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위락시설 비리 혐의로 현대그룹 대북사업에서 퇴출 가능성
정주영·정몽헌 회장의 마지막 가신은 독단적 경영과 전횡 일삼았나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현대아산 최고위층이 최근 금강산 위락시설 민허가 과정에서 자금을 착복한 사실이 국가정보원에 적발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인사를 법적 조처를 했을 때의 파장 등을 고려해 조용히 내부에서 처리토록 조처했다고 한다.”
지난 6월 중순, 재계는 물론 정치권과 정부쪽에 폭넓은 독자들을 갖고 있는 한 사설 정보지가 ‘CEO Report’라는 이름으로 은밀히 내돌린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이 정보지는 ‘현대아산 최고위층’으로 묘사하며 실명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이 고위층이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을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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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고위층) 인사는 고 정몽헌 회장을 대신해 현대 금강산 사업을 이끌어오면서 얼마 전부터 마치 자기가 (현대그룹의) 주인이라도 된 듯 독불장군식 경영을 일삼으면서 그룹 임직원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는데, 이번 인·허가에 개입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까지 일삼아 도덕성에까지 큰 타격을 받으며 사실상 퇴진의 수순을 밝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현대그룹 특별감사에서 혐의 드러나
이 보고서를 접한 적지 않은 정보 소식통들은 진위 파악에 나섰고 상당한 내용이 진실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 관계자들도 이 사건의 파장을 저울질하며 예의 주시하던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8월8일 국내 언론과 방송에서 김 부회장의 개인 비리 의혹을 들춰내며 현대그룹의 마지막 가신인 그의 퇴장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어떤 비리를 저질렀기에 이런 불명예스런 퇴출을 강요받고 있는 걸까. 정보 소식통들에 따르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 7월 그룹 구조조정본부 감사팀에게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에 대한 특별감사를 지시했고, 그 결과 김 부회장의 부적절한 처신과 부도덕한 경영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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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은 감사 결과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간 사설 정보지나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김 부회장의 이런저런 개인 비리 혐의를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금강산 옥류관 분점을 세우면서 40억원의 공사비 가운데 8억원을 하도급 업체에서 리베이트로 받아 이 돈으로 옥류관 지분의 20%를 친지 명의로 사들이는 등 알려진 것보다 많은 개인 비리가 적발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금강산 현지에서 관광 수입의 일부분을 가불로 빌려가서 갚지 않는 등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많이 저질렀다고 현대아산 직원들은 귀띔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국민적 지원과 관심의 산물이다. 따라서 다른 일반 사업보다 엄격한 도덕성과 투명성이 요구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 부회장의 처신은 거센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몽헌 전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사망한 뒤 현대그룹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현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KCC 정상영 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을 때, 김윤규 부회장은 뒤에서 독단적 경영과 전횡을 일삼은 셈이다.” 평소 김 부회장의 아슬아슬한 비행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현대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김 부회장 개인 비리 의혹을 놓고 외부에서 ‘그룹 내 대북사업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 운운하는 것은 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이 지난 3월 새 대표이사로 오르면서 내놓은 취임사에서 특별히 도덕지수(MQ)를 강조한 것도 김 부회장의 부적절한 처신을 겨냥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사심 없이 이 (대북)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정주영 명예회장님과 정몽헌 회장님의 유지를 제대로 받드는 길이라 생각한다”며 “그동안 열심히 뛰다 보니 우리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는지, 이른바 MQ에 이상이 없는지 돌아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강조했다.
