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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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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 화교에겐 기회였다

등록 2005-10-05 00:00 수정 2020-05-02 04:24

정부가 외자유치에 매달리면서부터 움추렸던 화교사회에 활기 돌아
올해 세계화상대회는 한국에 대한 세계 화상의 투자 의지 보여준 것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미국·유럽연합(EU)에 이은) 세계 3위의 경제 세력’ ‘(유태인에 이은) 세계 2위의 민족상권’. 세계 경제권력 지도에서 차지하는 화상(華商)의 높은 자리매김은 이 두 마디로 압축된다.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한국 화교의 어제와 오늘>(양필승·이정희 지음)에 따르면, 중국 밖에 거주하되 중국 국적(대만 포함)을 보유한 화교(華僑)와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화인(華人)의 인구는 대략 3천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중화권의 일부인 대만, 홍콩, 마카오 인구를 포함하면 6천만명에 이르며 이들 화교·화인은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두배인 2조달러의 유동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5억달러 이상의 재산을 지닌 기업인(화상)만 해도 15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전체 자산의 60%, 상권의 70%를 장악할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1990년대 중국이 받아들인 해외 자본의 절반 이상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화교와 화인의 자본인 것으로 추정돼 중국 고도성장의 견인차는 화상이라는 말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토지소유 제한규정, 1999년에야 풀려

화상들이 동남아를 중심으로는 이처럼 등등한 기세를 올리고 있음에도 한국에선 맥을 못추고 있다. ‘화교 거주국 가운데 유일하게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라는 말이 한국 화교의 실상을 잘 나타낸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만명을 훨씬 웃돌던 화교 인구가 지금은 2만명 안팎으로 쪼그라들었다. 화교 학교의 대표 격인 서울 연희동의 한성화교중·고등학교 학생 수는 현재 600명으로, 정점이었던 1974년(2800명)의 20%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이 땅에서 화교가 이처럼 위축세를 보인 것은 화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에서 비롯된 바 컸다는 분석이다. 1948년 12월 제정된 한국의 국적법은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속인주의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화교는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인이 되려면 까다로운 귀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화교만을 겨냥한 게 아니라 외국인 일반에 대한 조처였어도 당시 가장 큰 외국인 집단이었음을 감안하면 화교에 대한 차별로 여겨졌음직하다. 2세, 3세로 대를 물려가며 이 땅에서 살아온 화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화교들이 대만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평생을 외국인으로 산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양필승 건국대 교수는 분석한다.

한국 정부가 1960년대 들어 18살에 이른 화교에게 외국인 등록을 의무화하면서 사태는 더욱 꼬였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3년(1998년 5년으로 연장)마다 거주자자격 신고를 하도록 해, 성인 화교는 화교협회를 통해 한국 법무부에 외국인등록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대만 등지로 유학을 떠났던 학생들이 제때 등록 갱신을 못하고 일반 여행자로 취급돼 대만, 홍콩, 중국 등지로 옮겨다니는 철새 생활을 한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다. 화교는 장기거주외국인(F2)으로 분류돼 주민등록증 대신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발행하는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해야 했다. 국내 화교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행정 전산망에만 올라 있고 일반 관공서에는 입력돼 있지 않아 주민등록등본이라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닌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야 했다. 행정기관의 민원서류 신청이나 세무서 납세신고 때도 신원 조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영주권을 부여받은 ‘일본 한국인’에 견줘 ‘한국 화교’는 더 큰 불편과 고통을 받은 셈인데, 이는 2003년 영주권 제도 실시 때까지 계속됐다.

화교에 대한 경제적 차별도 있었다. 1961년 9월 제정된 토지법으로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금지돼 화교들은 몇대째 살아온 집과 토지를 잃었다. 외국인토지법은 1968년 7월 개정됐지만, 1세대 1주택에 한해 주거를 목적으로 한 200평 이하의 토지와 50평 이하의 영업용 토지 소유로 제한했다. 양필승 교수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에서 부의 주요한 축적 수단이 부동산이었음을 감안할 때 화교는 그 길을 차단당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토지소유 제한 규정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에야 풀렸다.

