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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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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막다가 군대 끌려갔소”

등록 2005-06-14 00:00 수정 2020-05-02 04:24

<한겨레21>의 ‘5공 강제징집’보도 뒤 기막힌 제보 줄이어
녹화사업 기획·입안한 최경조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은 인터뷰 거부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자행된 야만적 납치극인 강제징집에 정부 각 부처가 조직적으로 공모한 사실을 증명하는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 등 5건의 기밀문서가 〈한겨레21〉562호에 보도된 뒤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한 전두환 정권의 핵심 관계자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키와 체중 미달하자 ‘자원입대서’ 강요

박경식씨는 자신을 1980년대 강제징집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불법적으로 이뤄졌는지를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표본 사례라고 규정했다. 성균관대 국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83년 3월31일 집에서 아침밥을 먹다 동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연행됐다. 박씨는 “나는 시위 과정에서 검거된 적도 없었기에 경찰에 따졌고, 경찰은 ‘고전연구회’라는 학내 동아리에 가입했고 ‘학원분규 예상자’라 체포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씨는 당시 군에 입대할 신체 조건이 아니었다. 키가 158cm로, 당시 현역 입영자 기준인 160cm에 미달했다. 몸무게도 입영 기준에 못 미치는 43kg이었다. 하지만 동대문 경찰서 형사들은 하룻밤을 꼬박 세워 입영지원서를 강요한 뒤 의정부 101 보충대에 인계했다. 이곳에서 머리를 깎였고, 훈련복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신체검사 과정에서 군의관이 체중과 키 미달로 입대할 수 없다며 퇴소 조치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유치장에 가둔 채 4월1일 밤부터 박씨 부모를 상대로 ‘자원입대 동의서’를 강요했다. “경찰은 이틀 동안 내 부모를 압박했고, 4월2일 밤 ‘키와 체중이 모자라니 6개월만 현역 근무시킨 뒤 제대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입영동의서를 받아냈다”면서 “다음날인 4월3일 경찰과 함께 검은 세단을 타고 경기도 파주 적성의 28사단 훈련대로 입대했고, 꼬박 30개월을 복무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 시대 다른 강제징집 피해자들처럼 보안사의 녹화사업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입대 1년 뒤인 1984년 봄 경기도 과천 주공아파트에 마련된 보안사 조사실에서 8일 동안 자술서와 반성문 쓰기를 강요당하며 보안사 조사관 3명이 박달나무 등으로 구타했다고 말했다. 조사가 끝나자 휴가증과 10만원, 그리고 모교로 가서 동태를 파악할 선후배 명단을 줬다. 프락치를 강요한 것이다. 박씨는 “강요가 너무 심해 이름을 적어준 사람들에게 ‘보안사가 동태를 파악해 오랬다’고 고백한 뒤 보안사가 준 돈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고 회고했다.

현재 시중은행 부부장급 팀장인 김상섭씨.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81학번인 그는 ‘실제 이렇게 기막한 인생 스토리도 있다’며 <한겨레21>에 피해 사례를 고발했다. 그는 운동권도 문제 동아리 가입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강제징집의 마수에 걸린 것은 1981년 11월 대학생 병영집체 훈련인 문무대 입대 때 발생한 소란 때문이었다. 함께 입소한 외대 학생들과 고려대 학생 일부가 조교의 인권유린성 훈련에 항의해 운동가요를 부르며 운동장을 몇 바퀴 도는 시위를 했다. 이것에 반대한 김씨는 학생들의 항의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고, 이것이 빌미가 됐다.

그해 12월20일 청량리 경찰서 형사 두명이 그를 연행했고, “강제징집이 억울하다”고 호소한 그에게 “문무대 비디오 판독 결과 격렬하게 데모한 것으로 판정됐다”는 이유를 댔다. 그는 “나는 말렸는데,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경찰이 집을 수색했지만, 이른바 금서 등 문제 삼을 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사흘 만인 12월22일 풀어줬다. 그런데 집에는 이미 신체검사 통지서가 도착해 있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28일 신검을 받고 다음해인 1982년 1월5일 입대했다. 그 역시 다른 강제징집자들처럼 88여단 4대대 소속으로 최전방 일반전초(GOP)에 근무하며 보안사의 감시와 취조에 시달렸다. 김씨는 “당시 군생활의 목표는 ‘살아서 돌아오자’였고, 수시로 보안대에 불려가 반성문 등을 쓰도록 강요받았지만, 쓸 게 없어 정말 난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년이 지난 요즘도 군에서 고생하는 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해 방황하는 악몽에 시달린다”며 강제징집의 후유증을 호소했다.

