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기업인을 최고의 VIP로 모십니다” 눈물겨운 평양의 투자유치 현장
양각도 국제호텔 원형 회의실에서 신남북 경협시대의 희망을 발견하다
▣ 평양=글· 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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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기회의 땅입니다. 땅도 많고, 무엇보다 잠재적 우수 인력들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남쪽 기업인들의 북한 투자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평양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노동당 창건 60돌을 맞이하는 아리랑 공연이 한창인 가운데 북녘 땅 한복판 평양에는 쓰러져가는 경제를 곧추 세우기 위한 구호와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 평양은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고 보면 정확할 거예요.” 지난 몇년간 평양을 드나들며 전자부품 임가공 사업을 벌여왔던 한 중소기업의 관계자는 조심스럽게 귀띔한다. 평양 시내 주요 공공건물과 살림집(아파트) 집집마다 베란다 창틀이 새로 세워지고 고급 유리들이 끼워지고 있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깨진 유리창을 바꿔 끼지 못하고 비닐로 칼바람을 견뎌냈던 평양 주민들이다. 전력 사정도 눈에 띄게 나아졌다. 새벽 2시가 되어도 불이 환하게 켜진 집이 한둘이 아니다. 붉은빛을 띤 희미한 백열등 대신 눈부신 형광등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남쪽 방북 손님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고려호텔과 평양역을 잇는 창광거리는 첨단 발광다이오드(LED) 네온사인을 단 상점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이전의 칙칙한 회색빛 건물들은 엷은 분홍색과 파란색들로 새롭게 단장되고 있다. 휘발유와 디젤유를 파는 주유소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외제 승용차를 비롯해 평양 시내를 오가는 차량들이 그만큼 많이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활력과 여유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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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지금 리모델링 공사중!
적어도 겉보기에 평양은 국제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첫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주민들도 이제는 낯선 이방인을 애써 피하지 않는다. 남쪽 사람들을 보면 먼저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 정도로 친근감을 안겨준다. “평양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을 건네자, 북쪽 안내원은 한술 더 뜬다. “사실 겉보다는 속이 더 많이 변하고 있지요.” 그랬다. 북한은 지금 겉무늬뿐 아니라 내부 구조개혁이 한창인 듯했다. 특히 경제 강성대국 건설을 향한 힘찬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물론 외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아직도 답답하게 보이는 구태가 여전하고, 시행착오도 빈번하게 눈에 띈다. 하지만 이들의 사고는 이미 실리 우선주의로 굳어진 지 오래다. ‘백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을 더 중시한다. 모든 주민들이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남쪽 사람들의 몸짓과 다르지 않다. 평양 순안공항 앞 광장과 호텔, 주요 관광지 곳곳에 차려놓은 매대는 이제 너무 흔한 풍경이 되었다.
대외사업을 맡고 있다는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의 한 관계자는 “경제운용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고 귀띔해준다. 북한 지도부는 인민경제 회생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미국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국방공업 강화에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처지이지만 민생고 해결에 눈을 돌릴 만큼 사고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인민들의 의식주를 더욱 바짝 챙기겠다는 제스처다. 오늘날 평양의 모습은 이미 이런 정책과 사고의 생생한 변화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의 노동을 중시하는 기조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기술, 첨단기술을 중시하는 움직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제 남쪽에서는 사라져가는 기술도 그들에게는 매우 요긴한 것들이 많다. 북쪽 기업인들은 이런 사양기술을 수용하는 데도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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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다
남쪽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일은 북한의 대남경협 창구인 민경련에 떨어진 ‘특명’이다. 이들의 투자 유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경제 재건을 위해서라면 한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으려는 자세다. 이런 비장한 각오들은 종종 행동으로 옮겨지고, 실제 검증되기도 한다. 북한 투자 계획을 가진 남쪽 기업인들은 이제 북한에서 가장 우대받는 귀한 손님들로 통한다. 투자 대상 공장을 보고 싶다면 고급 차량을 제공하고, 어디라도 데려가서 직접 보여준다. 각종 편의를 봐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공장 현장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호텔에서 합의·서명하고 약속을 이행하라고 우기는 과거와는 딴판이다. 투자자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준다. 10월1일 남쪽 기업인 170여명을 평양에 초청해 열린 대규모 투자설명회와 개별 기업 상담회 그리고 공장 현지 방문은 북한의 이런 바뀐 자세의 결정판이었다.