이같은 사회·경제적 차별에 화교 경제의 주요 영역인 무역업, 음식업 등이 침체를 보이면서 한국의 화교는 1970년대 초반 이후 이 땅을 대거 떠나게 된다. 해외 거주 한국 화교 수는 미국 1만5천, 대만 1만, 일본 6천명 등 3만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돼 한국 거주 화교 수보다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됐다.

한국 화교의 침체와 고립을 출신 지역의 한계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국제 화교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이들은 광둥성 등 남방 출신인 반면, 한국 화교의 90% 이상은 산둥성 출신으로 조사됐다. 여기서 비롯되는 언어·문화적인 이질감 탓에 한국 화교는 세계 화상 네트워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외국인등록번호’가 불편하다

침체 일로를 걷던 한국 화교 사회에 다소나마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부가 경제 난국 극복을 위해 화교 자본을 비롯한 외자 유치에 매달리면서부터다. 날이 갈수록 중국 경제가 부각되는 점도 화교·화상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1992년 한-중 국교 수립 뒤부터 중국 대륙에서 건너오는 중국인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데, 이들을 ‘구화교’와 구분해 ‘신화교’로 일컫는다. 국내 등록 중국인은 2002년 말 현재 3만6천명으로 대만 국적의 구화교를 능가하고 있다. 국내 거주 조선족 약 5만명까지 포함하면 국내 중화권의 인구는 10만명 안팎에 이르는 셈이다. 세계화상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고 국내에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것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양필승 교수는 “세계화상대회의 한국 개최는 화교 세계 주류의 동남아 화상과 변방에 자리하던 한국 화상이 손잡는 역사적 순간이자, 한국에 대한 세계 화상의 투자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화교에 대한 차별 조처는 많이 개선됐지만, 미결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는 2002년 국내 거주 외국인들에게 주민등록번호처럼 쓸 수 있는 외국인등록번호를 부여했는데, 이들 신상정보가 완전히 전산처리가 되지 않아 인터넷 이용이나 신용카드·이동통신 신청 등에서 불편을 겪고 있다. 또 한국 화교는 영주권 자격을 얻은 데 머물러 노인·장애인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화교 같은 정주 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 문제도 미결로 남아 있다. 제주도가 올해 7월 주민투표법에 따른 관련 조례를 마련해 사상 처음으로 화교를 비롯한 20살 외국인 영주권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을 뿐이다.



“2500명 방문, 최소 280억 효과”



