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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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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통장 이장 쇼쇼쇼!

등록 2005-11-02 00:00 수정 2020-05-03 04:24

본인도 모르는 부재자 투표 신청 등 불법에 멍드는 방폐장 주민투표
지원금 노린 지자체들의 장난, 선정된 뒤에도 후유증 엄청날 것

▣ 이유진/ 녹색연합 녹색평화국 국장 leeyj@greenkorea.org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대명사 주민투표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하 방폐장)을 만나 고전하고 있다. 제주도 행정구조 개편 주민투표, 충북 청주·청원 통합 주민투표에 이어 참여정부가 세 번째로 추진하는 방폐장 주민투표가 관권 개입과 향응 제공 등 각종 불법·편법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은 10월26일 기자회견을 열어 “11월2일 방폐장 주민투표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공무원들에게 할당량까지 제시

부안 방폐장 건설이 불가능해진 뒤 산업자원부는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 유치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주민투표를 통한 유치 지역 선정을 명문화했다. 11월2일 유치 신청 의사를 밝힌 전북 군산, 경북 포항, 경주, 영덕 등 4개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진행해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 선정된다.

방폐장 주민투표 부정 의혹 가운데 가장 도드라지는 대목은 유권자의 40%에 이르는 높은 부재자 투표 신청률이다. 10월4일부터 8일까지 실시된 부재자 투표 신청 결과 군산 39.4%, 경주 38.1%, 영덕 27.5%, 포항 22%로 이례적으로 높은 신청률을 나타났다. 2~3%에 불과한 일반 공직선거의 부재자 투표 신청률에 견줘볼 때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다. 전국 반핵운동 연대단체인 반핵국민행동은 “공무원과 통·반장들이 각 가정을 방문해 직접 투표할 수 있는 주민들에게까지 부재자 투표 신청을 받으면서 빚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산업자원부에서 방폐장 유치 지자체에 대해 ‘3천억+처리비용 수입’과 한국수력원자력 등 관련 기업 이전 등의 혜택을 내걸자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과다 유치경쟁이 불붙으면서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지난 10월10일 군산핵폐기장반대대책위(집행위원장 차태정)는 주소와 신청인 성명, 서명까지 같은 글씨체로 작성된 부재자 투표 신청서 41장을 공개했다. 공무원들의 조직적 개입은 지자체의 방폐장 사업추진 내부문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군산시 ‘추진전략 보고’ 문서는 “부재자 투표 유도는 찬성 주민의 기권을 방지하고 확실한 찬성표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하루에 공무원 1인당 10명 이상의 시민에게 직접 대면 또는 전화로 홍보를 한다”는 할당량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 ‘연고지 공무원 출장결과 보고서’를 보면 군산시 공무원 서아무개씨는 군산시 나운3동 69통에 ‘출장’을 나가 지금까지 부재자 신고서 42건을 받았다고 돼 있다. 심지어 ‘당면업무 추진상황 보고’에는 “사회복지 수급자와 장애인 대상 1단계 찬성 추진”이라고 활동사항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 수급권자에게 “국가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부재자 신고를 하라”고 강요한 사례도 있다. 군산핵폐기장반대 범시민대책위는 10월21일 법원에 ‘부재자 투표 무효 가처분 신청’과 ‘무효청구 소송’을 냈다.

결국 중앙선관위는 10월20일 4개 시·군에서 본인 뜻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신고한 185장의 신고서를 확인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807장은 무효 처리했다. 807장에는 사망자 신고서 3장, 형사처벌로 투표권이 없는 이의 신고서 12장, 서명이 잘못된 신고서 80장 등이 포함됐다. 민변 조사 결과를 보면 유학을 위해 해외 체류 중인데도 부재자 신고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 대리투표를 해야 하는 형국

그러나 중앙선관위가 조사한 내용은 빙산의 일각이다. 전체 부재자 신고서 24만8500여 장 중에서 1574장만을 집중 조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제 영덕반핵대책위는 10월21일부터 4일간 영덕에서 부재자 투표를 신고한 1만319명 중 430명을 뽑아 일일이 전화 확인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본인이 직접 부재자 투표를 신고한 경우는 32명(12.7%)에 불과했고, 부재자 신고를 한 적이 없거나 자신이 부재자로 등록됐는지 모르는 경우가 178명(41.4%)인 것으로 드러났다. 영덕반핵대책위는 자신도 모르게 부재자 신고가 됐다는 영덕군 주민과의 통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과 자필 확인서, 인터뷰 동영상, 관련 사진을 함께 공개했다.

높은 부재자 투표율은 또 다른 부정을 낳고 있다. 본인도 모르게 임의로 부재자 신청을 한 경우 결국 누군가 대리투표를 해야 한다. 10월24일부터 30일까지 실시된 부재자 투표를 앞두고 경북 경주우체국은 8만 통에 이르는 부재자 주민투표 용지를 등기로 배달하는 비상이 걸렸다. 경주에서만 유권자 20만여 명 중 38.1%인 7만9599명이 부재자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달된 투표용지가 지난 10월23일에는 마을회관에서 무더기로 발견돼 대리투표 의혹을 사고 있다. 투표용지 100여 장이 부재자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뜯겨진 채로 발견된 것이다.

