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대우 BFC에서 비자금 탄생?

등록 2005-06-21 00:00 수정 2020-05-02 04:24

매년 5조~8조원 관리하고도 임원이 모르던 비밀 금융조직
DJ 측근 조풍언씨가 대표인 페이퍼컴퍼니로 돈세탁 뒤 장부 외 자금 조성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5년8개월에 걸친 국외 도피 생활 끝에 지난 6월14일 귀국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BFC’(British Finance Center)를 거친 자금 흐름이 꼽힌다. BFC는 대우가 영국에 뒀던 비밀 금융조직으로 대우그룹의 국외 금융을 종합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직까지 여기로 들어온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국외 금융 비정규 조직이 자금의 블랙홀로

BFC를 통한 자금흐름의 진상 규명은 고사하고 BFC의 실체를 두고도 논란이 있을 정도다. 김 전 회장쪽에선 BFC는 비밀계좌를 관리한 조직이 아니고, 기업경영의 필요에 따라 개설한 (주)대우의 공식계좌 관리 조직이었다고 주장한다. 계좌 운영 과정에서 외환거래법을 위반한 데 따라 음습한 이미지가 덧씌워졌을 뿐 ‘감춰진 비밀계좌’가 아니라 ‘공개된 변칙계좌’를 관리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논란은 BFC가 처음 생겨날 때와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성격이 변질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BFC의 실체에 대해선 대우의 분식회계 등에 대한 올 4월의 고등법원 판결문에 비교적 자세히 기술돼 있다. 이에 따르면 BFC는 1970년대 당시 (주)대우의 전신이었던 대우개발의 건설 부문 금융 파트의 ‘텔렉스 코드명’이었다. 그 시절 총무 파트의 코드명은 BGA, 구매 파트의 코드명은 BGM이었다.

대우개발은 당시 리비아 건설 현장을 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규제가 적고 자금이동이 편리한’ 런던에 사무실을 두고 텔렉스 코드 BFC를 사용해 리비아 건설 현장의 대금을 받는 업무 등을 수행했다. BFC는 1981년 12월 대우실업과 대우개발이 (주)대우로 합병한 뒤에도 여전히 회사 ‘건설 부문의 해외 금융 파트’ 구실을 맡는 ‘비정규 조직’으로 유지됐다. 영국 법인과는 철저히 분리된 채 대우의 해외 금융 파트 소속 직원들이 파견돼 근무했다.

BFC의 성격이 결정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건 1983년께였다고 한다. 당시 (주)대우는 미국에서 무역 거래로 입은 1억달러가량의 손실을 감추기 위해 영국, 독일, 홍콩 현지 법인의 여유자금을 BFC가 관리하던 (주)대우의 계좌로 보내 이를 미국 법인에 지원해주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 건설 부문 금융에 무역 금융이 뒤섞이면서 성격이 변질되고 비밀스런 모양새를 띠게 됐다. 텔렉스 코드명에서 비롯돼 (주)대우의 해외 금융 파트 구실을 한 비정규 조직이 ‘블랙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대우가 리비아 건설 공사 현장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현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으면서부터 비밀 유지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1995년부터 ‘세계경영’을 깃발로 자동차 사업을 세계 곳곳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 정도가 심해졌다. 현지 법인 이름으로 해외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BFC 계좌로 입금하고 그 자금으로 외국환관리법이나 공시된 재무제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신속하게 투자하는 방편으로 활용하면서 국내 담당 직원들과 전화할 때조차 ‘은어’를 사용할 정도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게 됐다고 한다. 그 결과 대우그룹의 임원급들조차 BFC 입출금의 현황과 수지는 물론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할 정도였다.

