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비용과 효과 따지지 않고 창업주 말 한마디에 불문율 돼버린 지독한 신화
‘유령 노조’ 전술 무력화되는 복수 노조 시대 앞두고 전략 수정에 골몰</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 이제는 지독한 신화처럼 돼버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삼성 안에도 노동조합은 엄연히 존재한다. ‘에스원노동조합’과 ‘호텔신라노동조합’이 그것이다. 두 노조는 조합원이 3∼4명에 불과하지만 각각 2000년 5월과 2003년 4월 서울 강남구청과 중구청에서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받았다. 삼성 안에 존재하는 한마음협의회·노동자협의회·노사협의회 등 고충처리기구(노사협의회)와 달리 정식 노동조합이다. 물론 삼성의 일부 노동자들이 노조 설립을 시도하자 이에 맞서 회사쪽이 한발 먼저 급조해 설립신고를 마친 ‘유령 노조’다. 두 노조는 서류상의 노조에 불과한 휴면 노조이지만 사업장 단위의 복수 노조가 금지되는 상황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진짜 노동조합 설립을 원천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노조 삼성’의 신화는 1977년 제일제당(김포공장) 여공들의 노조 설립 시도가 좌절된 이후 30년 가까이 똑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초일류기업 삼성이지만 노조 설립을 탄압하는 방식은 별반 세련된 수법이 아니다. 노조 설립이 시도될 때마다 복수 노조 금지 조항을 악용한 유령 노조가 만들어지고, 그룹 차원의 회유·협박·매수 그리고 치밀한 감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지난 수십년간 삼성에서 노조 설립은 유령 노조 때문에 단 몇 시간 차이로 무산되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무노조 신화의 뒤편에는 007 작전처럼 펼쳐지는 ‘면담’을 빙자한 감시와 격리, 집요한 회유가 있었고, 당사자들은 끝내 굴복해 노조 설립 포기각서를 써야 했다. 처음에는 해고도 감수하겠다고 결의해도 온갖 유혹과 압력이 동원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게 된다. 막강한 ‘돈’과 ‘조직’의 힘 앞에서 무노조 삼성은 뚫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비용-편익 자체 분석 전혀 없어
이병철 회장뿐 아니라 한국의 1세대 창업주들은 대부분 무노조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다수 재벌 사업장에 노조가 만들어졌는데도 유독 삼성에서만 ‘노동조합 인정투쟁’이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병철 회장의 말은 처음에는 ‘방침’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갔어도 노조는 안 된다”로 바뀌었다. 무노조가 삼성의 기업문화이자 경영철학, 나아가 이데올로기로 굳어져버린 셈이다. 무노조 신념이 체계화돼 신화가 아닌 신화가 만들어진 것일까? 삼성의 무노조주의는 ‘배부른 노동자’라고 불리는 삼성 노동자뿐 아니라 삼성의 중소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한국노총은 지난해 삼성전자 수원공장 청소용역업체인 ‘애니스’를 대상으로 노조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즉각 삼성전자쪽은 협력업체 계약을 해지해버렸고, 노조는 와해되고 회사도 폐업 위기까지 몰렸다. 한국노총 수원지역지부 관계자는 “삼성전자 비정규직과 협력업체를 타깃으로 조직화 사업에 나섰는데, 오히려 협력업체 노조가 궁지에 몰리고 삼성의 대자본 앞에서 중소 영세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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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왜 노동조합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막는 것일까?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의 비용-편익을 놓고 자체 분석한 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은 “노조는 기술도입고 혁신을 지체시키고 방해해서 기업 성과를 해친다. 그래서 노조는 나쁘다”는 식의 흔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상수 상무(인사조직실)는 “삼성에서 노조가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을 비교 분석해 경영 성과를 따져본 적은 없다. 무노조 경영이 삼성의 경영 성과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하는지도 분석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치밀한 정보력과 거대 조직력을 갖춘 삼성에서도 노조만큼은 ‘왜?’에 대한 물음도 답도 없고, ‘무조건 안 된다’는 이건희 회장 일가의 뜻만 있을 뿐이다. 어떤 뚜렷한 논리도 근거도 없고 오직 노조 설립을 막는 ‘지침’과 ‘대응 방안’만 있을 뿐인데, 창업주의 말 한마디에 “죽어도 노조는 안 된다”고 믿는 지독한 신화가 삼성 무노조다. 사실 삼성 내부에서 ‘무노조 경영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다. 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노조 설립을 막는 과업을 이건희 회장을 보위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업무라고 여긴다.
