록도 한센인이 받은 고통의 책임도 결국 그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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