설명회가 열린 양각도 국제호텔 원형 회의실은 남쪽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곳이다. 남쪽 사람들이 이곳을 들여다볼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인들은 북쪽에서 과연 어떤 사람들이 나와, 무엇을 설명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한 투자의 문을 두드려온 많은 기업인들의 궁금증을 얼마나 풀게 해줄 것인가 등 의문점들이 꼬리를 물었다. 원형 회의실 출입문이 열리자 북쪽 민경련에서는 10여명의 책임자급 인사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김춘근·전성근 민경련 부회장, 김용학 새별총회사 총사장, 여서현 광명성총회사 총사장, 손경철 개선무역총회사 총사장, 김일호 삼천리총회사 사장 등이 나와 남쪽 기업인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들 뒤에는 또 수십명의 실무자들이 남쪽 기업인들과의 개별 상담을 대기하고 있었다. 방강수 정책국장 등 정책국에서 일하는 관계자들도 얼굴을 비쳤다. 좀처럼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오지 않은 이들이다. 주로 배후에서 주요 정책을 조율하고 지시를 내려왔기 때문이다. 남북경협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이들도 북쪽의 이런 적극성에 놀라워했다.
김춘근 민경련 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6·15 공동선언 정신을 본받아 남북경협은 서로 믿고 나갈 때만 협력이 가능하다”면서 “자기 주장, 이익만 내세우면 경제사업은 잘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종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남쪽 기업인들을 상대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봐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첫 설명회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휴대전화 부품 임가공사업을 벌이는 프렉코사의 조백현 부사장은 “대북 사업에 관심이 있는 기업들이 북쪽에 사업기획서를 제출하는 등 사전 준비가 있었으면 더 내실 있는 행사가 되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투자 상담은 베이징 아닌 개성에서
북쪽도 안타깝기는 비슷한 듯했다. “남쪽 기업인들을 모셔놓고 이곳에서 회의하기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입니다.” 민경련 관계자의 해명처럼 양각도 국제호텔 원형 회의실은 주로 북한 무역성과 외무성 등과 외국인 사이의 세미나가 열리던 곳이다. 북한 당국이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나 세미나를 연 적은 있으나 남쪽 인사들을 상대로 이런 행사를 가진 적은 없었다. 이런 탓인지 북쪽 초청 파트너인 민경련의 투자설명회 준비는 남쪽 기업인들을 그리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싱겁게 끝난 투자설명회와는 달리 남북한 기업간 개별 상담회는 분위기가 달랐다. 품목별, 회사별로 짝을 지어 본격적인 상담에 돌입한 남북한 기업인들은 보기 드물게 솔직한 견해를 주고받았다.
경공업 제품, 농업 및 식료품, 의료장비 등을 취급하는 광명성총회사의 여서현 총사장은 “우리와 임가공 사업을 하려면 노동자 1인당 월급 200달러 이상은 보장돼야 한다”며 “동력(전기)은 나아지고 있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발전기도 구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노동 시간은 8시간이지만 추가 수당을 지급하면 연장 근무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민경련 관계자들은 중국 단둥사무소 전화와 팩스 번호가 적힌 명함을 남쪽 기업인들에게 일일히 나눠주며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이곳으로 연락하라. 1시간 안에 평양과 연락해 답을 보내드리겠다”며 후속 조처를 기대했다. 이날 상담회에서는 갑을합섬 등 10여개 남쪽 기업들이 투자계획서를 북쪽에 건네는 등 적잖은 성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투자상담회를 여는 데 징검다리 구실을 했던 안동대마방직회사의 김용현 기획실장은 “일부 남쪽 업체들이 제안한 협력사업은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기대 이상의 효과도 있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얼마 전에 <조선민주주의공화국 투자에로의 길>이라는 투자법규 안내 책자를 새로 내기도 했다. 이 책자의 부제도 눈길을 끈다. ‘동방의 밝은 아침의 나라에 대한 투자를 희망하는 투자가들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이 책자에는 머리에 북한의 일반적인 상황을 소개하면서 투자 정책과 조건, 외국투자 관계 법과 규정들, 투자자들을 위한 문답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투자자들의 여러 우려를 불식시키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를테면 남쪽 기업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면서도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전력 공급과 관련해 “걱정 말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나라에 풍부한 수력자원을 적극 개발하고 거기에 무진장하게 매장되어 있는 석탄에 의한 화력발전을 배합하는 방법으로 전력을 생산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입출국 편의 제공, 세금 관련 우대 조처, 노동력 제공 및 임금과 관련한 상세한 규정을 소개하고 있다.
