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규 파동’뒤 현대와의 인연 끊고 롯데관광 등과 동거 모색
소극적인 남쪽 기업 분위기에 다시 현대와 파트너십 맺을수도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북한은 과연 현대와 헤어질 수 있을까.
정말 북한은 현대와의 질긴 인연과 신의를 끊고 다른 기업과 새로운 동거를 모색하고 있는 것인가. 북한은 현대를 따돌리고 개성 관광은 롯데관광, 백두산 관광은 한국관광공사, 평양 관광은 평화항공여행사 등과 따로 추진하려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현대의 오랜 파트너였던 북한 아태평화위원회는 9월13일 롯데관광에 개성 관광을 협의하자고, 10월4일에는 한국관광공사에 백두산 관광을 이른 시일 안에 협의하자는 전문을 보냈다. 반면 현대와는 여전히 찬바람이다. 현대 실무자들이 개성 등지에서 북쪽 관계자에게 “올해 안에 한 차례라도 백두산 시범관광을 실시하자”고 슬쩍 제안하면 짐짓 못 들은 체하며 고개를 돌린다.
묘책없는 현 회장 “기다려야 한다”
현대로서는 당장 토라진 북한을 돌려세울 묘책이 없어 보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10월10일 현대아산 가족에게 보낸 이메일에서도 딱한 처지가 그대로 묻어난다. 그는 “우리는 형제(북한)가 우리의 모습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내부 소식에 밝은 한 기업인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지금 현대와의 관계 재설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윤규 없는 현대’와 협력의 새 틀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는 얘기다. 내부적으로 새로운 방침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개성이나 백두산 관광 등 새로운 사업은 올해 안에 시작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이 기업인의 전언이다.
그렇지만 현대-북한은 이미 이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부부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북쪽이 여전히 현대에 대해 강경대응의 자세를 굽히지는 않고 있으나, 화해의 조짐도 엿보인다고 정부 관계자는 귀띔한다. 김윤규 전 부회장의 복귀 요구가 수그러든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는 것이다. 또 금강산 관광객을 하루에 600명으로 제한한 것도 조만간 풀릴 것이라는 낙관론도 솔솔 나온다.
북한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세상을 떠난 이후 현대를 곧 김윤규와 동일시했다. 김윤규 전 사장의 북쪽 파트너였던 이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통일신보> 9월17일치에 기고한 글에서 김 전 사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각별한 사이를 부각시켰다. 그는 “2000년 9월 현대가 추진하는 금강산사업지구를 몸소 찾아 민족경제 협력의 앞날을 축복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에게 몸소 6·15 시대에 길이 전해갈 불멸의 친필을 남겨주셨다”고 회고했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현대와의 불편한 관계는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북한 체제의 속성상 김 위원장이 새로운 지침을 내려주지 않는 한 아래 실무자들이 현대와의 화해를 중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근거에서다. 북한 실무자들에게 아직은 현정은 회장-윤만준 사장 체제가 낮설다. 지금은 서로 새로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시간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종혁 부위원장도 인정하듯이 북한과 현대 사이는 서로를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는 ‘금강산은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오늘의 김구’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이는 북한이 스스로 현대와의 결별을 선언하기 어려운 단면을 잘 보여준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 지도부가 김윤규 전 사장의 복귀를 물건너간 것으로 판단한다면 현대의 새 지도부와 언제 손을 잡을 것인지가 관심거리다. 현정은-윤만준 지도 체제를 정주영-정몽헌-김윤규의 다음 대를 잇는 대북사업의 새로운 파트너로 인정하는 내부 절차가 아직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현 회장은 이런 북한 지도부의 의중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북한이 현대의 바뀐 모습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현대와 북쪽 모두에게 세대교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지난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처음 시작된 이후 현대뿐 아니라 북한쪽 주역들도 대부분 바뀌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송호경 부위원장을 비롯해 현대와 동고동락했던 많은 아래 실무자들이 지난 2~3년 사이 물갈이됐다. 당시에는 오히려 현대가 북한의 새로운 파트너들과 호흡을 맞추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간신히 새로운 협력 체제가 착근되니까 이번에는 김윤규 전 사장이 비리에 연루돼 퇴출되면서 혼선이 빚어지는 모양새다.