경주핵폐기장반대운동본부는 10월23일 오후 8시께 건천읍 건천리에서 이장이 투표함을 들고 투표용지를 수거했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했다. 마을회관 안에는 이장의 책상 위에 투표확인 명부와 공보물, 투표용지, 미개봉 공보물이 널려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서는 개봉된 공보물 봉투가 100여 장 발견됐으며, 투표용지만 빠진 부재자 투표 봉투가 13장, 개봉 안 된 봉투가 34장 있었다. 운동본부는 “시골에서는 이장이 마을 사람들의 도장을 다 갖고 있다. 이장이 선거명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선거명부에 도장을 찍고 대신 부재자 투표를 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경주시 충효동에서는 중앙선관위에서만 설치할 수 있는 부재자 투표함을 통장이 아파트 주차장에 임의로 설치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방폐장 유치 찬반 부재자 투표가 시작된 10월25일 첫날부터 부재자 신청을 한 일이 없는데 투표용지가 배달된 사례가 신고되기도 했다. 또 투표소를 찾는 유권자들은 한산한 반면 거소(우편) 투표의 경우 대리발송 문제로 곳곳에서 시비가 불거졌다. 현행법은 부재자 투표 용지가 주민 개개인에게 등기로 배달돼야 하며, 각자 비밀리에 투표를 한 뒤 우편으로 부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민 청구 불가능한 법부터 문제

방폐장 유치 반대 진영에서는 유치 반대 운동은커녕 불법선거 감시에도 일손이 달린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출발부터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예산을 편성해 찬성 단체를 지원했다. 경주시는 7월8일 국책사업 추진 명목으로 12억원(예비비 3억원)을 책정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10억원을 추가 편성하려 했으나 선관위의 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군산시 3억6천만원, 포항시 8억원, 영덕군 3억원 등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영덕에서는 군수 가족을 비롯해 공무원들이 동원돼 군 주민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읍·면 단위로 책임자를 지정해 유치 찬성을 설득하는 ‘사랑방 좌담회’를 여는 등 향응도 벌어졌다. 함승규 영덕핵폐기장반대투쟁위원회 상임대표는 “공무원들이 일과시간에도 담당 지역으로 내몰렸다”고 전했다. 주민투표법 21조 제2항은 공무원의 투표운동을 금하고 있다.

송웅재 군산시장 권한대행은 10월10일 성명을 내고 “정부가 방폐장 유치 경쟁지인 경주시 편들기에 나서 군산 시민을 울리고 있다”며 “9월29일 산자부가 경주 월성 원전 2기 증설을 전격 승인해 특별지원금 697억원을 주변 마을에 지급토록 한 것은 정부의 경주시 편들기”라고 주장했다. 이에 질세라 경상북도 지자체와 정치권, 지역 언론 등은 “부재자 투표 신청률이 가장 높은 군산의 공무원 조직활동을 경계하라”면서 “원전이 많은 경상도에 방폐장이 유치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들이 앞장서 ‘망국병’인 지역감정 유발 등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다.

지자체들의 지원 남발도 잇따랐다. 이의근 경북도지사는 9월19일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 찬성률이 높은 읍·면·동에 30억원 등 총 300억원에 달하는 특별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강현욱 전북도지사도 8개의 공약을 걸고, 찬성률에 따라 혜택을 주겠다고 밝혔다. 이는 명백한 매표 행위로, 이에 대해 선관위에서 주민투표법 위반으로 유권해석을 내리자 경북도와 각 지자체가 허겁지겁 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현욱 전북도지사와 송웅재 군산시장은 아직까지도 지원 약속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방폐장 주민투표는 ‘주민투표’의 원래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주민투표법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제출한 주민투표법(안)은 “주민들은 활용할 수 없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장만 활용할 수 있는 법안”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출발했다. 실제로 주민들이 주민투표 실시를 청구하려면 불가능할 정도의 서명을 받아야(전체 유권자의 5분의 1에서 20분의 1 사이) 하는 반면, 장관은 언제든지 지방자치단체에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 있다. 서울시에서 주민투표를 청구하려면 서울 시민의 20분의 1, 즉 50만 명이 서명해야 한다.

실제 지난 제주도 행정구조 개편 주민투표는 행정자치부 장관이, 방폐장 주민투표는 산자부 장관이 요청해 실시되는 것이다. 하승수 변호사는 “현행 주민투표 제도는 ‘주민참여 제도’가 아니라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책에 대한 면죄부를 받기 위해’ 활용하는 제도로 변질될 우려가 높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2004년 7월 주민투표법 시행 이후 주민들의 청구에 의해 주민투표가 실시된 사례는 없다.

방사성 폐기물 안전관리부터 나서라

민변은 대안으로 “정부가 ‘방폐장 부지선정 및 건설절차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방폐장 부지 선정 작업을 다시 하거나 최소한 현재 문제로 지적되는 현행 주민투표법과 방폐장 유치지원 특별법 등을 개정해 주민투표 절차를 다시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해찬 국무총리는 10월25일 국무회의에서 탈락한 지자체에 대한 지원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파행적인 주민투표로 인한 후유증이 클 것이다. 먼저 정부나 중앙선관위가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부정행위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금권·관권 투표에 대한 각종 의혹과 불신, 고소 고발 문제가 불거져나올 것이다. 경쟁에서 탈락한 시·군이 스스로 불법 투표운동을 했음에도, 유치 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의 불법 투표를 내세워 승복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결국 지역 지원금 3천억원과 주민투표로 방폐장 사업 해결에 나선 정부가 더 많은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는 셈이다. 방폐장이 가는 곳마다 갈등이 깊어진 것은 정부의 핵 정책이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이해당사자가 수용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갖춰야 한다. 생활쓰레기에도 처분을 위한 관련 법령이 있는데 수백 년을 관리해야 할 방사능 폐기물에 대해서 기본법조차 만들지 않고, ‘유치지역에 대한 지원특볍법’만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방폐장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사성 폐기물에 대한 안전관리다. 법과 제도, 처분비용, 독립 규제기관을 마련하고 사회적 합의에 의한 장기 처분 정책이 시급하다. 신뢰가 우선이다. 20년 동안 부지만 찾아다니는 일이 이제 지겨울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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