일부에서는 “삼성은 노동자들의 회사 결속력과 통합력이 아주 강한 기업인데, 왜 굳이 막대한 무노조 비용을 들여가면서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지 안타깝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초일류 ‘기업’으로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과연 지혜로운 선택일까? 노동자를 무조건 억누르는 방식으로 불만을 관리하면 언젠가는 불만이 쌓여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사실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불만의 관리자’다. 여러 조합원들의 불만을 노동조합이라는 제도화된 기구가 한꺼번에 흡수하고, 이것을 회사쪽과 교섭을 통해 풀어가면서 갈등을 줄이는 것이다. 경쟁기업보다 더 많은 임금을 줘야 하는 포섭 비용과 5호 담당제처럼 늘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데 드는 비용 등 막대한 무노조 유지 비용도 줄일 수 있다. 노동조합만 상대하면 되기 때문이다.
비용-편익 자체 분석 전혀 없어
민주노총 김정근 조직쟁의실장은 “파업 현장에 가보면 삼성과 전혀 무관한 파업인데도 삼성쪽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는 일도 있는데, 그만큼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임상훈 연구위원은 “무조건 때려잡는다고 무노조가 유지되는 경우는 없다. 기업으로서 비용만 더 들 뿐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 성과도 안 나올 것이다. 노조가 있어도 종업원 대우를 잘해주고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면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삼성에서도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에 따르면 2007년 1월부터 개별 사업장에서도 복수 노조가 허용된다. 복수 노조 시대가 개막되면 유령 노조 전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노조가 있으면 삼성은 없다’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도 바뀐 제도적 환경에서는 한계에 봉착하고 전략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도 내부적으로 복수 노조 시대에 대한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노사관계학회가 9월30일 ‘고성과 조직의 노사관계-존경받는 기업의 조직관리’를 주제로 여는 정책토론회가 한 사례다.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는 삼성경제연구소다. 토론회 준비를 위해 연구자 10명이 지난 8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휼렛패커드·IBM·GM·GE·캐논·히타치 등 미국과 일본의 노조 기업과 무노조 기업들을 골고루 현지 조사했다. 미국은 북부와 남부로 두팀이 나눠서 돌고 일본은 한팀이 방문했는데, 약 1억원에 이르는 경비를 전액 삼성경제연구소가 부담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도 최근 복수 노조 시대를 앞두고 무노조 경영에 대해 종합적으로 검토해달라고 삼성경제연구소에 부탁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은 인사·조직의 경우 계열사 실무자, 삼성경제연구소, 외부 교수진이 3각 축을 이루어 새로운 기법을 연구한 뒤 그룹 전체로 확산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한 연구자는 “삼성이 무노조 경영을 유지하려면 노동조합이 있는 기업보다 노사 관계를 더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장 상무는 “복수 노조 시대를 앞두고 양대 노총이 두고 보자며 삼성 노조의 조직화를 벼르고 있고, 여기저기서서 틈만 나면 삼성 무노조 얘기가 나오면서 삼성이 불리한 환경에 놓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삼성에 노조 문제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고, 우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에서 작성한 한 보고서는 ‘비노조 경영은 목표가 아닌 결과물이다’ ‘비노조화 목표에 매몰될 경우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선진국 무노조 기업의 유형을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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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관리의 삼성’답게 복수 노조 시대에도 노동자들의 불만을 잘 관리해 무노조 경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장 상무는 “수십년간 지켜온 기업문화는 한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다”며 “복수 노조하에서 비노조 유지가 어렵긴 하지만, 노조가 생겨도 관리를 잘하면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간 간부들을 앞세워 노사 문제를 예방하고, 1년 뒤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등의 커리어 비전을 제시하면 노동조합 욕구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은 또 다수가 노조에 등을 돌리게 함으로써 소수의 노조 설립 추진세력을 고립시켜 사실상 와해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그동안 노조 설립을 시도한 직원들은 성과 측면에서 인사고과가 바닥을 기는 불만 세력들이 대다수다. 이들은 노조 설립을 앞세운 뒤 나중에 노조설립신고서와 돈을 맞바꾸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노조 결성 추진 자체가 ‘한몫’ 챙기기 위한 의도였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은 아무리 막더라도 복수 노조 시대에 노조 설립을 봉쇄하기 어렵게 되면, 이때는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와 연계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단계별 대응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노동조합이 결성되더라도 회사쪽의 관리와 통제가 가능한 노조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노조가 생겨도 관리를 잘 하면…”