세계화상대회 서울로 유치한 원국동 대회조직위원장



“밥 먹고 잠자는 데만 280억원가량을 쓰게 됩니다.”
제8차 세계화상대회를 서울로 유치한 주역 중의 하나인 원국동(47) 대회조직위원장은 “이번 대회에 화상 기업인 2500명가량이 방문할 예정인데, 이들이 한국에서 숙식하는 것으로만 280억원을 쓸 것으로 추정된다”며 화상대회의 효과를 강조한다.
“한국 기업인, 한국 거주 화교들까지 포함하면 참석자 수는 3천명에 이르고, 대회 기간 중 이들은 모두 일곱 차례 식사를 같이하게 됩니다. 테이블 300개를 마련해 테이블마다 10명씩 앉히고, 여기에 한국 화교를 1명씩 포함시켜 안면을 익히고 사업을 논의하는 기회를 갖도록 할 예정입니다. 한국 화교로선 한번 식사할 때마다 9명의 화상을 새로 알게 되는 셈입니다.”
원 위원장은 이번 대회가 화상과 한국 기업인 사이의 교류를 깊게 하고 상생하는 계기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화교 자본은 물류 네트워크와 금융 부문에서 강점을 띠고, 한국 기업은 기술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둘의 강점을 합치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협력해야 합니다.”
경기도 포천에서 화교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원 위원장은 한국 화교 사회에서는 엘리트 계층에 든다. 원광대 한의학과와 베이징대 중의약대(신경내과 박사)를 나온 원 위원장은 부천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베이징에 본사를 둔 바이오(제약원료) 회사 ‘해생과기(海生科技)유한공사’의 1대 주주이자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한국 화교 사회의 상공회의소 격인 사단법인 한국중화총상회(옛 한국화교경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원 위원장의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출신으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 장교였다고 한다. 국민당의 패망 뒤 일본 망명길에 오른 그의 아버지는 여수 앞바다에서 좌초하는 바람에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부친은 용케 미군 정보장교로 영입돼 군 생활을 했으며, 1·4 후퇴 때 대구에서 한국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고 한다. 원 위원장의 가족사 역시 다른 화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한국 사회의 ‘차별과 배제’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화교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한의사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여행사 가이드, 음식점을 하는 거죠.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까지 화교(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엄격히 제한돼 있어서 그럴듯한 사업을 벌일 수 없었습니다. 공직에 진출하는 길은 물론 막혀 있고…. 많이 개선됐다고 해도 아직 차별이 많습니다. 영주권제도에 머물지 말고 이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화교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장애인, 노인 등에게 최소한의 복지 혜택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이 땅에서 산 이들이 단기 체류자 취급을 받는 게 말이 됩니까?”




2007년, 일산에 차이나타운!

1만5천평에 150개 점포 들어서… 2010년엔 차이니스 팔레스와 게이트 완공

화교 자본을 중심으로 한 중화 경제권의 부각에 맞춰 국내에서도 화교들의 경제·사회 공동체인 ‘차이나타운’을 조성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화교자본 중심의 다국적 기업인 서울차이나타운(주)(대표 양필승 건국대 교수)은 경기도 고양시 한국국제전시장(킨텍스) 터 4천여평에 건축연면적 1만5천여평 규모의 ‘차이니스 스트리트’를 개설하기 위해 10월7일 착공식을 연다. 차이나타운 조성의 1단계 작업인 차이니스 스트리트 개장은 2007년 2월로 예정돼 있다.
투자비 1천억원의 차이니스 스트리트에는 정통 중국요리 식당가, 중국 명품 및 공예품, 판매시설 등 150개 점포가 들어서고 침, 발 마사지, 동방 건강증진센터, 한방 클리닉 등 중국 전통 의료기관과 체험 센터가 개설된다.
서울차이나타운은 2단계로 2009년 말까지 차이니스 가든(6500여평), 2010년까지 차이니스 팔레스와 게이트(1만여평)를 각각 완공할 계획이다. 가든에는 칭화대학 부설 청화신(新)과기원, 한-중 문화교류센터, 삼국지문화관, 중국 전통 정원이 설치되며, 팔레스와 게이트에는 특급 및 레지던셜 호텔, 오피스텔이 각각 들어설 예정이다. 일산 차이나문화타운에는 앞으로 외국인 직접투자 5천만달러를 포함한 외자 1억달러 등 총 5억달러가 투자된다.
일산 차이나타운 조성을 주도하는 양필승 대표는 지난 2000년 초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함께 한국 화교에 대한 영주권 제도 도입을 위한 입법 활동을 벌여 2003년 결실을 이뤄내기도 한 화교 문제 전문가로 꼽힌다.
19세기 말부터 화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인천시 선린동·북성동 일대 차이나타운을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 일대는 시의 도움으로 보도를 컬러로 바꾸는 등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인천 지역 외에는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거의 없다. 부산, 전북 전주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에서 차이나타운 개발을 추진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추진된 인천 영종도와 청라지구의 차이나타운 건설도 별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실정이다.
양필승 대표는 “차이나타운은 옛 차이나타운의 복원에 그쳐서는 안 되며, 소수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열린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며 “한국 아이들과 중국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공간, 그게 진짜 차이나타운이자 신차이나타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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