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장군님 뵙기 전에 쫓아냈어야지”

등록 2005-09-08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김윤규 부회장 해임으로 토라진 모습 보인 개성 관광길의 북쪽 관계자들
북한은 현정은 체제의 새로운 대북 사업 방식에 수긍할 수 있을까
</font>

▣ 개성=글·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장군님을 만나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겼으면 모르는데, 왜 하필 장군님이 만나서 ‘잘 지내라’고 독려한 뒤에 김윤규 부회장을 몰아내려고 하느냐. 그 의도와 배경에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네다.”

지난 8월26일 개성 관광길이 처음 활짝 열리던 날 현지에서 만난 북쪽의 한 관계자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는 현대그룹 경영진에게 자신들의 곤혹스런 처지를 호소했다. 그는 “현대 아니면 다른 기업과는 비즈니스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만큼 현대와 잘 통하는 인사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충실한 아랫사람이기도 했다. 위원장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묻어난다. 지금 북한에서 최고의 가치는 위원장의 존엄을 사수하고, 의리 정치를 실현하는 일로 보인다.

현정은 회장 냉대하는 북쪽

현대도 난처해 보인다. 김 위원장의 뜻을 매정하게 뿌리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김 부회장의 비리를 그냥 넘어가자니 이미 때가 늦었다는 판단이다. 북쪽은 김 위원장과 오랫동안 의리를 맺어온 김 부회장을 현대아산의 대표이사로 복귀시키라고 떼를 쓴다. 현대는 그의 개인비리 혐의가 정도를 넘어섰으며 남쪽의 기업경영 윤리상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맞선다. 비리를 눈감아주면 오히려 나중에 김 위원장의 위상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게 현대쪽의 주장이다.

[%%IMAGE1%%]

55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개성 고향 땅을 밟은 실향민 등 500명의 시범관광객들이 한껏 들뜬 마음으로 옛 고려유적의 보고를 둘러보는 와중에 북쪽과 현대그룹 경영진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고려 500년 도읍지의 찬란한 현장인 개성 관광길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눈이 시리도록 밝은 햇살이 내내 비쳤으나, 그 이면의 그늘은 짙은 어둠으로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일반 관광버스를 타고 주요 명소를 구석구석 둘러보는 사이에도 북쪽의 이렇다 할 고위층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간이 매대를 차려놓고 남쪽 손님들에게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여성 판매원들의 정겨운 미소와 따뜻한 인사말과는 사뭇 달랐다. 그동안 현대와 북쪽 사이의 끈끈한 애정 관계를 감안하면 다소 이례적이다. 더구나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7월 중순 현 회장을 만나 “금강산은 정몽헌 회장에게 줬는데 백두산은 현정은 회장에게 줄 테니 잘 봐라”며 힘을 실어준 터다. “글쎄요, (북쪽이) 단단히 토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번에는 좀 길게 갈 것 같아요.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서로 좋을 텐데….” 오랫동안 북쪽 인사들과 만나 실무적인 협상을 벌여온 한 인사는 씁쓸하고 복잡한 심정을 숨기지 않는다. “현 회장은 사실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분신이나 다름없는데 이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북쪽에서는 김윤규가 현 회장보다 더 좋은 모양이죠.”

그러나 정작 현 회장의 얼굴에선 근심 어린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북쪽의 태도가 다소 야속할 법도 할 텐데 말이다. 그는 그저 넉넉한 미소만 짓는다.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보기 좋지 않습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가 은근히 현 회장을 추어올린다. 남다른 감회에 젖는 모습도 언뜻언뜻 비친다. 개성관광은 공단사업과 함께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훈사업이어서일까. 일반인의 개성 관광길은 합의한 지 5년 만에 트인 셈이다.

“앞으로는 경제성을 따질 것”

북쪽은 개성공단 입주기업이 첫 생산품을 낸 뒤에 시작하자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현 회장은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말을 무척이나 아끼는 듯했다. 꼭 필요한 말만 툭툭 던지는 식이다. 맏딸 정지이(28)씨와 함께 아직도 고색이 창연한 개성 시내를 둘러보면서 일반 관광객과 어울려 사진을 찍고, 8월 말 화창한 햇살을 받고 은빛 물비늘을 털며 힘차고 장엄하게 떨어지는 박연폭포 앞에서는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IMAGE2%%]

대북사업에 대한 자신감도 넘쳐난다. 그는 “9월 안에 백두산 시범관광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오히려 김 부회장을 복귀시키라고 압박을 가하면서 대북사업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북쪽 실무자들이 머쓱해할 정도였다.

