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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고의 마술, 아리랑

등록 2005-10-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숨막히는 5장13경으로 60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세기의 걸작’
체제와 결부된 북한 문화의 정수, 단순한 외화벌이용으로만 보기는 곤란

▣ 평양=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아니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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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이 펼쳐지는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 들어서면 누구든 그 화려하고 웅장한 규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만명의 평양시내 학생들이 펼치는 정교한 카드섹션과 우렁찬 함성, 현란하고 아찔한 교예, 최첨단 영상과 레이저 빔으로 뿜어내는 아름다운 영상은 지구상에서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종합마술처럼 비친다.

<아리랑> 공연의 정식 명칭은 ‘김일성상 계관작품-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다. 90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숨가쁘게 전개되는 공연은 서장 아리랑, 제2장 선군 아리랑, 제3장 행복의 아리랑, 제4장 통일 아리랑을 거쳐 종장 강성부흥 아리랑 등 모두 5장 13경으로 구성돼 있다. 굶직한 제목들이 암시하듯 <아리랑>은 지금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선군정치의 정당성과 성과들을 부각시키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변함없는 존경과 충성의 메시지 등이 빠지지 않고 담겨 있다. 그러나 기본 뼈대는 1945년 해방 이후 60년간의 질곡 많은 북한의 역사를 파노라마식으로 회고하고, 앞으로 북한이 나아갈 웅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행복과 통일, 그리고 부흥을 꿈꾸는 미래 지향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 ‘3경 천지개벽’과 ‘4경 흥하는 내 나라’ ‘5경 더 높이, 더 빨리’는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오늘날 북한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카드섹션이 잘 정리된 논밭을 형상화하고, 두벌농사와 콩농사, 끝없이 생산되는 계란과 초원을 뒤덮은 타조도 보여준다. 북한이 특히 공을 들이고 있는 농업혁명의 성과와 이를 통해 부흥하는 나라를 그린다. 이어 카드섹션이 ‘정보산업의 시대’ ‘과학기술, 최첨단 수준으로’를 만들어내면서 아슬아슬한 교예를 선보인다. 이처럼 3경과 4경, 그리고 5경은 농업과 산업의 발전을 그리고 있고, 이어지는 6경 ‘인민의 군대’는 오늘날 선군정치로 더욱 강화됐다는 단단한 군사력을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자주강국 무궁번영’을 열망하는 꿈을 형상화한 듯한 느낌이 묻어난다. 3장 행복의 아리랑에서 선보이는 레이저를 이용한 새로운 기법의 무대장치와 공연들은 첨단 과학기술을 획득하기 위한 북한 당국의 노력들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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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섹션과 교예, 레이저 빔의 향연

그리고 4장 통일아리랑은 분단의 비극을 한탄하며, 통일을 향한 메시지를 가슴 절절하게 뿜어낸다. “이 세상 이 하늘 아래 오직 하나 갈라진 땅 갈라진 아리랑 민족이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 세월에 백발이 된 어머니가 아들 모습조차 알아볼 길 없고 헤어진 아들이 젖을 먹여 키워준 어머니마저 몰라보게 된 비극의 땅, 예로부터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하루아침에 생떼같이 갈라져 남남이 되어가는 이 땅”을 슬퍼한다. 인민배우 리지영의 애절한 목소리는 이어 분단을 불러온 외세를 향해 준엄하게 묻는다. “세계의 양심이여, 대답해보라. 외세가 가져다준 이 비극으로 하여 이 아리랑 민족이 언제까지 이렇게 갈라져 살아야 하는가.”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수정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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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가 울려퍼지면서 남북관계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형상화된다. 카드섹션이 만들어낸 ‘우리 민족끼리’ ‘2005 조국통일 3대 공조’ ‘신의주와 부산을 오가는 열차’ 등은 한 발짝 바짝 가까워진 남북관계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 장 강성부흥 아리랑에서는 남북이 손잡고 세계로 도약하는 한반도 지구본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리랑> 공연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또렷이 그리고 있다.

<아리랑>은 이처럼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당 창건 60돌(10·10)을 맞이해 지난 2002년에 연 첫 공연을 업그레이드해 선보인 두 번째 <아리랑>은 오늘날의 북한을 이해하는 핵심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연인원 10만명이 만들어내는 <아리랑>은 거의 매일 남쪽 사람들을 포함한 북한 주민 수만명이 관람해 이미 100만명을 훌쩍 넘은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8월15일 첫 공연 때 현장을 시찰하고, 몇 가지 대목은 고치라고 지시하면서 공연의 질이 크게 나아졌다는 뒷얘기도 있다.

하여튼 <아리랑>은 정치·경제적 고립으로 지칠 대로 지친 북한 주민들에게 위축된 어깨를 잠시나마 펴게 만드는 자부심으로 통하는 듯했다. “<아리랑>은 우리 인민들의 결사옹위, 일심단결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와 비겨도 모자라지 않은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지요.” 함께 공연을 보고 나온 한 평양 주민은 감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리랑>이 당 창건 60돌을 맞아 북한 주민들에게 체제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것이라면 어느 정도 먹혀든 듯하다.

<아리랑>은 순전히 당 창건 60돌을 맞아 주민들에게 사상, 군사대국에 이어 경제강성대국 건설의 비전을 보여주고, 나라 안팎의 힘을 결집하기 위한 동력으로 삼으려 한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북한 관계자들은 <아리랑>과 경제건설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흔히 공연 입장료 수익을 들먹이며 단순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북쪽 관계자는 손사래를 친다. “엄밀히 따지면 공연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것보다 공연을 완성하기 위해 실제로 지출한 비용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아리랑>을 외화벌이용으로만 볼 수 없는 근거는 또 있다. 9월 중순까지만 해도 북한 당국은 남쪽 인사들이나 외국인들의 <아리랑> 공연 초청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해외 동포들이 더러 끼어 있었지만 대다수는 평양과 지방의 근로자, 군인, 청소년 등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아리랑>을 본 남쪽 인사들이 북쪽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휼륭한 공연을 북한 주민만 보기에는 아깝지 않느냐”는 소감을 전하면서 북한 당국은 9월 말부터 전격적으로 남쪽 대북지원 단체를 중심으로 관람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공연 기간을 연장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애초 예정한 대로 10월17일에 막을 내린다면 약 1만명의 남쪽 인사들이 <아리랑>을 관람할 것으로 보인다.

“걸작품에 대한 예술가적 집착이다”

북한에서 ‘문화’라는 개념은 남쪽과 다르다. 바로 체제이면서 정치이고, 생활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끝내 거부한 한 <아리랑> 공연 책임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리랑>은 내부 결속력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창작극의 성격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세계적이고 독보적인 작품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속에 우리 체제와 현상, 방향성을 정치적으로 보여주고, 문화적 우수성을 뽑아낸 것이기도 합니다.” 왜 많은 시간과 노력, 인력을 들여서 저런 일을 하는가라는 외부 시각에 대해서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른바 걸작품에 대한 집착은 예술가들이 흔히 가지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아리랑>은 걸작품임이 틀림없지요. 무릇 다른 예술가들도 그러하듯이 우리도 그 기분을 만끽하고 싶고, 인민과 대외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숨길 수가 없지요.” <아리랑>은 한번쯤은 꼭 볼 만한 ‘세기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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