국내 담당 직원과 통화 때도 은어 써

BFC는 한때 37개의 국외 계좌를 관리하면서 국외 법인 이름으로 현지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자금을 운용해오다 외환위기를 앞뒤로 극심한 자금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해외 금융기관들의 상환 요구는 갈수록 높아지는데 BFC를 통해 투자한 사업자금의 회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BFC 계좌를 거쳐 대우자동차 등 그룹 회사들에 송금돼야 할 수출 대금이 BFC의 채무 변제에 쓰이는 불법 행위가 벌어지게 된다. 금융권 안팎에선 이런 불법·변칙 거래 과정에서 비자금이 조성되고 국내외 정치권 등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란 의구심이 제기돼왔다.

이에 대해 대우그룹 홍보담당 이사 출신으로 김 전 회장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는 백기승 유진그룹 전무는 “BFC의 계좌는 외환 당국의 승인 없이 개설되긴 했지만, 회사의 공식 계좌로 자금 전문가에 의해 정상적인 관리가 이뤄졌고 모든 처리는 전산(1990년 이전은 수기 처리) 기록으로 남아 있다”며 “비밀스런 거래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백 전무는 “BFC의 입출금 내역이 3만건을 웃도는 것만 보더라도 이는 대우 전체의 자금관리 계좌였지, 재산을 빼돌리는 비밀계좌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판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정법(외환관리법)을 위반한 건 인정하지만, 비자금 계좌가 아닌 사업상 편의를 위한 편법 계좌를 관리했을 뿐이란 주장이다.

BFC를 거친 자금흐름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은 대우 사태 뒤 이뤄진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와 예금보험공사(예보)의 조사다.

금감위는 1999년 12월 26명의 조사요원으로 이뤄진 대우조사특별감리반(반장 이성희 금감원 회계감독국장)을 꾸려 9개월 동안 대우그룹 부실·분식회계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BFC도 조사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금감위 조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검찰 수사에서 김 전 회장이 BFC를 통해 1999년 8월까지 관리한 자금은 매년 5조~8조원 총 25조(200억달러)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해외 공장 인수와 운용에 투입된 자금과, 해외 차입금 상환 등을 뺀 13억달러의 사용처는 오리무중이었다.

예보 조사에서는 BFC를 통한 재산 은닉의 한 사례가 적시되기도 했다. 2001년에 이뤄진 부실 채무기업 조사에서였다. 예보는 그해 11월 조사 결과 발표에서 김 전 회장은 BFC 자금 4430만달러를 페이퍼컴퍼니에서 세탁한 뒤 장부 외 자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이 자금으로 페이퍼컴퍼니인 홍콩KMC와 미국 라베스 명의로 외자 유치를 가장해 대우정보시스템 등 우량 계열사를 인수했다는 내용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페이퍼컴퍼니의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재미 무기 중개상 조풍언씨라는 점이다. 정치권과 연결돼 구구한 억측을 낳는 대목이다. 두 페이퍼컴퍼니가 갖고 있는 수백억원어치의 대우계열사 주식에 대해 자산관리공사(캠코)는 환수 소송을 제기해놓았으며, 오는 7월 1심 판결이 나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검찰 주변 “조 단위의 비자금 조성”추정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백기승 전무는 “어떤 자금을 비자금으로 만들려면 회사의 회계에서 빼내 이탈을 시켜야 다른 용도에 쓸 수 있는 것인데, BFC의 자금은 (주)대우라는 동일한 회사의 다른 계좌로 이동돼 회계 내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BFC를 통한 자금흐름과 사용처의 진상이 장막에 가려져 있어 비자금 조성의 의혹은 여전히 살아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BFC로 흘러들어간 돈에서 조 단위의 비자금이 조성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 전 회장의 입을 통해 BFC와 비자금의 실체가 얼마나 드러날지 세간의 눈길이 집중돼 있다. 검찰 안팎에서는 김 전 회장과 함께, 마지막으로 BFC의 최종 책임자를 맡았던 이동원 전 (주)대우 런던법인 부사장을 BFC의 진실에 접근해 있는 핵심 인물로 꼽고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