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 실태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한센인 학살사건들
60년만에 처음으로 ‘소록도 84인 학살사건’희생자 추모식도 열려
▣ 소록도=글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도대체 누구의 지원을 받았기에, 이 학살의 주인공들이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추도문을 조심스럽게 읽어 내려가는 임두성 한빛복지협회장(59)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앞에는 1945년 8월22일 목숨을 잃은 한센인 84명을 기리는 하얀 국화들이 놓여 있었다. 60년 전 이날 한센인 84명은 총과 죽창에 희생돼 구덩이에 버려졌다. 그 위로 주검을 태우기 위한 송진유가 부어졌다. 그때 학살을 지켜본 한센인 김아무개(74)씨는 “환자들이 한줄로 줄을 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다”며 “어떤 사람은 총 세발을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이 발로 구덩이에 처넣었다”고 말했다. 참상이 일어난 곳에는 2002년에 세워진 추모비가 남아 그때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2001년 12월8일 현장을 파보니, 아직 썩지 않은 사람 유골이 여럿 발견됐다.
지난 8월22일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는 ‘84인 학살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60년 만에 처음 열린다는 추모식에는 한센인 인권보호단체 한빛복지협회 관계자들과 병원 직원들이 자리를 지킨 채 조촐하게 치러졌다. 김중원 국립소록도병원장은 “비명에 가신 님들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고, 임두성 회장은 “그날의 원한은 꼭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식은 30분 만에 끝났다.
좌우익 대립, 한센인 세계에도 파급되다
그동안 ‘84인 학살 사건’은 일제 패망 직후 벌어진 섬의 치안 공백 상태에서 의사 석사학과 오순재·송희갑으로 대표되는 간호주임들이 세력 다툼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불상사’로 정리돼왔다. 국립소록도병원이 지난 1996년에 펴낸 <소록도 80년사>는 “병원의 운영권을 빼앗긴 석사학은 병사에 내려와 환자들을 배경으로 주도권을 되찾아볼 욕심으로 ‘오순재 일파가 창고에 있는 식량·생필품을 빼돌리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말했다”고 적고 있다. 흥분한 환자들이 직원 지대로 몰려들었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직원들이 뭍에서 치안대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창원 원장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한센인들에게 책임을 돌려 진실을 외면했다”고 말했다. 잘못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못하는 사이, 한센인은 집단 광기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는 지난 7월12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한센인 인권보호 증진 방안을 위한 한-일 양국 토론회’에서 “광복 뒤 분단 체제의 형성 과정에서 좌·우익의 대립은 한센인 세계에도 파급됐고, 그 와중에 많은 한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은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진행 중인 ‘한센인 인권 침해와 차별에 대한 전면 실태조사’ 과정에서 ‘광복 이후 8년’(1945~53) 동안 벌어진 한센인 학살 사건이 여럿 수집됐는데, 대부분이 이번에 처음 발굴됐다. 이번 조사에 참여하고 있는 주윤정 연구원(서울대 박사과정)은 “조사가 진행 중이라 정확한 피해 집계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표 참조).
한센인 김기영(78·소록도 거주)씨는 “소록도라고 6·25의 상처를 피해갈 순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9살 때 병에 걸렸다. 광복 2년 전인 1943년 10월21일 소록도에 입소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섬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1950년 8월5일 인민군 40여명이 쌀자루를 둘러매고 소록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소록도에 인민위원회를 만들었다. “그저 장난이겠거니” 했는데, 위원장으로 뽑힌 문창열은 박현주·조중식 등 다른 한센인들을 모아 소록도에서 인민 재판을 열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날 소록도 상공을 날아가던 비행기에서 “아군의 승리로 수도가 회복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전단이 뿌려졌다. 겁을 먹은 문창열 등 6명은 자치회 공금 100만원을 훔쳐 장흥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패주하는 인민군을 따라붙었지만, 당시 소록도 원장 김상태가 보낸 첩자로 오인받아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김씨는 “그들은 죽어 장흥 관산읍 죽정리 모래밭에 묻혔다”고 말했다.
목포 형무소 탈옥사건에 새우등 터지다
최춘도(87)씨는 그동안 2번의 학살 사건을 비켜나 지금까지 목숨을 유지했다. 첫 번째 위기는 1949년 9월14일에 터진 목포 형무소 탈옥 사건 때문이었다. 1949년 9월16일치 <조선일보>를 보면, “9월14일 오후 5시께 수인들이 (목포 형무소에서) 폭동을 일으켜 무기, 탄약을 탈취한 다음 20분간 교전을 벌이다 약 400명이 문을 부수고 탈주했다”고 적고 있다. 최씨는 “그 와중에 탈옥수 몇명이 목포 연동에 자리잡은 한센인 마을로 숨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센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며 “옷을 바꿔 입자”고 했다. 한센인들은 순순히 응했다. 곧바로 마을에 들이닥친 경찰은 탈옥수 5~6명을 총으로 쏴 죽인데 이어, 한센인들까지도 “너희도 똑같은 놈들”이라며 두들겨 팬 뒤 총을 쐈다.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셈이다.
