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카트리나로 지지율 바닥 기던 부시에겐 6자회담 합의가 탈출구
김정일로선 숨통 트이는 만큼 군 내부 강경파의 불만 달래야 하는 상황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9·19 베이징 6자회담 공동성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핵심 참가국인 북한과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양자가 ‘최적’은 아니지만, 각자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수준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회담의 결과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윈윈 게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큰 것이 사실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부시는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달성했고, 김정일은 가장 중시하는 체제 보장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윈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립과 반목을 거듭해온 두 지도자의 양보와 화해가 얼마나 강화되고 지속될 수 있을지 낙관하기는 그리 쉽진 않다. 공동성명 발표 하루 만에 이견이 노출된 경수로 제공 문제에서부터 까다로운 핵 폐기 검증과 얼마나 걸릴지 모를 북-미 관계 정상화로 이어지는 험난한 여정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면초가 부시, 마음이 급해서…
미국 언론들은 6자회담 공동성명 타결을 놓고 유독 부시의 양보를 크게 부각시켰다. 중국의 압박을 못 이긴 측면이 있지만, 경수로란 단어를 공동성명에 포함한 것은 지금껏 “북한의 핵 협박에 보상은 없다”는 부시의 대북정책 원칙의 후퇴라는 것이다. 사실 최근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부시의 지난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적잖은 변화로 지적할 수 있다. 부시는 먼저 집권 직후인 2001년 3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갖고 있다”고 표현했다. 곧바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김 위원장을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이후 부시는 김 위원장을 ‘피그미’(난쟁이) ‘버릇없이 구는 아이’ ‘위험한 인물’ ‘폭군’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비난해왔다. 북-미 사이에 뚜렷한 외교적 진전 없이 지난 5년여 동안 감정적 앙금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부시는 기본적으로 김 위원장을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치부해왔다. 올 초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명시했을 때, 부시 행정부와 북한의 상호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부시는 김 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이라고 불러줬다. 라이스는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을 무마하기 위해 “북한은 주권국가”라고 달랬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비확산프로젝트 책임자인 조지프 시린시온이 <뉴욕타임스>에서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을 바꿨고, 그러한 변화가 이번 승리(공동성명)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태도 전환은 대외정책틀의 근본적인 변화라기보다 6자회담에서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시의 절박함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욱식 한반도평화네트워크 대표는 “미국의 대북 수사가 바뀌고 있지만, 선 핵포기 등 구체적인 정책에서 바뀐 것이 없는 측면도 있다”며 “미국이 평화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아니면 나라 안팎의 위기와 현상 관리 차원에서 이러는 것인지 아직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내우외환’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부시 행정부로서는 수렁에서 벗어날 뭔가가 아쉬웠던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9월20일치도 같은 시각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이 국내에서 지지를 잃고, 핵 프로그램을 놓고 이란과의 협상이 파열음을 내고 있을 때 부시 합의(공동성명)를 즉시 환영한 것이다. 더군다나 부시의 지지율은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미숙한) 대응의 여파로 바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6자회담 공동합의문은 부시가 몸을 실어야 할 탈출구였다는 것이다.
‘경수로 제공 후 NPT 복귀’는 내부용?
김정일 위원장은 부시의 조롱과 비난에 그동안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아왔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 ‘불망나니’ ‘도덕적 미숙아’ ‘인간추물’ ‘세계의 독재자’로 응수했다. 그러나 ‘미스터 김정일’ 등 부시의 화해 제스처에 곧바로 호응할 만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는 “미국이 우리를 상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의지가 확고하다”며 6자회담에 복귀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부시 이상으로 공동성명에서 얻어낸 게 많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최대 숙원인 체제 안전을, 그것도 다자틀을 통해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지난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에서 미국의 핵공격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에 견줘 이번엔 좀더 포괄적으로 미국의 ‘불가침’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내부적으로 경제적 위기가 심화하고 국제적 고립이 가속화하는 마당에 김 위원장으로서는 핵 문제를 풀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번 공동성명은 김 위원장이 먼저 큰 틀의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김정일로서는 숨통이 트이는 만큼 군 내부 강경파들의 불만도 커질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경수로 제공 문제가 북한이 원하는 대로 매듭지어지지 않거나, 미국이 핵 사찰 과정에서 주권 국가로서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려고 들 때 더욱더 그렇다. 9월20일 외무성 담화가 ‘선 경수로 제공 후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를 강하게 천명한 것도 강경파를 달래기 위한 ‘내부용’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어쨌든 북-미가 서로 샴페인을 즐길 틈도 없이, 경수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공동성명의 해석과 이행의 험난한 과정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부시와 김정일의 머릿속 계산이 다르다는 것이 ‘너무 일찍’ 표출된 것이다. 경수로 제공을 NPT 복귀 전으로 할지 아니면 그 뒤로 할지를 놓고 북-미 사이의 입장차는 쉽게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북-미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큰 틀의 원칙에 다른 참가국들과 함께 합의했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한 구체적인 ‘등반길’은 서로의 국익이 다른 만큼 차이를 비켜가지 못했다. 북핵 사태의 해결을 완전히 매듭짓는 데 최소 3~4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등반 시간’도 문제다. 선거가 있는 해를 뺄 경우 사실상 부시의 임기가 2년여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은 김정일이 부시에 ‘올인’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공동성명 채택,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부시와 김정일은 한반도 평화라는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지만 다른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둘 사이의 불신은 서로 꿈이 다르다는 것이 점차 확인될수록 커질 가능성이 높다. 국제정책센터(CIP) 아시아국장 샐리그 해리슨은 <한겨레21>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공동성명의 채택으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공동성명은 단순히 목표에 대한 성명일 뿐이다. 협상(11월로 예정된 5차 6자회담)이 시작되면 핵심 이슈는 양쪽 양보의 연속 과정이 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로선 부시와 김정일의 득실을 따지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고 밝혔다. 부시와 김정일의 화해와 신뢰 구축이 아직 먼 길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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