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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없는 시대의 ‘판타지스타’

등록 2005-06-14 00:00 수정 2020-05-02 04:24

소설가 김별아가 본 박주영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카리스마
부상이나 슬럼프보다 무서운 인기와 자본의 논리를 극복하기를

▣ 김별아/ 소설가

축구처럼 열한명이 팀을 이루는 단체 스포츠에서, 과연 한 사람의 빼어난 선수가 갖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그에게 제대로 공을 보내고 띄워줄 동료가 없는 한 혼자만의 ‘완벽한 기량’이란 것이 무슨 의미일까?

‘소인국’에 어린 거인이 등장하다

언젠가 축구 원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1950~60년대의 척박한 그라운드를 뛰었고 오랫동안 후진 양성에 힘써온 백발의 원로는 명쾌한 한마디로 나의 의문을 잠재웠다. “의미가 크지요! 훌륭한 선수야말로 한 사람 반, 많게는 두 사람의 역할을 하니까요. 그렇다면 상대 팀은 열한명이 아닌 열두명을 상대로 싸우게 되는 거죠.”

열한명 대 열두명의 경기를 상상한다. 한 선수가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을 당한 뒤 열명과 열한명이 맞서는 경기를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경기의 양상은 급속도로 달라진다. 갑자기 수비에서 공백이 보이고, 공격의 흐름은 둔화되며,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채 급격한 체력 소진에 시달린다.

문제는 기량이라기보다 역할이다. 좋은 선수란 자신의 위치에서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해내는 선수다. 하지만 정말 빼어난 선수는 자신의 역할을 넘어선다. 그는 그라운드의 거인이다.

한국 사회는 ‘영웅’보다 ‘반영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웅에 반하는 대적 인물은 일정한 지지 세력을 가진다. 원균이며 한명회며 유자광이며 그 족적이 번연히 위해함을 드러내는 인물일지라도, 그들은 어느 순간 무능한 장수와 모사꾼과 간신을 넘어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그토록 ‘반인간적인’ 행적을 보인 그들에게 열광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정말 그들이 한 짓을 모두 알고도 그들을 지지하는가? 아니, 그보다는 악한을 또 다른 가치의 구현자로 재해석할 만큼 ‘영웅’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일 테다. 거부감의 이유는 좋게 이야기하면 반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의심이다. 스스로 ‘영웅’이라고 부르짖는 숱한 ‘가짜 영웅’들에게 속아온 한국인들에게 기꺼이 칭송을 바칠 만한 ‘영웅’은 어느덧 사라졌다. 우리는 마땅히 승복하고 따를 절대의 가치를 잃었다. 네가 거룩하고 큰 만큼 나도 크고 높아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작고 초라한 만큼 너도 별 볼일 없기는 매한가지라는 게다. 거인을 믿지 않는 우리는, 난쟁이 나라의 고만고만한 필부필부로 만족한다.

그런데 이런 소인국에 박주영이라는 어린 거인이 등장했다. ‘천재’라는 과감한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좀처럼 감동하거나 설레지 않는 사람들까지 흔들리게 한다. ‘그래봤자 얼마나’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을 향해 한순간 숨이 멎게 하는 멋진 슛을 날리고, ‘저러다 언제까지’라는 수상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골을 선사한다. 축구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10번, 슛과 패스와 드리블 등 모든 기술에 통달해 축구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키는 ‘판타지스타’가 마침내 우리에게 와준 것일까? 누구나 박주영을 말하기에 정작 박주영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지금, 그래도 기대에 부푼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때는 두해 전이다. 즐겨 찾는 스포츠 사이트에서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른 청구고등학교 3학년생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청구고의 변병주 감독은 그를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재능을 갖춘 선수”라 극찬했고, 우연히 그를 본 브라질의 에이전트는 “한국에도 이런 선수가 있느냐”고 스카우트에 매달렸다고 했다. 그때까지 박주영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 못했던 나는 기사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찌라시들, 또 시작했네! 이렇게 띄워주다가 언제 또 인정사정 없이 내팽개치려고?’

그렇다. 나 역시 속고만 살아온 한국인이다.

“찌라시들, 또 시작했네!”했었는데…

다른 축구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유망주일 뿐이다, 또래에 비해 실력이 월등한 것이지 프로에 진출하면 결과는 다를 것이다, 유소년 시절의 임기응변적 플레이는 믿을 수 없다, 두고 보자…. 그간 화려한 조명 아래 관심과 기대를 동시에 모았던 선수들이 때로는 그 과도한 관심과 기대 때문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모습을 봐온 축구팬들은 박주영이라는 미완의 대기에게 걱정과 우려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애정 어린 염려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는 우리 나이로 고작 스무살이다. 뛰어온 날보다 뛸 날들이 훨씬 많이 남아 있고,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기대는 성장하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골고루 주어져야 옳다. 하지만 박주영이 한명의 뛰어난 축구선수를 넘어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타고난 성정이겠지만, 그는 과묵하고 신중하다. 썰렁하다 싶을 만큼 단답형으로 이어지는 인터뷰 기사에서도 언론과 팬들의 호들갑에 들뜨지 않는 의젓함이 드러난다. 엔터테이너의 기질도 없다. 경기장에서나 가끔씩 웃을 뿐 표정도 별로 없다. 특별한 취미도 특기도 없다. 멋내기에도 관심이 없고 인터넷조차 잘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요즘 젊은 것들’ 같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이 시대의 젊은이’답다.

두해 전에 본 득점왕 기사에서 내가 아직까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임종헌 부평고 감독이 “박주영처럼 쉽고 여유 있게 공을 차는 선수는 근래 보지 못했다”는 대목이었다. 쉽고 여유 있게, 그것은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이다. 명망도, 갈채도, 그 어떤 보상도 아랑곳없이 오직 자신의 열정으로 삶을 밀고 나가는 자의 태도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 할 수밖에 없는 일의 강박과 사명에 밀려 사는 사람들에게 그는 모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가볍고 날래고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그의 플레이는 매타작이나 ‘군기’에 길들여진 도식적인 그것이 아니다. 나는 축구 선수에게까지 공인의 자세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질려 개성과 패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싸가지 없을 권리’를 주장하는 편이지만, 그는 굳이 ‘모범 청년’의 모습을 가장하지 않고도 누구도 미워할 수 없을 만큼 무심하고 ‘쿨~하다’.

박주영의 팬들은 무엇을 걱정하는가

지금껏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된 영웅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강하고 비장했다. 그들은 충분히 위대하고 존경스러웠지만,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순간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건 여전한 현실이지만, 사람 위에 사람 없어야 하고 사람 밑에도 사람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근대의 가르침으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영웅’은 마땅히 부수고 넘어야 할 우상이었다. 그런데 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 스무살의 청년은 꾸밈없는 모습,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 그러면서도 적재적소에 냉혹한 골잡이로 변모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우리를 매혹시켰다. 대중들이 간절히 바라던, 사랑스러운 거인의 풍모로.

박주영은 동시대인들이 원하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첨단 상품이 되기에 충분하다. 바로 그것이 축구선수 박주영을 아끼는 팬들이 우려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삶에서 영웅이 되지 못하는 대중들은 비정하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폐기처분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더욱 혹독하다. 박주영이 어떤 부상이나 슬럼프보다 더 무서운 이 인기와 자본의 논리를 극복한다면, 그는 마침내 진정한 축구 영웅이 될 것이다. 축구라는 뜨거운 예술의 판타지스타가. 부디, 그의 건투를 빈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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