최씨는 “그때 나는 친구들과 노름을 하느라 마을을 비워 목숨을 건졌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구덩이 흙 사이로 이미 죽은 사람들의 머리와 다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정나미가 뚝 떨어져 마을에서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남 나주에 옮겨와 살던 무렵 느닷없이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과 경찰이 싸우는데, 경찰 두명이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부상당한 경찰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며 상처를 돌봐줬는데, 몇몇 한센인들이 인민군에게 경찰이 숨은 위치를 알려줬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국군이 나주로 몰려온 뒤, 한센인들에게 보복의 화살이 날아왔다. 국군은 “나쁜 놈들, 얻어먹으려면 곱게 얻어먹으라”며 환자들을 죽였다. 마을에는 40명의 한센인이 살고 있었다. 그 자리를 겨우 피한 최씨는 강진 읍내를 배회하다 강진 경찰서로 끌려왔다. 그를 구한 것은 평소 안면이 있던 강진 서장이었다. 그는 “너 여기 왜 왔냐”고 묻더니 “이런 시국에 돌아다니면 큰일 난다”며 최씨를 쫓아냈다.
한센인에 대한 크고 작은 폭력은 일상이었다. 오장열(75)씨는 “강진 남포에서 살때 이웃 마을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했던 일을 아직 못 잊겠다”고 말했다. ‘성한 사람’인 마을 아이가 하나 행방불명됐는데, 점쟁이에게 그 행방을 물으니 “절반은 먹고 절반은 남았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이다. 오씨는 “초저녁부터 3시간 넘게 두들겨 맞았다”고 말했다. 눈이 빨간 사람은 “아이를 먹어서 그렇다”며 더 큰 봉변을 당했다. 결국 아이는 이모 집에서 발견됐다. 임두성 한빛복지협회장은 “한센인 학살은 사회의 무관심 탓에 기록과 증언자가 남아 있지 않다”며 “정확한 피해 규모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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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기름 부어 확인방화… 실제 사망자는 84명보다 훨씬 더 많을 것
조창원(79) 원장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이다. 그는 1962년부터 섬 앞에 떠 있는 오마도를 육지와 연결하고 안쪽 바다를 메워 330만평의 간척지를 만드는 ‘오마도 대역사’에 착수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환자들은 간척지를 빼앗겼고, 조 원장은 병원에서 쫓겨났다. 그는 “한센인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부는 ‘우리 일이 아니다’고 방관했다”며 “그 때문에 살릴 수 있었던 많은 목숨이 희생됐다”고 말했다.
60년 만에 처음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에 대한 추모식이 열렸다.
=평생 이 사건을 생각했다. 소록도에서 한센인이 죽으면 화장한 뒤 망령당에 위를 안치한다. 여기 있는 84명은 소록도에서 죽었지만, 망령당에 안치되지 못했다.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나.
=소록도에 해방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45년 8월18일이다. 원장이었던 니시키가 한국 의사 석사학을 불러 창고 열쇠를 주면서 “환자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창고의 식량과 약품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다. 석사학이 환자와 직원들을 찾아가 그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병원 직원이었던 오순재와 송희갑이 “‘문둥이’들에게 먹을 것을 다 주면 우리는 어떻게 사냐”며 의사를 두들겨팬 뒤 열쇠를 빼앗았다. 해방 이후의 혼란을 틈타 창고를 강도질하려고 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
=석사학이 환자들에게 달려가 “오순재와 송희갑이 환자들의 식량과 약품을 몰래 빼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흥분한 환자들이 직원 지대로 쫓아왔다. 직원들은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며 “다음날 대표를 뽑아 다시 얘기하자”고 말했다. 소록도에는 6개 마을이 있는데, 마을마다 대표 명단을 적어 송희갑에게 건넸다. 명단은 100명쯤 됐다. 오순재는 여수 출신이고 송희갑은 고흥 출신이다. 이놈들이 당황했는지 각자 고향에 가서 치안대를 몰고 왔다.
그래서 일이 터졌나.
=그렇다. 오순재는 환자 대표 40~50명을 소록도 중앙공원에 모아 죽였고, 송희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뒤져가며 쏴 죽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손을 뒤로 묶고 지금 84인 학살 사건 위령탑이 있는 곳으로 끌고 와 총으로 쏴 구덩이에 던졌다. 그리고는 전시 공출 물자로 저장해둔 송탄유(송진 기름)를 부어 불을 질렀다. 그래서 소록도 학살 사건에는 부상자가 없다.
이후 사고 수습은.
=수습이랄 게 어디 있나. 송진과 송장 타는 냄새가 섬에 진동하는데 사건을 그냥 덮었다. 오순재·송희갑은 파면된 게 아니다. 사건이 끝난 뒤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이기지 못하고 사표 쓰고 나갔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정부는 뒷짐만 졌다. 사실 죽은 사람도 84명보다 더 될 것이다. 사망자 명단은 소록도 교회의 교적부에서 확인한 것이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 사람들의 이름은 빠졌다.
소록도 병원쪽의 기록과 다르다. 누구에게 들은 말인가.
=1961년 섬에 부임해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퇴직 직원들에게 들었다. 국립소록도병원이 1996년에 쓴 <소록도 80년사>를 보면 “환자들이 난동을 부려 치안 유지 차원에서 일이 벌어진 것”으로 묘사돼 있다. 잘못된 기록이다. 국가는 그동안 한센인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권을 무시했다. 사건이 터지면 덮기에 바빴다. 제대로 된 대책을 안 세웠기 때문에 이후 비토리섬 학살 사건이나 오마도 사건 등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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