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텅 테이프의 미래]
긍정도 부정도 못하면서 274개 도청테이프 처리 고민하는 검찰
만병통치약 될 수 있지만, 치명적인 극약으로 계속 남을 수도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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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검 청사에는 요즘 한여름 무더위를 무색케 하는 냉기가 감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 서창희)가 지난 7월27일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120분짜리)를 입수한 뒤부터다. 뜻하지 않게 ‘판도라의 상자’를 보관하게 된 검찰은 전례 없이 당혹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웬만한 대형 사건에는 눈 하나 깜짝 않던 평소 모습과 사뭇 다르다.
이틀 묵힌 테이프, 집중되는 거대 권력
검찰은 전 미림팀장 공운영(58·구속)씨의 집에서 문제의 테이프를 압수한 직후 혼란에 빠졌다. 테이프 입수 사실을 이틀 뒤에야 언론에 공개할 정도로 우왕좌왕했다. 검찰은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도청물인지 확인하는 데 이틀씩이나 걸린 것을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검찰이 도청 테이프의 처리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검찰이 이처럼 혼란에 빠진 이유는 도청 테이프가 지닌 폭발력 때문이다. 공씨는 국정원에 체포되기 직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도청 범위는 대통령 빼놓고 최상층부 모두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공언’했다. 정·관·재계 등 권력 상층부 인사들 사이에 정치·사회·경제 등 각 분야와 관련해 이뤄진 광범위한 대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공씨를 상대로 테이프 수거에 나선 전 국정원 감찰실장 이건모씨도 “도청 자료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상상을 초월한 대혼란을 야기하고,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걸친 붕괴가 올지도 모르는 핵폭탄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공개된 ‘X파일’에 등장하는 홍석현-이학수씨의 대화 못지않은 충격적인 내용이 있음을 내비쳤다. “공운영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밀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의 발언에서도 추가로 발견된 도청 테이프의 위력이 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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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는 검찰에게 이중적인 존재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치명적인 극약이 될 수도 있다. 엄청난 비밀을 손에 쥐고 있다는 점에서 검찰은 정치권력에 더할 수 없이 두려운 존재가 된다. 국정원과 달리 수사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힘은 국정원보다 더 위력적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임창욱(구속) 대상그룹 전 회장에 대한 봐주기 수사 논란으로 입지가 흔들렸던 이종백 서울지검장이 다시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됐다는 분석이 검찰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수사팀이 도청 테이프 내용을 파악했다면 당연히 수사 최고책임자인 이 검사장에게 보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일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이 검사장에게 힘이 쏠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검사장은 노무현 대통령 사시 동기(17회)로, 역시 같은 기수인 정상명 대검 차장과 함께 유력한 차기 총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반면 민감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검찰은 정치 권력의 끝없는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테이프 내용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검찰 스스로 법을 어겼다는 비난도 받게 된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도청 내용을 공개하는 것도 불법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검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도청 테이프의 외부 유출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국정원이 그 좋은 예다.
검찰이 “도청 테이프 내용을 들어봤느냐”는 질문에 흔들림 없이 ‘NCND’(Not Confirmed Not Denied)로 일관하는 게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외부의 견제도 피하고, 또 어떤 세력이든 검찰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274개의 테이프 내용을 일일이 다 들어보지 않고 불법 도청물인지 확인만 한 뒤 봉인을 해서 서울중앙지검 압수물 창고에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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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떡값 받은 검사들은 어떻게?
검찰은 274개 도청 테이프 내용 수사에 대해서도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검찰은 X파일의 공개로 삼성의 불법 로비 의혹이 불거졌을 때 ‘독수독과 이론’(독이 있는 나무에서는 독이 있는 열매가 열린다는 이론)을 내세워 수사를 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최근 검찰 내부에 미묘한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검찰은 최근 대검 연구관 등으로 팀을 꾸려 법리 검토 작업을 한 결과, ‘독수독과 이론’이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한 수사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독수독과 이론은 미국에서 확립된 이론인데도, 미국 법조계에서조차 찬반 논쟁이 일고 있을 정도로 불완전한 이론이다. 또 불법 도청 테이프가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증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수사의 근거로 삼는 데 문제가 안 된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일선 검사들은 대체로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한 수사에 부정적이다.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 수사팀의 한 검사는 “불법 증거를 바탕으로 수사를 하는 것은 위헌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검사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말했다. 수사팀의 또 다른 검사는 “아무리 천인공노할 범죄의 단서가 있다 하더라도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공소 유지가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여론에 따라 테이프 내용을 수사하는 것은 자칫 검찰 조직을 뿌리채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검찰이 도청 내용에 대해 수사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힐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이미 공개된 X파일에서 삼성한테서 검찰 고위 간부들이 떡값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 부장검사는 “삼성 관련 의혹을 수사하지 않는다면 검찰 스스로 삼성의 떡값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검찰의 명예를 걸고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검사는 “검찰이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처지에 삼성 관련 의혹을 수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이번 기회에 검찰의 자존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이미 공개된 삼성 관련 의혹은 수사하되, 274개 테이프의 내용은 특검으로 넘기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특검의 필요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어서 검찰의 존립 기반을 검찰 스스로 흔드는 모순이 발생한다. 김종빈 검찰총장 등 검찰 수뇌부는 내용 수사 여부에 대해 곧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든 검찰로서는 어느 정도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비판은 확고한 수사 의지만으로 돌파할 수 있다. 검찰이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어떤 지혜를 짜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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