현 회장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 말을 모아보면 김 부회장과 다시 손을 잡고 일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는 이제 김 부회장의 대북사업 접근방식과는 상당한 거리를 둘 전망이다. 딱히 뭐라고 선을 긋기는 어려우나 북쪽과 좀더 투명하고 건강한 협력관계가 될 것으로 예견된다. “과거 대북사업 때문에 현대그룹이 망할 뻔했다”면서 “퍼주기식 사업은 절대 안 한다. 앞으로는 경제성을 따질 것”이라는 현 회장 측근의 발언이 현 회장의 새로운 대북사업 방향을 가늠케 해준다. 사실 이 발언은 김윤규 부회장의 일 추진 방식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현대아산의 경영진은 과거처럼 북쪽이 토라지면 금세 달려가 사탕으로 달래는 식의 접근은 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다. 현 회장은 개성관광 비용과 관련해서도 단호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향후 협상을 통해 관광비용을 더 낮춰 더 많은 사람들이 개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예민한 시기에 나온 그의 거침없는 발언은 북쪽을 적잖이 당황시키고 있다는 후문이다. 북쪽은 개성관광 대가로 한 사람당 150달러를 요구하고 있지만, 현대는 이 가격으로는 관광객을 제대로 모으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쪽이 남쪽의 특정 인사를 감싸고 구명에 나선 경우는 흔치 않다. 이 역시 대남 의리 정치와 맥이 닿아 있다. 지난 7월16일 김 위원장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윤규 부회장을 만났다. 개성 시범관광은 이날 합의에 힘입은 바 크다. 김 위원장은 현 회장을 격려하는 한편, 김 부회장에게도 신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김 부위원장은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에겐 남다른 의리를 지켜왔다고 한다. 그는 6·15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헌신하다가 남쪽 사법당국에서 처벌을 받거나,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도 각별한 안타까움을 표시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김 부회장을 구하기 위한 북쪽의 악착같은 태도는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김윤규 구명의 배경에 다른 내부 사정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즉, 북한이 김정일 위원장의 존엄 유지와 의리 정치만이 아닌 다른 말 못할 사정으로 ‘김윤규 구하기’에 나설 가능성은 없을까. 과거 대북 비밀송금 사건으로 특검이 6·15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들을 조사하고 감옥에 보낼 때도 북한 당국은 성명 등을 발표하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금강산 관광객을 하루 600명으로 줄이는 등 전방위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런 조처로 더 피해를 보는 쪽은 북한이다. 현대아산은 관광객 한 사람에 70달러씩 계산해 하루 1만5천달러 정도를 북쪽에 건네주고 있다. 북한의 곤궁한 처지를 감안할 때 귀중한 수입원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런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의리를 과시하는 북쪽의 태도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각에서는 현대와의 대북사업을 통해 존립 기반을 유지해온 북쪽의 아태평화위원회가 최근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자 김윤규 부회장과의 공생을 통해 재기를 모색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현정은 회장을 길들여 김윤규 부회장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읽힌다는 지적도 있다.

[%%IMAGE3%%]

아태평화위원회의 재기 모색인가

김 부회장은 북쪽 인사들을 상대로 구명운동을 펴왔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손사래를 친다. 그는 지난 8월18일 중국으로 나갔다가 30일 귀국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북측 인사들을 만나지도 않았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북쪽의 집요한 ‘김윤규 구명운동’은 여전하다. 8·15 광복 60돌을 기념하는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쪽 고위 인사들은 남쪽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 노골적으로 김 부회장 복권에 총력전을 펼쳤다는 후문이다. 사실 김 부회장은 현 회장과 김 위원장의 면담 성사가 자신의 복권에 징검다리 구실을 할 것으로 믿었던 듯하다. 한 측근은 이때가 김 부회장이 자신을 위한 구명운동의 절정이었다고 말한다. 김정일-현정은 면담 성사는 김 부회장이 공들인 작품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을 만난 이후에도 김윤규 부회장과 결별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김 부회장의 마지막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현대와 북한의 궁합이 개성의 열쇠

그간 김 부회장은 북쪽과 찰떡궁합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진다. 한 인사는 “북에서 달라는 것은 거의 다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현대아산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개인적 판단에 의존해 운영돼왔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현 회장은 남편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비운에 스러진 것도 결국은 시대착오적인 거래 관행과 불투명한 대북사업 추진방식이 초래한 참사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현 회장-윤만준 현대아산 시대의 새로운 접근방식은 당분간 북쪽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또 김 부회장 시대의 대북사업이 그의 개인 역량에 의존해온 경향이 짙다면, 새 지도부는 시스템 경영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하려는 방침을 견지하고 있다. 김 부회장의 개인 비리도 결국 그와 몇몇 측근들의 전횡으로 빚어진 예고된 사고라는 인식도 읽힌다. 결국 북한은 현정은 회장-윤만준 사장 체제의 새로운 대북사업 방식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불가피해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7월 현 회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금강산관광 지구의 최근 사진들을 보며 “그동안 대단히 개발되었다”며 “곳곳에 (정주영 회장의) 황소 정신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려의 개성은 ‘신라의 경주’에 견줘진다. 금강산과 달리 서울에서 가까운데다 산과 물, 전통 먹을거리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고려 건국시조인 태조 왕건,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 조선 중기의 서예가 한석봉 등 역사적 인물들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고, 각종 희귀한 문화재가 지천에 널려 있다. 개성은 현재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산업단지와 더불어 관광특구로 손색이 없어 남북한이 잘만 가꾸면 대박을 터뜨릴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이는 현대와 북한이 궁합을 얼마나 잘 맞추느냐에 달려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