나라가 그렇게 할 일이 없냐?

장순범씨는 “경찰의 입영지원서를 쓰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2주 이상 경찰서 유치장에 대기시켰고, 결국 학교쪽에서 임의로 학적을 변경해 강제징집 영장이 발부됐다”며 “제대 뒤 학교쪽에 어떻게 학적이 변경됐는지 확인했지만, 서로 책임만 회피했다”고 피해 사례를 증언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책임자의 고백과 사과,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주영복 국방장관이 보낸 강제징집 교본인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1981년 12월1일)의 수신자로 명시돼 있고, 이 방침대로 강제징집 행동대 역할을 수행한 일선 경찰의 수장이었던 서정화 당시 내무장관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일선 경찰이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만, 누구를 군에 보내고 말고 할 권한이 없는 내무부 장관에게 왜 그 문서를 보냈는지 알수 없고, 그것을 받은 기억도 없다”고 말했다(상자기사 참조).

한편 1982년 여름부터 강제징집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보안사 주도의 녹화사업을 기획·입안한 최경조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은 <한겨레21>의 인터뷰 요구를 한사코 거부했다. 현재 경북 고성의 한 농장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최씨는 “바쁘다”는 이유를 댔다. 다만 그의 부인은 “위에서 시켜서 한 일이지, 아랫사람이 그냥 하느냐. 옛일을 지금 밝혀서 뭐하겠다고, 나라에서 자꾸 조사한다고 하느냐. 나라가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국방부 주도의 군 과거사 규명 시도에 대한 울분을 토로했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청와대 직속 5인위원회가 실무, 여기에 치안본부가 참여했지만”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은 1980년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80년 9월부터 82년 4월까지 내무장관을 역임했고, 85년 민정당 국회의원이 됐다. 전두환 정권의 핵심 주역인 셈이다. 그러나 서 전 장관은 <한겨레21>과 40분간의 전화 인터뷰 내내 내무장관 재직 시절 만들어진 강제징집 교본인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 등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1981년 12월1일 주영복 국장장관 명의로 작성된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 조치 방침’의 수신자가 서 장관으로 돼 있다.

=우리 내무부는 대학생을 군에 입대시킬 수 있는 권한은 없다. 그건 병무청 소관이다.
하지만 이 방침에는 강제징집 대상자를 ‘내무장관이 결정한 소요 관련자 전원’으로 한다고 명시됐다. 또 내무부에 영입 대상자 신병 확보, 입영지원서 작성, 입영 대상자 군부대로 호송·인계 등의 역할까지 부여했다.

=병무청 권한인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 내무장관이 어떻게 대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입대 일시 등을 결정하겠나.
각 경찰서 정보과가 실제 그 역할을 수행했는데.

=나는 일선 경찰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른다.
피해자의 증언과 관련 기록들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무장관이 자기 소관도 아닌 사항을 어떻게 지시할 수 있겠는가. 보안사에서 실무 경찰에게 그렇게 내려보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그런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
보안사가 주무 장관도 모르게 경찰서 정보과로 그런 지시를 하고, 장관도 모르게 경찰이 대학생을 군부대에 인계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내무장관이라도 장관 권한인 게 있고, 부서장 권한이 있을 수 있다.
장관과 별도로 경찰 실무조직으로 이어지는 비선 라인이 존재했다는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강제징집 기밀 문서에 명시된 내무부 역할은 충실히 시행됐다.

=난 그런 지시를 한 일이 없다. 일선 경찰이 어떻게 했는지, 장관이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30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나. 임무를 다 마치고 정계 은퇴해서 조용히 있는 사람으로서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서 전 장관은 전화 인터뷰 하루 뒤 보좌관을 통해 “당시 청와대의 직접 지시를 받는 5인위원회라는 게 있었고, 그곳에서 실무적으로 (강제징집이) 진행됐으며 내무부가 아닌 치안본부가 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취지의 얘기를 전해왔다. 서 전 장관의 보좌관은 “치안본부가 위계상 내무부 소관이지만 당시 치안본부, 문교부 등에서 소요 관련자 명단을 생산하고 이를 토대로 구속할지 여부는 검찰과 상의했고, 군에 보내는 것은 병무청과 문교부가 협의한 것으로 추론한다”고 덧붙였다.
5인위원회는 2002년 4월 사망한 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사망 직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처음 언급됐다. 이 장관은 당시 “청와대교육문화수석, 안기부 1처장, 보안사 2처장, 치안본부장 등이 참여한 5인위원회가 강제징집을 주도했고, 자신은 위에서 준비해온 것은 추인했을 뿐”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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