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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이중징용의 처절함!

등록 2005-08-18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내엔 덜 알려진 ‘오지 탄광징용촌’ 우글레고르스크와 샤흐초르스크를 가다
15만명 중 10만여명이 다시 일본으로 끌려갔지만 아직도 생사확인 못해

▣ 우글레고르스크·샤흐초르스크= 홍용덕 기자/ 한겨레 사회부 ydhong@hani.co.kr

“얼음 위로 보니 배가 성냥갑처럼 작았지.”

1938년 4월, 박영화(83) 할머니가 징용 간 ‘아버지를 찾겠다’며 어머니와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 항구에 도착했을 때, 항구는 꽁꽁 얼어 있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화물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꼭 한달. 배에서 내린 박 할머니는 ‘말파리’(말이 끄는 짐차)를 타고 얼음 위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하루 더 걷고서야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동포 찾아 800km를 돌며 위령제

박 할머니의 아버지는 1944년 일본의 패전 직전 일본 규슈의 한 탄광으로 재징용됐다. 일본이 패전한 뒤, 이번에는 아버지가 자신의 ‘가족을 찾겠다’며 ‘밀선’(밀입국배)을 타고 사할린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배가 고파 감자 껍질을 주워먹고 일했다’는 아버지는 ‘풍’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 5년 뒤에 숨졌다. 박 할머니도 사할린에서 징용된 동포와 만나 결혼했지만 그 남편도 죽고 이제는 혼자다.

“(유일한 혈육인) 언니가 한국에 영주 귀국해 사는데 나는 못 갈 것 같아.” 박 할머니는 부부여야만 영주 귀국도 가능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67년 전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우글레고르스크 항구를 기자와 함께 찾은 할머니의 눈가에는 이내 눈물이 고였다.

제정 러시아 시대 정치범과 죄수들에겐 악명 높은 ‘유형지’였던 사할린.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섬>의 무대이기도 했다. 이 중 북위 50도 근방에 위치한 우글레고르스크와 샤흐초르스크는 10월부터 시작된 겨울이 이듬해인 4월까지 이어져 쌓인 눈이 녹지 않는, 사할린 탄광 지역 중에서도 ‘오지’에 해당된다. 겨울철 영하 30∼40도가 보통이고 사람 키높이만큼의 눈이 내리면 육로가 거의 끊겨 고립된다. 이 때문에 사할린의 주도인 유주노사할린스크나 코르사코프와 같은 도시 지역에 비해 국내에는 덜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이들 지역은 사할린의 대표적인 석탄 생산 지역이다. 일제하인 1944년에도 사할린에 있던 23개의 탄광 중 13개가 우글레고르스크와 샤흐초르스크 지역에서 가동됐고, 한인 동포 수도 제일 많아 사할린 전체 피징용 한인 중 67%가 이곳에 끌려와 일했다.

지난 7월27일~8월1일 사할린 800여km를 돌며 치러진 ‘광복 60돌 사할린 피징용 한인을 위한 위령제’(공동대표 몽산 스님 등)는 오지의 탄광촌으로 끌려간 한인 동포를 찾는 일로 시작됐다. 유주노사할린스크에서 이들 도시까지는 대략 320km다. 풀풀 날리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꼬박 달리기를 6시간. 5층 높이의 낡고 우중충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어로 각각 ‘석탄의 도시’와 ‘광부의 도시’라는 뜻의 우글레고르스크와 샤흐초르스크다.

마을 영화관에 쌓아놓은 주검들

이곳에서 용접일을 하는 샤흐초르스크 한인회 부회장 김원진(65)씨는 유복자다. 아버지 얼굴도, 이중 징용된 아버지의 생사도 60여년이 지났지만 모른다고 했다. “재징용된 아버지가 떠나고 사할린에 덩그러니 남은 가족의 삶은 생존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김씨의 아버지처럼 사할린에 끌려온 15만명의 한인 동포 중 10만여명이 일본 패전 직전인 1944년 ‘전환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일본 본토로 재징용(‘이중징용’)됐다. 재징용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해달라는 요구에 일본 정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사할린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징용된 3200명의 한인 동포 기록이 발견되긴 했다. 그 속에는 피징용과 재징용의 아픔이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탄광 1곳당 한해 80만∼100만t의 석탄을 캐냈던 이들 지역의 탄광은 샤흐초르스크의 미쓰비시 탄광만 남겨둔 채 지금은 모두 문을 닫았다. 당시 지하 50~70m에서 채굴하던 미쓰비시 탄광 지하갱도는 현재 200m까지 내려갔다. 어두운 갱도 끝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석탄을 캐던 한인 동포들의 자리도 이제 러시아 광부들의 몫이 됐다.

미쓰비시 탄광 관리자 블라지마르 알렉세이비치(57)는 “일본인들은 한인 광부들에게 제일 힘들고 더러운 일을 시켰고 폭발사고도 났던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1942년 발생한 탄광 폭발사고로 숨진 동포는 70여명. 갱도에 가스가 차 위험했지만 전쟁 중 석탄을 캐는 일이 더 급했던 일본인들이 채탄 작업을 강행한 결과였다. 당시 주검들을 마을 영화관에 쌓았는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이 즐비했다고 했다. 김인철(73)씨는 “밤마다 ‘왜 우리를 이렇게 위험한 곳에 내몰았냐’는 죽은 이들의 전화가 일본인 탄광 간부에게로 걸려왔다”고 전했다. 폭발사고로 숨진 한인 동포들을 위로한다며 일본인들이 세운 위령탑은 밑동이 부러진 채 잡초에 덮여 있었다.