현정은 회장, ‘김윤규 없는 대북사업’ 준비
현 회장은 일찌감치 김윤규 부회장의 비리 사실을 파악했고, 그를 겉으로는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는 조처를 취했으나 이는 사실상 김 부회장과의 ‘결별 조처’였다고 주변 인사들을 말하고 있다. 지금도 현정은-김윤규 두 사람의 공조와 새 출발을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렇게 될 확률은 높지 않아 보인다. 현대그룹 관계자들은 현 회장이 이미 감사를 통해 파악한 김 부회장의 비리 혐의를 그냥 뭉갤 경우 그룹 내 기강을 무너뜨리고, 도덕불감증을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더구나 대북사업에서 고도의 도덕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점도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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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회장은 애초 김 부회장의 개인 비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곧 자신뿐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정몽헌 회장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모욕감까지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2003년 8월 정몽헌 회장이 스스로 세상을 떠날 때 “명예회장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는 유서까지 남기며 애정을 표시했으나, 김 부회장은 이런 기대를 깔아뭉갰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현 회장은 일찌감치 홀로서기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부회장 없는 대북사업 체제’를 착착 구축해온 것이다. 김 부회장이 지난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을 성사시키는 등 최근까지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계속 중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얘기다. 이미 크고 작은 대북 협상에는 현 회장의 총괄 지휘 아래 윤만준 사장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측근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새로운 지도부는 지난 몇 개월 동안 김윤규 부회장의 옛 측근들을 가급적 배제하고, 흔적을 지우는 데 총력을 쏟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전문가들도 금강산 관광사업은 이미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고, 개성과 백두산 관광도 큰 그림이 그려진 상태라 현 회장 중심의 대북사업 추진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더구나 지난 7월 김정일 위원장은 현 회장을 직접 만나 대북사업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현 회장은 지난 8월4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리 묘소에서 고 정몽헌 회장의 2주기 추모행사를 마친 뒤 “정 회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대북사업에 헌신했던 만큼 앞으로도 대북사업에 역점을 두는 것이 그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대북사업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각오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동정론도 솔솔, 북한 당국 아쉬움 토로
한쪽에선 김 부회장에 대한 동정론도 솔솔 나온다. 임태휘 김사모(김윤규를 사람하는 모임)의 회장은 “김윤규 부회장은 홀로 남아 대북사업이라는 무거운 민족적 과제를 어깨에 짊어지고 지금까지 한곳만을 바라보며 매진해왔다”면서 “김 부회장의 확인되지 않은 개인적 일을 문제 삼아 그동안 쌓아온 공로와 업적을 폄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한 당국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김 부회장의 퇴진이 남북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김 부회장이 워낙 깊숙이 대북사업에 관여해온 탓에 국가정보원이나 통일부가 관심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귀띔을 한다. 초조하기는 북쪽 당국도 비슷해 보인다. 최근까지 그와 오랫동안 동거동락해온 북쪽 아태평화위 관계자들은 김 부회장에 대한 선처를 현 회장을 비롯해 남쪽의 여러 인사들에게 부탁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북쪽 입장에서는 남쪽에서 김 부회장만큼 든든한 사업 파트너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이가 돼버린 지 오래다. 더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7월 김 부회장을 만나 백두산·개성 관광 등 여러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합의한 지 얼마 안 돼 이런 불미스런 일이 불거지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지만 남쪽 민간기업의 인사 문제까지 노골적으로 간섭할 수도 없는 처지라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이는 남북경협의 상징적 인물로서 김 부회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얼마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러 가는 김 부회장에게 8·15 광복 60돌 기념행사로 서울에서 남북 축구가 성사될 수 있도록 힘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건설, 남북 철도·도로 연결 등 국가적 프로젝트인 3대 남북경협사업도 한때는 그의 손에서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간 김 부회장에게 쏟아진 격려와 찬사는 실질적인 대북사업의 개척자였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나 고 정몽헌 회장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들은 여러 가지 흠이 있음에도 남북경협사업을 통해 냉전의 벽을 허물다 비운에 스러져간 정주영·정몽헌 부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현대그룹에서 남은 유일한 가신으로 불리는 김 부회장은 정주영·정몽헌 부자를 대신해 아낌없는 영광을 누려온 셈이다.
비리 혐의 부정하고 잠행 계속
물론 홀로 남아 대북사업을 어렵게 이끌어온 김 부회장의 지난 공로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현대아산 직원들도 그가 정주영·정몽헌 부자와 함께 이뤄놓은 대북사업 신화가 비리 의혹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가 스스로 명예롭게 물러나거나, 부회장 자리에 그대로 남아 대북사업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라는 배경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김 부회장이 비리 혐의를 부인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핵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부회장은 개인 비리 의혹이 불거진 이후 며칠째 외부와의 접촉을 삼가고 잠행을 계속하고 있다. 대북사업의 초기 개척자 가운데 살아 있는 유일한 인물인 김윤규 부회장의 ‘아름다운 퇴장’을 기대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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