오는 10월25일 개성에 문을 여는 남북경협협의사무소도 북한 당국의 남북경협 확대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 사무소에서는 교역 품목과 경협사업을 안내하고 남북간 거래와 교역 당사자 면담을 알선하는 동시에 투자 정보도 제공한다. 남북경협 과정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을 바로바로 풀 수 있을 것이기에 많은 기업인들이 기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기업인들은 그간 북쪽과의 교역이나 북에 투자를 하려면 중국 베이징이나 단둥까지 날아가서 협의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는 기업인에게 많은 물적 부담을 안기기도 했다. 제3국에서 접촉 채널를 통해 상담하려면 항공료, 체재비 등 많은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1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가서 북쪽 사업 파트너를 만날 수 있게 됐다. 평양과 개성에서 펼쳐지는 남북한 기업인들의 숨가쁜 교류는 신남북경협 시대의 물꼬를 트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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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용장 없이 거래하자” |
민간급 경제교류협력 전담 기구에서 북과 남은 특수 관계
김춘근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부회장은 남쪽 기업인들에게는 가장 주목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남북 장관급 회담 북쪽 대표을 지내기도 했으며, 민간 차원의 대남경협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남북경협에서 신뢰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남북경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결 과제라고 생각하는가.
=북과 남은 한민족이다. 우선 믿어야 한다. 남쪽과 중국은 다르다. 북과 남은 특수한 관계에 있지 않느냐. 우리는 중국과 사업할 때는 꼭 신용장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돈을 보내고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남쪽과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우선 서로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 같은 민족끼리 신용장을 열어 물건과 대금을 주고받아서야 되겠는가.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나 투자처럼 해서는 안 된다.
남쪽 기업인들은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와 민경련의 차이점을 궁금해하고 있다.
=민경협은 주로 북남 당국간의 전반적인 사업을 담당하는 부서다. 예를 들어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사업, 남북 경제회담 등을 관할한다. 민경련은 남쪽과의 순수 민간급 경제교류협력을 전담하는 기구다. 앞으로 남쪽 기업이 공화국에 투자할 계획이 있다면 구체적인 투자계획서를 민경련 단둥대표부나 안동대마방직 김정태 회장을 통해 보내주면 검토해서 답변을 보내주겠다.
남북 합영 1호인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가 개업식을 열었다.
=이 합영회사가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데 필요한 많은 생산설비와 자재를 제공한 여러 남쪽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합영회사의 조업으로 많은 일자리가 생겼다. 이를 위해 성의를 다해준 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 평양대마방직합영회사는 6·15 공동선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온 겨레의 열망인 통일을 앞당기자.
만족한다는 얘기인가.
=우리는 특히 안동대마방직이 어려울 때 시설자금을 대출해준 한국산업은행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게 많다. 산업은행 등 남쪽 관계기관이 안동대마방직에 금융지원을 해주어 평양공장에 더 좋은 설비를 제공했으면 좋겠다. 지금 갖다놓은 설비는 기술을 배우거나 시범적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데는 적합하나, 앞으로 합영사업으로 더 성과를 내려면 새로운 설비가 들어와야 한다.
이번에 한국산업단지공단 등에서 남한 초청을 제의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기회가 마련되면 방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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