DJ와 노무현 정부가 현대에 진 빚
하지만 북쪽 실무자들은 여전히 남쪽에는 현대만큼 믿음직한 상대를 찾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무엇보다 이들은 현대를 남쪽 대기업 가운데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유일한 파트너로 인식한다. 개성이나 금강산에서 일하던 북쪽 실무자들도 “현대아산 없이는 남쪽과 사업을 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둘은 돈독하다. 한때 개성공단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북쪽은 현대하고만 주요 사항을 협의했다. 정부와 한국토지공사 등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북 당국의 관계가 서먹서먹할 때는 중매쟁이로 자주 이용되기도 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해 7월 취임한 이후 수개월 동안 남북 당국 관계가 얼음장처럼 굳어 있을 때도 물밑에서 현대와 북한은 소통하고 있었다. 답답한 정부는 현대를 통해 북한의 의중을 탐색하기도 하고, 은근슬쩍 대화를 재개하기 위한 다리 구실을 부탁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김대중 정부 때는 현대의 중재에 따라 꽉 막힌 당국간 대화의 문이 열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북한 당국은 현대와의 사업과 그에 따른 실리를 뿌리치지 못해 당국간 대화 테이블에 나온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이전의 김대중 정부나 지금의 노무현 정부도 알게 모르게 현대에 적잖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현대는 남북 당국간 사이가 아무리 나빠져도 흔들리지 않은 징검다리 구실을 해왔다. 그만큼 현대와 북한은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러나 남북 당국간 대화가 활발해지면서 알게 모르게 현대는 찬밥 신세로 전락하기도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하여튼 지금 여건에서는 정부가 현대를 쉽게 외면할 수는 없는 듯하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0월10일 통일부에 대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현대아산과 북쪽간의 독점계약은 그것대로 유효하며, 현대아산이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여기까지 남북협력 사업을 이끌어오고 희생한 데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남북경협의 3대 사업이라면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경의선 등 남북 철도·도로 연결이 꼽힌다. 이는 현대의 구실과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갔고, 그룹의 최고경영자는 스스로 목숨까지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 겪어야 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얼마 전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은 그간의 극적인 사연을 잘 보여준다. “그 인연을 지키기 위해서 정몽헌 회장님께서 돌아가셨고, 한때 기업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현 회장은 비록 자신이 직접 일궈온 대북사업은 아니지만, 남편의 뜻을 잇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투자를 하였고. 이제 그 노력들이 눈에 보이는 결실로 하나둘씩 맺어가기 시작하고 있다”며 “비 온 뒤에 땅이 더욱더 굳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대북사업도 더욱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쉽게 덤빌 수 없는 ‘뜨거운 감자’
정부는 여전히 현대와 불편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새가 감지된다.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10월12일 한 라디오방송에 나와 현대와 북쪽이 2000년에 합의한 7대 사업 독점권의 효력에 대해 “합의 변경이 논의된 바 없기에 유효하다”며 “정부도 이런 당사자간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 당국이 무시할 수 없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정부와 현대의 지속적인 불편함은 북한에도 그리 썩 좋은 신호만은 아니다. 아직은 현대를 뺀 남쪽과의 경협사업 추진은 생각하기 어렵다. 김윤규 퇴출 문제로 속이 상해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현대와 결별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수 있다. 북한은 지난 7년간 금강산 사업만을 통해서도 막대한 유·무형의 혜택을 누려왔다. 현대는 지난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 뱃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이후 지금까지 대북사업을 위해 10억5천만달러(약 1조500억원)를 쓴 것으로 알려진다. 또 북한은 금전적 실리 외에도 현대로부터 각종 사업 노하우와 다양한 인도적 지원을 받아왔다. 북한 당국이 현대에 진 부채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사실 북한은 그동안 현대가 아닌 다른 대기업과 대규모 비즈니스를 트기 위해 탐색전을 벌여왔다. 하지만 남쪽 대기업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현대처럼 손해를 감수하면서 대북사업을 펼칠 수는 없다는 상업적 접근에 좌절감을 맞보기도 했다. 현대만큼 통 크게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국내 기업들도 아직은 북한에 대규모 투자를 하기에는 위험요인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한다. 섣부르게 대북사업에 발을 담갔다가는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에 부닥칠 수 있다는 걱정도 한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북한을 ‘형제’로 규정했다. “우리 현대아산과 북한은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입니다. 아니 그 이상의 형제입니다. 형제는 천륜입니다. 천륜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 사이에는 셈법이 그리 영악하지 않다. 사실 전문가들은 개성이나 백두산 관광을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보지 않는다. 관련 기업들은 북한과의 관계 유지나 이를 통한 미래의 수익성 있는 사업을 발굴하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으나 모든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개성관광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던 롯데관광도 한 발짝 물러섰다. 이순남 롯데관광 이사는 10월10일 “현재는 여러 조건들이 성숙되지 않아 북쪽으로부터 제안이 와도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일부 언론에서 거론되는 관광요금 1인당 200달러니 1천만달러 지원 등은 국민 여론상 곤란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북사업은 아직은 쉽게 덤빌 수 없는 ‘뜨거운 감자’다.
‘김윤규 파동’은 현대와 북한이 한번쯤은 거쳐야 하는 ‘성장통’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11월18일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7년째 되는 날이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여러 문제점이 있음에도 꾸준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더구나 이제는 대북사업이라고 적자만 보라는 법이 없음을 실증해주고 있다. 금강산 관광은 김윤규 파동만 없었다면 흑자를 실현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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