삼성쪽은 “삼성만 무노조 경영을 하는 게 아니다. 휼렛패커드도 휼렛패커드 웨이(HP-Way) 같은 무노조 기업문화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삼성도 ‘삼성웨이’를 표방할지 모른다. 그러나 삼성웨이는 돈과 조직을 총동원해 무조건 노조 설립을 막고 보는 길일 뿐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김환일 연구위원은 “선진국의 무노조 고성과 작업장은 상생의 참여적·협력적 노사 관계로 가면서 노조가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지 처음부터 무노조인 사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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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노총, 삼성에 깃발 꽂기 작전</font>
1977년 한국노총은 ‘삼성재벌 사업장 노조 조직화사업’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한국노총 산하 화학노조는 제일제당 김포공장(미풍공장)에 위장 취업자 김광숙을 보내 조직화에 착수했다. 당시 13명의 여성 노동자가 노조설립신고서를 전격 제출하자 제일제당쪽은 즉각 노조파괴 작업에 나섰고, 온갖 폭력과 회유·수모 속에서 노조 설립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양대 노총이 다시 삼성 노조 조직화 사업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배부른 삼성 노동자’ 외에 수많은 배고픈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더 급했던 노동계가 2007년 복수 노조 시대를 앞두고 삼성에 노조 깃발을 꽂는 작업을 본격화한 것이다.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쪽은 “1997년 우리가 삼성 조직화 사업을 선언한 며칠 뒤 민주노총 사무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도난당했는데 삼성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징후만 보여도 곧바로 삼성이 대응하는데, 복수 노조가 허용되더라도 강고한 탄압 때문에 삼성 노동자들 혼자만으로는 노조 설립이 쉽지 않다. 활동가를 삼성 공장에 직접 투입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를 시도해 무노조 정책을 뚫겠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수원지역지부 관계자도 “삼성을 복수 노조 시대의 타깃 사업장으로 지목하고 성남지역 등과 연대해 사업을 조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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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망신도 당했다</font>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10년 전 국제적 망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95년 3월 프랑크푸르트 근교 줄츠바허에 있는 삼성전자 독일지사가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면서 노조 결성을 방해하다 현지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의 <taz> 등 현지 신문들은 삼성전자가 비록 고임금을 지급했지만, 일부 노동자들의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 설립 시도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금품으로 회유하려 했다고 보도했다. 독일의 종업원평의회는 노동조합과 별도로 사용자쪽과 근로조건 등을 협의해 공동 결정하는 노동자 대표 조직이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 한국 본사가 당시 독일지사에 보낸 전문은 “종업원평의회는 노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 철학에 위배된다. 종업원평의회가 설립되면 우리는 공장을 이전하거나 폐쇄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종업원평의회 구성은 회사쪽 방해로 결국 좌절됐고, 이를 추진하던 노동자 5명도 해고됐다. 그러나 해고자들은 프랑크푸르트 노동재판소에 제소했고 “회사는 종업원평의회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삼성전자쪽은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부 노동자들한테 종업원평의회 선거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 제출을 요구하고 금품 제공을 통한 회유에 나섰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삼성전자쪽은 특히 회사쪽 주도로 ‘종업원평의회’를 한발 앞서 구성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평의회 결성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상업은행·보험산별노조(HBV)는 삼성전자 독일지사를 프랑크푸르트 검찰 당국에 고발했고, 독일 헤센주 노동법원은 “종업원평의회 구성을 보장하라”고 다시 판결했다.
베를린=강정수 전문위원,조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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