지난 7월28일 샤흐초르스크에서 열린 첫 위령제는 쓰러진 위령탑 위에서 치러졌다. 위령제를 위해 그득한 잡초를 베어내야 했다. 들꽃과 제물이 올려지고 성무 스님 등 조계종 범패공연단의 바라춤에 이어 나직한 독경소리 속에 명원문화재단 정기진 지회장이 영전에 맑은 차를 올리자(궁중 헌다), 하늘을 선회하던 까마귀떼가 ‘꺼∼억 꺼∼억’ 긴 울음을 토해냈다.

탄광 앞을 가득 채웠다는 한인 동포들의 집단 합숙소인 ‘나가야’ 역시 미쓰비시 탄광 앞 1채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5~6평 크기씩 1자 형태의 방 8개로 나눈 합숙소는 목재로 지어졌다. 한인 동포들은 이 나가야에서 고된 노동을 끝내고 대개가 맨 바닥에 한뼘 크기의 이불을 쌓은 채 1년에 절반을 차지하는 겨울 삭풍을 견뎠다고 한다.

일본인은 취업까지 알선하며 귀국…

나가야에서 만난 카마로와 나제즈다 이와노브나(55)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없다”며 “겨울철에는 너무 추워 아파트로 간다”고 했다.

이어 열린 29일 우글레고르스크시 공회당 위령제에는 도시 전체 한인 동포 1천여명 중 절반에 가까운 500여명이 좌석을 메웠다. 젊은 국악인들로 이뤄진 ‘아우라 꼬레아’가 춘향전의 한 대목인 ‘사랑가’를 공연할 때는 주름 잡힌 동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위령제에서 만난 한덕현(82) 할머니는 “고맙다”며 기자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결혼 나흘 만에 충북 청주에서 남편이 강제 징용되자 ‘죽어도 남편 있는 사할린 가서 죽어라’는 친정아버지 말에 떠밀려 사할린에 왔을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18살. 꽃다운 새색시는 사라지고 우글레고르스크에서도 1시간여를 더 가는 벽촌에서 지금은 홀로 살고 있다.

이번 위령제를 이끈 몽산 스님은 “위령제 내내 동포들의 아픔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위령제 추진위 김성재 사무국장은 “나라 빼앗긴 설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분들이 사할린 피징용 동포였다는 것을 이곳에서 뼈져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현재 한인 동포 3∼4세를 포함해 사할린 거주 한인 동포 수는 3만8천여명. 그러나 한때 4만여명에 이르던 일본계는 300여명 정도만 남아 있다. 가나모리(76·한국 이름 강병자) 우글레고르스크 일본인협회장은 “일본은 정기적인 고국 방문 외에도 영주 귀국 희망자는 모두 수용해 집도 주고 취업을 알선해 귀국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됐거나 해방 이전에 사할린에서 태어나 고국행을 기다리는 ‘사할린 1세대’는 줄잡아 2천에서 4천명선. 그러나 고령화로 그 수는 급속이 줄고 있다.

이수진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장은 “1년에 12~14차례 이뤄지던 고국 방문이 지금은 4차례로 줄어들었고 일본 적십자사에서 최근 수개월째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만나주지도 않아 내년 계획도 못 세웠다”고 전했다. 아직도 사할린 한인 동포에게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였다.



“우리의 귀국을 막지 말라”

정치권,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 귀국 및 정착을 위한 지원법 곧 상정



지난 7월28일 러시아 사할린주 샤흐초르스크 피징용 한인 동포 위령제에서 만난 최서운(67) 할머니는 “영영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실망과 불안감을 나타냈다. 최 할머니는 8월11일 영주 귀국할 예정이었다. 사할린에서 일본 규슈로 재징용된 아버지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지내오다 지난 5월 한국에서 영주 귀국 신청을 받아들여 그동안 살던 집과 살림살이도 다 팔았는데 갑자기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날벼락’을 맞았다.
“갑자기 어제 연락이 와서 이번에 영주 귀국 대상자 8가구 중 2가구는 집이 모자라 못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요”라며 최 할머니는 탄식했다.
최근 한명숙·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사할린 강제징용 한인동포 영주귀국 및 정착 지원법’ 제정 논의가 활발하다. 한명숙 의원쪽은 이르면 9월 초 입법공청회를 거쳐 올 하반기 정기국회에 법안을 상정할 계획이다.
그동안 피징용 한인 동포들의 영주 귀국은 일본 적십자사의 재정 지원을 토대로 한국 정부가 이들의 최저생계비를 보전하는 형태로 이뤄져왔다. 이번에 추진되는 지원법 역시 일본의 재정 책임을 분명히 하고 이에 따른 한국 정부의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할 예정이다.
인천대 노영돈 교수(법학과)는 “그동안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사할린 1세대 동포의 귀국 및 지원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 정작 이들 세대는 급속히 노령화되어 숨져가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 귀국 및 정착을 위해 한국 정부가 선지원하고 일본 정부와 외교 협상을 통해 재정적 책임을 당당하게 요구해 이를 관철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뒤늦게나마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한 몸에 안고 60여년을 낯선 땅에서 지내온 사할린 동포들의 ‘망향의 꿈’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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